아버지와 스승, 회니 논쟁과,

서인의 노·소론 분열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2년 11월 02일(금) 10:13
17세기 조선시대에 저명한 두 학자가 있었으니 우암(尤唵) 송시열과 명재(明齋) 윤증이다. 조선의 후기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두 사람은 사제지간으로 같은 당파인 서인이었으나 분열하여 노론과 소론으로 서로 대립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두 사람 중 우암송시열은 비록 반대당의 남인의 폄하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서 유일하게 송자(宋子)라 불린다. 비록 사약을 받아 죽임을 당했으나 곧 복권되어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 중 한 사람으로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의 제자이기도 한 명재 윤증은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아 군왕이 얼굴 한번 보지 못했으나, 정승 즉 우의정에 오른 인물로 백의정승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한때는 가장 존경하는 스승과 가장 총애하는 제자였던 두 사람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급기야는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 싸웠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 정국을 보는 시국관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오늘날의 보수와 진보처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은, 율곡 이이의 학풍을 이었다고 자부하며 주자의 학설을 신봉했다. 윤증이 중심인 소론은, 이이는 물론 성혼의 학설을 바탕으로 퇴계 이황의 학설에 호의적이고 주자에게도 비판적이기도 하여 성리학의 이해에 보다 탄력적인 견해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다 두 사람의 사적인 감정이 작용하기도 했다. 1669년 명재의 아버지 미촌(美村) 윤선거가 세상을 떠나자 명재는 아버지 연보를 작성하고, 행장과 묘갈명을 준비하고자, 행장을 현석(玄石)박세채(소론의 영수로 문묘에 배향됨)에게 부탁하였다. 성품이 원만한 박세채는 무난한 행장을 지어 주었다. 이에 명재는 자기가 작성한 연보와 박세채가 지은 행장을 갖고 자신의 스승이자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한 우암을 찾아가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매사에 깐깐한 우암은 윤선거의 연보와 행장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먼저 연보에 윤선거가 친구인 백호(百湖) 윤휴와 교류하고 두 사람이 학문에 있어 주설(注設)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구절과 윤휴를 좋게 말한 대목에서 불쾌함을 넘어 분노 하였다. 본래 송시열과 윤휴 그리고 윤선거는 친구였으나 백호 윤휴가 주자와 다른 학설을 주장하여 송시열이 사문난적 즉 주자의 학설에 대한 반역자로 보는 관계로 두 사람의 사이는 극도로 좋지 않았다.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수차 윤휴와의 교류를 중단하라고 종용하였고, 윤선거는 이에 동의하였었다. 또한 문상 온 윤휴의 조문을 윤증 뿌리치지 못하고 받았는데 이를 두고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와 계속 교류하였음을 의심하였다.
또한 박세채의 행장에는 윤선거의 강화도 사건을 왕실 인척 진원군 이세완을 따라 미복을 한 채 성을 나왔다고 적당하게 기술 하였다.
여기서 강화도 사건이란 병자호란 때, 윤선거는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하였고, 거기에서 친구인 권순장과 김익겸등과 바다를 건너 적군에 돌진해 포위망을 풀고 여의치 않으면 자결하자는 기개 있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자 윤선거의 아내는 청군에게 욕을 당할까 자결하고, 같이 죽기로 한 권순장과 김익겸이 목숨을 끊었는데도 그는 이름을 선복으로 바꾸고 노예복장을 한 채 강화도를 벗어났다. 그는 남한산성에 있는 아버지를 만난 후 죽을 생각이었다고 말했지만, 조선이 항복한 후에야 아버지를 만날 수 있어 자살할 기회를 놓치고 말아 친구간의 의리와 신하의 의리를 지키지 못한 선비로서의 큰 오점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는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벼슬을 포기하고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효종과 현종은 여러 번 출사를 종용했으나 그는 끝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 송시열은 남한산성에 있어 누가 누구를 비방할 처지가 아니어서 강화도 사건은 그 당시 조야가 용인하는 상황이었다.
직(直)을 원칙으로 평생을 살아온 송시열은 묘갈문을 부탁받고 고심하던 끝에 박세채가 쓴 행장을 그대로 써 내려간 후 마지막에 술이부작(述以不作) 즉 기술 했을 뿐 짓지는 않았다는 구절을 첨가하여 윤증에게 보냈다. 이는 사실 묘갈명을 거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글을 묘소에 새기자고 청하는 묘갈명에 모욕적인 글이 적혔으니 이를 받아 든 윤증의 심정이 어떠했으리라 짐작이 가고 남는다. 그때 윤증의 나이 45세, 난감한 그는 그 후 여러 번 묘갈명을 다시 써 달라고 부탁하며 아버지와 윤휴와의 관계를 변호하고, 자신과 송시열과 관계를 성심을 다해 설명하였지만, 송시열은 끝내 의례적인 자구만 수정해 줄 뿐이었다. 윤증과 송시열은 윤선거의 묘갈명으로 1673년부터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고심하던 윤증은 송시열과 결별을 결심하였고 그 후 그 두 사람은 사제 간의 정리도 버린 채 서로 비난하며 대립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세간에 회니 논쟁(懷尼論爭)으로 회자 되었다. 송시열이 회덕에 살고 윤증이 살던 논산 노성의 옛 이름이 니산 이기 때문이다. 또한 윤증은 기유유서에서 송시열이 언행에 있어 의리와 이익 그리고 왕도와 패도를 함께 사용했고, 대의를 명분으로 하였으나 이룬 것이 없으며 자신은 그에게 주자서 밖에 배운 적이 없다고 하였다. 물론 송시열이 윤선거의 비문을 거부한 이유는 사실 윤선거가 윤휴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 송시열의 입장에서 윤휴는 사문난적이었기에 이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당시의 정국을 바라보는 시각차도 존재 하였다.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미한 정국을 돌파하고자 숙종은 송시열과 박세채 윤증 등 이른바 산림을 기용하고 세 사람의 출사를 종용하였다. 완곡하게 출사를 거부하던 윤증이 출사를 결정하자,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송시열에게 실망하던 조정 젊은 관원은 부푼 기대로 윤증을 기다렸으나 과천까지 온 윤증은 자신의 제자 집에 머물면서 박세채를 만나 ‘개인의 사정 이외에 출사하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송시열과 외척의 세도가 변해야 하고, 서인과 남인의 오랜 원한을 청산해야하고, 상대편(남인)의 인재도 등용해야 하는데 우리가 그걸 할 수 있겠느냐’ 묻자 박세채도 더 이상 출사를 권하지 못했고, 윤증은 그대로 낙향해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송시열과 윤증의 사제 간의 결별과 서인의 분당은 두 사람의 정치적인 노선과 시국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이 많지만 묘갈문을 둘러싼 개인적 사정까지 더해진 사건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는 사적인 감정마저도 단호하게 거절한 송시열의 올곧음과, 대의를 위해서 스승의 잘못함에 지적에 망설이지 않은 윤증의 선비정신을, 공사(公私)를 혼동하는데 익숙한 오늘의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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