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이 있으면 조(祖), 덕이 있으면 종(宗)

조선 국왕의 묘호(廟號) 이야기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3년 02월 01일(금) 10:41
역사 시간에 조선 국왕의 순서를 태, 정, 태, 세, 문, 단, 세 운운하며 외우던 학창시절의 기억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이 태, 정, 태, 세란 국왕의 명칭을 묘호라 한다. 묘호란 임금이 죽은 후에 추증한 것이기에 우리가 잘 아는 세종대왕 본인은 정작 세종이란 칭호를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국왕은 조(祖)를 어떤 때는 종(宗)을 붙이는 것인지 대부분 명쾌하게 알지 못한다. 본래 묘호는 중국의 주나라 시대 때부터 사용하였고, 본래 중국에서는 공이 있으면 조(祖)를 붙이고 덕이 있으면 종(宗)을 사용한다는 원칙이 있었고 그 원칙도 비교적 잘 지켜졌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나라를 처음 세운 시조와 재임 중 커다란 업적을 남긴 군왕만 조의 묘호를 받았다. 당의 고조, 송의 태조, 명의 태조, 청의 태조가 각 왕조의 시조로서 조의 묘호를 받았고, 명의 영락제인 성조와 청의 순치제인 세조와 강희제인 성조만이 조의 묘호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는 고려를 건국한 왕건만 태조란 묘호를 받았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국왕들이 조. 종의 묘호 중에서 조를 선호하여 태조 이성계는 물론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무려 7명의 국왕이 조란 묘호를 추증 받아 조의 인플레를 가져오고 공이 있으면 조를, 덕이 있으면 종이란 원칙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조의 묘호를 받은 국왕이 과연 그에 합당한 업적을 남겼는지는 물론 조종의 구별이 의미가 있는지 혼란을 가져오고 말았다. 우리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세종대왕이 조가 아닌 종의 묘호를 받아 우리나라에서는 조종의 묘호의 구별이 더욱 무의미한 실정이다.
태조 이성계야 조선을 건국하였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나머지 국왕들은 정조를 제외하고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조선 왕조 실록에 의하면 세조는 이시애 난과 이 징옥의 난을, 선조는 임진왜란을, 인조는 병자호란을, 영조는 이 인좌의 난을, 순조는 홍경래 난을 진압하여 조선의 사직을 굳건히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전쟁과 반란은 오히려 정치를 잘못하여 발생한 것임에 비추어 더욱 그러하다. 세조 때 이시애 난은 수양 대군의 왕권찬탈이 원인이었고, 선조 때의 임진왜란은 당파 싸움으로 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하여 온 국토가 유린을 당하였고 더군다나 인조는 명분 없는 반정으로 정통도 없는 왕으로서 청에게 항복하여 삼전도의 치욕을 우리 민족에게 안겨주고, 소현세자와 세자 비 강 빈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소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 손자들을 제주도로 유배하여 죽게 인면수심의 잔인무도함이 연산군에 비견되거늘 묘호에 어질 인(仁)자가 들어간 인조란 묘호를 받았으니 아무리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순조 때의 홍 경래 난은 혼탁한 세도정치 서북차별에 반대하여 일어난 반란이었으니 어찌 보면 조선 중앙 정부의 실정 때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국민의 지지를 무시하고 민생을 외면한 정치는 국정혼란을 초래하여 국민을 도탄의 나락으로 내몰고 국가를 누란의 위기에 빠뜨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역사의 교훈이라는 것이다. 이에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있는 우리 정치권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가 존경하는 세종대왕의 정식명칭은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譽武人聖明孝大王)이다. 장헌은 시호며 명나라에서 받았고 세종은 묘호이다. 묘호를 먼저 쓰고 명에서 받은 시호를 그 다음에 사용한다. 이를 줄여서 세종장헌대왕이라 하는데 우리는 보통 세종대왕이라 호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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