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마음으로 살자 申祉浩 전 영암초등학교 교사 경기도 율동초등학교장 퇴임 현 한국문인협회 회원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
2013년 01월 25일(금) 10:12 |
전원처럼 조용한 마을에 동화 속 그림 같은 카페식당들이 띄엄띄엄 있었는데, 우리가 들어간 곳은 ‘끈과 끈 사이’라는 아담한 양옥 카페였다. 아늑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좋아서 우리 회원들은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벽난로에 장작 타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 사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했고, 시낭송 수필낭독이 이어졌다. 막걸리 잔에 얼큰해지자 노래방 반주기에 흥을 돋우기도 했다.
그날 밤의 따뜻하고 오붓했던 기분이 가끔 생각나곤 한다. 같이 어우러진 사람들의 따뜻한 말마디,
밝고 환한 얼굴들이 난로 속의 불꽃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나오면서 다시 들여다 본 카페의 이름이 유난히 가슴에 남는다. 희미한 조명등이 비추는 속에, 자연의 무늬가 살아있는 나무판에 고풍스럽게 걸려있던 ‘끈과 끈 사이’, 어쩐지 서로를 떨어지지 않게 이어주는 진한 정이 배어있는 것 같다. 혼자서 팽개쳐지지 않게 꼭 붙잡아주는 든든함이 느껴지고, 추울 때 감싸주는 솜이불 같은 포근함도 있다. 끈과 끈 사이에는 연결의 고리가 있을 터인데, 나는 나이가 들고 세월의 윤곽이 희미해져 가면서 그런 끈의 고리를 꼭 붙잡고 있어야 하는 절박감을 느끼는 요즘이다.
요즘 쪽방촌에 사는 독거노인들의 사연을 대할 때마다 항상 안타까운 마음이다.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외롭게 지내는 안타까움이다. 믿음도 없고 살가움도 없이 그저 천정에는 희미한 전등빛만이 외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부부간에 다정했던 끈은 운명처럼 놓쳐버렸을 테고, 자식들과의 혈연의 끈은 자기들 살기 바빠 희미해졌고, 인생을 논하던 그 숱한 친구들은 내 자존심 때문에 내가 우정의 끈을 놓아버렸는지 모른다.
망망대해에서 다 찌그러진 쪽배에 간신히 몸을 의지한 채, 정처없이 떠도는 꼴이 아닌가. 때도 없이 몰아치는 비바람, 살을 에는 차가움, 이런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막막한 외로움일 것이다.
그 노인들만의 일이 아니다. 순간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인연의 끈을 벗어나서 외톨이로 지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남들과 어울리기를 포기하고 자기만의 울타리를 둘러치고 사는 사람들이다. 자기 생각대로만 세상을 바라보니 옳고 그름이 혼자의 판단으로 결정된다. 그러니 여러 사람에게 폐해를 끼치는 일도 당연한 일인 것 처럼 일어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가 불안할 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이들은 좋은 인연들의 끈 사이로 돌아가야 한다. 다정하고 살가운 끈, 믿음과 사랑으로 맺어진 끈으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의 <섬>이라는 두 줄 밖에 안 되는 시의 전문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를 시인은 섬으로 비유했는가 싶다. 사람들 사이를 잇게 하려는 시인의 마음이 따뜻하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본다. 가족끼리는 오붓하게 감싸는 사랑이 있어야 하고, 친구끼리는 물론 우정이 있어야 한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존경과 사랑, 직장이나 조직사회에서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서로 나누고 싶은, 아니 무언가 베풀고 싶은 심성관계가 이루어진다면 이들의 끈은 든든하게 이어지리라.
나는 언제나 우리 말에서 끈의 의미를 확실하게 하는 ‘우리’를 생각한다. 제일 다정하고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어휘이다. ‘우리 집’ ‘우리 어머니’ ‘우리 학교’ ‘우리 고향’ ‘우리 나라’, 얼마나 끈끈한 연대의식이 생기고 마음 든든해지는가. ‘내 집’ ‘내 학교’ ‘내 동네’와 같이 소유개념이 아닌, 여러 사람의 끈으로 이어진 공유의 너그러움이 있다. 다행히 우리 국민은 ‘우리’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좋은 품성이 있다.
그런데 사회가 점점 기계화 되면서 사람들은 끈을 의식하지 않는 풍조가 늘어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자기 개인위주의 이기성 때문이리라. 옛날에는 울타리 너머의 따뜻한 이웃이 있었는데, 지금은 바로 옆집도 모르고 사는 아파트문화가 야속하기만 하다. 가족간에도 오순도순 정담을 나눌 마음의 공간이 좁아지는 것 같다. 심지어 학교에서마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나 제자에 대한 사랑이, 경계와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하고 걱정스럽다.
요즘 학교에서는 친구들끼리 따돌림하는 ‘왕따’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이웃에서는 이웃과 고리를 끊고 사는 ‘사회적 외톨이’가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한다. ‘우리’가 아닌 ‘나’만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끼리의 따뜻함보다 차가운 기계와의 접촉 때문이 아닐까. 사람끼리의 끈이 그립다. 우리는 ‘우리’의 끈을 이어야 한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시답쟎게 들리고 마음이 울적할 때면 두밀마을의 아늑했던 그 카페가 생각난다. 거기 가면 나 혼자가 아닌 ‘우리’가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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