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 채용에 대한 역사적 고찰(2)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2년 11월 29일(목) 19:45
이 같은 관리 선발은 그 당시 시대의 사회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 대의 추천과 시험을 병행한 향거리선제는, 한의 향촌사회가 가(家)를 기반으로 하였는데, 위·진의 구품관인법은, 가문과 문벌을 중심으로 품관이 정해져 집단적 종족사회로 전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 대의 관리는 가(家)에서 바로 국가의 관리로 등용되었으나, 위·진 시대에는 종족의 추천을 얻어야 국가의 관리로 등용될 수 있어,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던 한 대의 향촌사회구조가 능력보다 가문 등 종족을 배경을 중시하는 호족사회체제로의 변혁을 반영하고 있다. 문벌의 고하에 따라 향품이 정해지고 향품에 의하여 다시 관품이 정해지는 구품중정법은 향촌에 근거를 둔 호족이 가문을 배경으로 관직을 독점하게 되는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문벌의 득세는 그 후 수·당(隋·唐)을 건국하는 관농집단의 출현을 가져오고, 그 들은 황제권 강화를 위하여 새로운 인재등용방법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과거제도이다.
3백여 년의 남북조의 분열을 극복하고 중국의 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고, 수(隋 581-618)를 건국한 양견(양견)은 문제(文帝)란 시호에서 보듯이, 중국 역사에서 한의 문. 경제 그리고 당 태종과 송의 태조, 명의 영락제, 청의 강희제에 버금가는 명군으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수가 비록 40여 여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지만, 수의 문제는 후세 중국 통일왕조의 기틀을 다진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국가재정의 확충 그리고 남북을 융합시킨 민심수습을 위해 제도를 정비하였다. 그 중에서 호족의 관직독점에 이용되고 있는 구품중정법을 폐기하고 시험에 의한 인재를 등용한 선거(選擧 과거)제도를 실시하였다. 수 문제가 처음 실시한 과거제도는 지방에서 추천된 인사를 수도에서 과목에 따라 수재(秀才). 진사(進仕). 명경과(明經科)를 시험 보았다. 수의 선거(選擧)는 당(唐)과 송(宋)을 거쳐 과거라 명칭이 바뀌고 1904년 청(淸)말에 폐지될 때까지 관리의 등용과 선발 시험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국의 관리 선발의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추천과 시험이다. 위. 진 남북조 시대의 구품관인법은 추천이요, 수·당의 과거제도는 시험이며, 한대의 향거리선은 추천과 시험을 병행한 것이다.
과거란 과목에 따라서 인재를 선발한다는 뜻이다. 수대에는 선거, 당대에는 향공이라 하였고 과거란 명칭은 송 대에 사용되었고 제도도 완비되었다.
당대에는 관리가 되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었는데, 지방의 인재를 중앙의 예부(禮部)에서 선발하는 향공(鄕貢)과 관학 졸업생을 시험하여 등용하는 생도(生徒), 그리고 황제의 특명에 의해 수시로 선발하는 제과(制科)이다.
과거란 향공을 말하는 것인데, 시험은 1차로 예부에서 학과 시험을 치르고 학과 합격자는, 2차로 이부(吏部)에서 신. 언. 서. 판(身言書判)의 면접시험을 치르게 된다. 따라서 당대의 예부시험은 엄밀히 말해서 과거후보 자격시험이라 하겠다. 당대의 과거시험 과목에는 진사, 수재, 명경과가 있는데 수재과는 초기에 폐지되고 시문을 시험 보는 진사과와 유교경전을 시험 보는 명경과가 주축이었고 명산. 명법. 명서 등의 기술과도 있었다. 진사(進士)란 사가진수작록(士可進 受爵祿)에서 나온 말로 응시자 3천여 명에 급제자는 진사가 수 십 명, 명경이 2.3백 여 명에 불과하였다. 당 초기에는 명경도 진사처럼 존중되어 명경출신의 재상도 나왔으나, 그 후 귀족은 문학, 한인(寒人)은 경학이라는 전통으로 사인(士人)들의 경학 경시로 진사의 응시자가 늘고 명경은 급격히 쇠하여 갔다. 그리하여 명경을 30세에 급제하면 늦고, 진사를 50세에 급제하면 젊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진사합격은 모든 선비의 선망이자 꿈이었다.
문치주의를 내세운 송 대에 과거제도는 완비되었다. 황제독재체제의 확립은 관료를 등용하는 과거제도도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당대의 과거가 자격시험이었다면, 송 대에는 글자 그대로 관리 선발시험이었다. 당에서는 예부시험을 거쳐 이부에서 신. 언. 서. 판이라는 시험에 합격해아 했는데, 이부의 구두 시험관이 문벌귀족이 대부분이라 서민이 합격하기는 어려웠다. 송 대에는 당말 오대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문벌귀족 사라져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곧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둘째, 송 대에는 과거의 부정을 방지하고 황제권의 강화를 위하여 전시(殿試)제도가 실시되었다. 즉 1차 시험인 지방의 향시(鄕試)를 합격하면 중앙의 예부에서 성시(省試)를 보았고 성시 합격자들은 황제가 친히 시험하는 전시란 3차 시험을 보았다. 전시에서의 불합격자는 없고 과거 합격자의 순위만 황제가 직접 결정하여, 전시의 성적은 초임과 승진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또한 황제가 친히 정하는 전시제도는 과거 합격자에게는 더 없는 영광으로 충성심을 발휘하는 중요한 요소로 문신관료체제의 확립을 가져왔다.
