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채용에 대한 역사적 고찰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3년 01월 18일(금) 11:10
그러나 고려 후기에 문벌귀족이 와해되고 지방의 향리출신들이 대거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자 과거합격자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조선시대 관리채용 선발시험도 과거였다. 조선의 과거제도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조선에도 음서가 있었지만 2품 이상의 관리 자제로 제한하였고 고려와는 달리 보직과 승진에 불리하여 과거제도가 아주 중시되었다.
조선의 과거는 문과, 무과, 잡과로 구분하여 시행 되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칭하는 과거는 문관을 뽑는 문과를 지칭한다.
문과는 소과인 생진과와 대과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생진과에는 사서. 오경을 시험하는 생원과 즉 명경과와, 시. 부. 등을 시험하는 진사과 즉 제술과가 있었다. 이 소과는 지방에서 향시인 초시로 명경과 제술 각각 700명씩 선발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서울에서 복시를 치러 각각 100명을 선발하여 생원. 진사의 칭호를 주었다.
생원. 진사는 초급 문관 임용자격과 대과 응시자격 그리고 성균관의 입학자격이 주어졌다. 그리고 대과는 소과 합격자인 생원과 진사 그리고 성균관 학생들이 응시하여 4서 오경과 부(賦). 표(表). 책문(策文)등을 시험하였다. 대과도 초시와 복시로 나누어 치루고 중앙의 복시에서 33명을 선발하여, 이들을 대상으로 국왕의 친전인 전시를 실시하여 성적에 따라 갑. 을. 병과로 등급을 정했다. 이 성적은 관직진출과 승진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고, 갑과 1등인 장원은 종6품에 초임되고 현직관리는 4등급을 높여 주었다.
과거는 3년마다 정기적인 식년시가 원칙이나, 나라의 경사 때 실시하는 증광시. 국왕의 문묘 참배 시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알성시 등 부정기 특별시험이 있어 과거 응시기회가 확대되어 갔다.
과거 응시자격은 일반 평민인 양인도 법제상 제한을 받지 않았으나 양인은 경제적 이유 등 현실적으로 과거응시가 불가능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과거 시험을 위해서는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 되었다. 또한 과거응시 때는 호적과 4조 즉 부, 조, 증조, 외조를 적은 보단자를 제출하게 하여 가문과 족파를 밝히도록 한 것은 과거를 통한 관리 선발에 양인을 차별하고 양반지배체제를 강화 유지하려는 것이라 하겠다.
무관시험인 무과는 소과 대과의 구별은 없고 초시에서 200명을, 복시에서 28명을 선발하고, 전시에서 등급을 정하였다. 기술관 채용시험인 잡과는 해당관청에서 필요 인원을 채용하기 위한 시험이지만 일반적으로 천시되었다.
이러한 조선의 과거제도는 조선시대를 유지한 원동력이었고 또한 그에 따른 부패와 선발인원의 증가로 양반사회 붕괴의 한 요인이 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과거제도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객관적이고 공정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그 정신은 각국의 인재채용에 반영되어 그 생명력이 유지되고 있다 하겠다. 인재 채용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2013년 우리는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눈앞에 두고 있다. 새롭게 출발하는 정부의 인재 채용이 공정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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