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 채용에 대한 역사적 고찰(3)

이원형 본지 객원논설위원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2년 12월 21일(금) 11:28
과거란 향공을 말하는 것인데, 시험은 1차로 예부에서 학과 시험을 치르고 학과 합격자는, 2차로 이부(吏部)에서 신. 언. 서. 판(身言書判)의 면접시험을 치르게 된다. 따라서 당대의 예부시험은 엄밀히 말해서 과거후보 자격시험이라 하겠다. 당대의 과거시험 과목에는 진사, 수재, 명경과가 있는데 수재과는 초기에 폐지되고 시문을 시험 보는 진사과와 유교경전을 시험 보는 명경과가 주축이었고 명산. 명법. 명서 등의 기술과도 있었다. 진사(進士)란 사가진수작록(士可進 受爵祿)에서 나온 말로 응시자 3천여 명에 급제자는 진사가 수 십 명, 명경이 2.3백 여 명에 불과하였다. 당 초기에는 명경도 진사처럼 존중되어 명경출신의 재상도 나왔으나, 그 후 귀족은 문학, 한인(寒人)은 경학이라는 전통으로 사인(士人)들의 경학 경시로 진사의 응시자가 늘고 명경은 급격히 쇠하여 갔다. 그리하여 명경을 30세에 급제하면 늦고, 진사를 50세에 급제하면 젊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진사합격은 모든 선비의 선망이자 꿈이었다.
문치주의를 내세운 송 대에 과거제도는 완비되었다. 황제독재체제의 확립은 관료를 등용하는 과거제도도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당대의 과거가 자격시험이었다면, 송 대에는 글자 그대로 관리 선발시험이었다. 당에서는 예부시험을 거쳐 이부에서 신. 언. 서. 판이라는 시험에 합격해아 했는데, 이부의 구두 시험관이 문벌귀족이 대부분이라 서민이 합격하기는 어려웠다. 송 대에는 당말 오대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문벌귀족 사라져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곧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둘째, 송 대에는 과거의 부정을 방지하고 황제권의 강화를 위하여 전시(殿試)제도가 실시되었다. 즉 1차 시험인 지방의 향시(鄕試)를 합격하면 중앙의 예부에서 성시(省試)를 보았고 성시 합격자들은 황제가 친히 시험하는 전시란 3차 시험을 보았다. 전시에서의 불합격자는 없고 과거 합격자의 순위만 황제가 직접 결정하여, 전시의 성적은 초임과 승진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또한 황제가 친히 정하는 전시제도는 과거 합격자에게는 더 없는 영광으로 충성심을 발휘하는 중요한 요소로 문신관료체제의 확립을 가져왔다.
셋째, 그 운영에 있어서 송 대의 과거는 엄정하고 공정하게 실시되었다. 시험부정을 막기 위하여 호명법(呼名法, 성명봉인법)과, 등록법(謄錄法, 시험답안지의 글씨체를 알지 못하게 다시 써서 채점함)을 실시하여 공정성을 다했다.
이렇게 과거제는 송 대에 제도적으로 완비되고 문신관료제의 기반으로 청 말까지 계속되어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주어 사회발전을 견인하였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소요되는 경제적 부담이 엄청나 일반 서민의 과거응시는 사실상 불가능 하였다. 그리고 요즘같이 학교교육은 과거에 예속되고 과거 시험 과목 이외에는 학문의 발전이 불가능 하였고, 소수의 합격자를 뺀 이른바 고시 실패자는 결국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사회불안의 요소로 작용하는 폐해도 있었다. 송 대의 과거응시자는 당 이전처럼 지위가 세습되지는 않았지만, 독서인이자 사대부로서 시험에 합격하면 관인으로서 특권과 신분을 갖게 되었다.
송 이후의 관료는 백성을 통치하는 치자의 성격과, 황제의 신하라는 피치자의 성격 즉 왕권과 신권의 양면 속에서 점차 황제의 독재체제가 강화에 기여하였다. 다만 국가대사를 황제와 같이 책임진다는 유교적 사대부 치자의식이 확립되어 자신의 가문이나 문벌보다는 국가와 사회를 더욱 염려하는 사대부 서민 문화가 발달하였고 이러한 사대부 사회는 유교의 해석에도 형이상학적 성리학이 발달하여 새로운 유교적 정치학인 성리학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문치위주의 국가경영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군사력이 약화되어 북방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몽고족의 원이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국가경영에 있어선 치자들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송 이후의 몽고의 원 대의 관리 선발은 중국의 과거제도를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원(元) 특유의 문벌주의를 채택하여, 고급관료는 은음제란 세습제를, 하급관료는 서리출신제란 추천제를 실시하였다. 은음은 가문을 중시한 인물선발이고, 추천의 경우에도 추천자가 대부분 문벌이어서 윈 대의 관리 선발은 귀족제의 성격이 매우 강하였다. 또한 윈 조에서는 철저한 민족의 차별정책을 시행하여 국족, 색목인, 화북인, 강남인의 4계층으로 나누어 문무의 요직을 몽골인인 국족이 차지하였다. 후기에 와서는 하급관리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중국식 과거제도를 부활하였으나 고위직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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