셋째, 그 운영에 있어서 송 대의 과거는 엄정하고 공정하게 실시되었다. 시험부정을 막기 위하여 호명법(呼名法, 성명봉인법)과, 등록법(謄錄法, 시험답안지의 글씨체를 알지 못하게 다시 써서 채점함)을 실시하여 공정성을 다했다.
이렇게 과거제는 송 대에 제도적으로 완비되고 문신관료제의 기반으로 청 말까지 계속되어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주어 사회발전을 견인하였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소요되는 경제적 부담이 엄청나 일반 서민의 과거응시는 사실상 불가능 하였다. 그리고 요즘같이 학교교육은 과거에 예속되고 과거 시험 과목 이외에는 학문의 발전이 불가능 하였고, 소수의 합격자를 뺀 이른바 고시 실패자는 결국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사회불안의 요소로 작용하는 폐해도 있었다. 송 대의 과거응시자는 당 이전처럼 지위가 세습되지는 않았지만, 독서인이자 사대부로서 시험에 합격하면 관인으로서 특권과 신분을 갖게 되었다.
송 이후의 관료는 백성을 통치하는 치자의 성격과, 황제의 신하라는 피치자의 성격 즉 왕권과 신권의 양면 속에서 점차 황제의 독재체제가 강화에 기여하였다. 다만 국가대사를 황제와 같이 책임진다는 유교적 사대부 치자의식이 확립되어 자신의 가문이나 문벌보다는 국가와 사회를 더욱 염려하는 사대부 서민 문화가 발달하였고 이러한 사대부 사회는 유교의 해석에도 형이상학적 성리학이 발달하여 새로운 유교적 정치학인 성리학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문치위주의 국가경영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군사력이 약화되어 북방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몽고족의 원이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국가경영에 있어선 치자들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송 이후의 몽고의 원 대의 관리 선발은 중국의 과거제도를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원(元) 특유의 문벌주의를 채택하여, 고급관료는 은음제란 세습제를, 하급관료는 서리출신제란 추천제를 실시하였다. 은음은 가문을 중시한 인물선발이고, 추천의 경우에도 추천자가 대부분 문벌이어서 윈 대의 관리 선발은 귀족제의 성격이 매우 강하였다. 또한 윈 조에서는 철저한 민족의 차별정책을 시행하여 국족, 색목인, 화북인, 강남인의 4계층으로 나누어 문무의 요직을 몽골인인 국족이 차지하였다. 후기에 와서는 하급관리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중국식 과거제도를 부활하였으나 고위직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민족인 몽고를 몰아내고 건국한 명도 송 대의 과거제도를 부활하였다. 중국에 있어서는 학교교육과 과거는 밀접한 관계가 유지되어 왔다. 명대의 과거는 송 대와 같이 지방에서 실시하는 향시와, 중앙에서 시행되는 회시, 그리고 황제가 친히 시험 보는 전시의 3단계로 실시되었다. 명대의 과거는 외면상 송 대와 비슷하나 실상은 많이 달랐다. 먼저 향시 응시자는 지방학교출신자로서 생원의 자격을 가지고 학교성적이 우수해야 했다. 이는 명대의 과거제도가 학교교육과 밀접하게 견인되어 과거와 교육이 유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학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입학시험에 합격해야 생원이 된다. 송 대에는 생원이 1회에 한하여 2차 과거 응시자격을 주었으나, 명대에는 향시 합격자인 거인이나 회시합격자인 진사 그리고 향시 합격자인 생원 모두 함번 합격하년 평생 동안 그 자격을 지니게 되어 신사계층을 대량 양산하면서 이들 신사가 정치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또한 명대의 과거 시험에는 반드시 팔고문(八股文)으로 답안을 작성해야 했다. 본래 중국의 과거는 시부로 행하는 진사과였으나 명대의 복고적 문화경향은 과거시험을 유교의 경전만으로 보아, 이는 명대의 특색이라 하겠다. 그래서 명대의 과거 시험은 사서 즉 논어, 맹자, 대학, 중용과 5경 즉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에 국한하였고 반드시 팔고문으로 답안을 작성해야 했다. 팔고문은 형식이 까다롭고 엄격하여 자유로운 사상이나 감정의 표현을 제약하여 수험자들은 창의적 노력보다는 팔고문의 형식을 익히는데 몰두하였고, 답안지는 글자 수까지 엄격하게 제한하여 학문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요즘도 자주 문제로 거론되는 암기위주의 교육방식 이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혹자는 팔고문이 진시황의 분서개유처럼 명대 문화에 폐해를 끼쳤다고 혹평하기도 하는데, 역사적으로 명대에는 양명학을 제외하고는 훌륭한 학자나 문인이 배출되지 못함은 창의력을 제한한 팔고문 때문이라고 하겠다.
명을 멸망시키고 이민족인 만주족이 건국한 청대에도 한민족의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과거제도는 면면이 이어져 청 말의 1904년에 폐지될 때까지 계속되어 중국역사문화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중국의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인재등용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영국의 고등문관시험도 중국과거제를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에도 선출직과 엽관제를 제외한 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은 모두 과거제도의 변형이라 할 수 있어 과거제도는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그래도 공정한 방법이라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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