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산면 상월리 분청사기 도요지 발굴조사 결과와 학술적 의의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3년 02월 22일(금) 10:25
세종실록지리지’ 기록 320여개 자기소 또는 도기소 중 한 곳 추정
‘司’銘과 ‘仁壽’銘함께 출토 공납용 고급 분청사기 만들던 곳인 듯
조사단, “전면 학술조사 통해 영암 분청사기 가마터 전모 밝혀내야”

학산면 상월리 분청사기 도요지 발굴조사 지도위원 회의가 지난 2월13일 학산면 상월리 발굴현장에서 조사기관인 (재)민족문화유산연구원(원장 한성욱) 관계자와 나선화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등 지도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는 발굴된 유적의 성격규명과 함께 보호대책 등이 논의됐다. 조사단의 발굴조사 결과와 학술적 의의 등을 살펴본다. <편집자註>
■ 조사개요
학산면 상월리 산 33번지 일대에 대한 분청사기 도요지 발굴조사는 1월4일부터 3월15일까지 일정으로 계획되어 이뤄지고 있다. 상월리 유천 1호 분청사기 가마터는 경지정리와 농로를 정비하면서 분청사기와 요도구, 벽체편 등이 주변에 넓게 흩어진 상태로 확인되면서 발굴조사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군은 현지조사를 통해 가마터를 확인하고 그대로 방치할 경우 자연재해 등으로 멸실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계획하게 됐다.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규모와 성격을 밝히고, 향후 체계적인 정비와 복원을 할 수 있는 자료를 마련함과 동시에 문화자원과 교육자료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 조사내용
도요지는 상월리 유천마을 뒤편에 위치한 해발 58m의 낮은 구릉에 위치해 있다. 조사결과 분청사기 가마터 1기와 숯 가마터 1기, 조선시대 민묘 3기, 근대 옹관묘 1기가 확인됐다.
▲ 분청사기 가마터
가마는 기반층(황색사질층)을 얕게 굴착해 만든 반지하식 단실(單室) 등요(登窯)로 판단됐다. 가마 벽은 2~3㎝ 두께로 유리질화 되어있으나, 바닥은 회청색 또는 적색으로 소결된 양상을 보였다. 한 바닥은 부분적으로 보수한 흔적이 있으며 도지미가 깔려 있으나 정연성은 없었다. 퇴적층은 황갈색 사질토의 단일층이며 출토유물은 분청사기와 백자편 등이다. 바닥에서는 초벌편이 주로 확인되고 있어 번조실의 가장 뒷칸을 초벌칸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판단됐다.
출토유물은 도지미와 갑발 등 요도구를 비롯해 인화와 귀얄, 조화박지 기법의 분청사기, ‘司’ 銘의 초벌편 1점 등이 출토됐다. ‘司’ 銘은 왕실의 식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사선서(司膳署)을 의미하는 것으로 ‘司膳’銘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제작 기간은 1372∼1420경으로 오랫동안 만들어졌으며, 제작지도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 등 넓게 확인되고 있다.
상월리에는 여러 기의 분청사기 가마터가 분포되어 있다. 특히 조사지역에서 북서쪽으로 400m 떨어진 유천마을 북서쪽 구릉사면에 있는 상월리 유천 2호 가마터에서는 굽안바닥에 음각으로 ‘仁壽’ 銘을 새긴 분청사기편이 출토되어 주목된다. 인수부는 처음 태종의 王世弟府로 설치된 특수 관청(정종2년 1400)으로 중간에 敬承府(태종2년 1402)와 順承府(태종18년 1418)로 개칭한 후 세종 즉위년(1418) 태종의 上王府로 복설되어 세조10년(1464)까지 지속됐다. 따라서 ‘仁壽’銘 분청사기는 태종 17년(1417) 공납용 자기에 관사명을 새기도록 하고 있으며, 인수부가 세종 즉위년 복설되어 세조 10년 혁파되고 있어 1418∼1464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조사단의 판단이다. 조사단은 특히 ‘仁壽府’ 銘 분청사기는 세종대 이후 경상도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제작되고 있는데, 경상도 이외에서는 연기군 금사리에서 확인된 예가 있으며 전라도에서는 영암 상월리의 사례가 처음으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밝혔다. 조사단은 또 상월리 가마터에서 고급 분청사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갑발과 정치한 인화분청사기, 제사 용기(祭器), ‘仁壽’銘, ‘司’銘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자기소와 도기소 가운데 한곳이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 숯 가마터
분청사기 가마터의 전면 1m 떨어진 곳에서 발굴됐다. 분청사기 가마가 폐기된 후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됐다. 내부 퇴적은 8개층으로 구분되며, 퇴적양상으로 보아 일시에 함몰된 것으로 판단됐다. 요전부와 연도부가 농로와 수로를 축조하면서 일부 파괴되었으나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요전부는 타원형으로 ‘U’ 자형에 가깝게 굴착했으며, 화구는 양측 벽에 각 2매와 1매의 봇돌을 세워 축조한 것으로 추정됐다. 번조실은 역삼각형으로 측벽의 두께는 10㎝ 내외로 회청색-황색-적색 순으로 소결됐다. 바닥은 적갈색으로 소결되었으며 목탄층이 확인됐다. 연도부는 번조실에서 좁아지면서 연도부가 돌출되어 있는 형태로 번조실 바닥면보다 높게 만들었다. 최근 수로를 축조하면서 파괴되어 바닥만 남아 있는데 적색으로 소결되어 있다.
▲ 민묘
분청사기 가마터의 북서쪽에서 확인된 1호 민묘는 평면형태가 너비에 비해 다소 긴 장방형이며, 풍화암반층을 파서 묘광을 만든 후 안치했다. 묘광의 벽선은 상부에서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안으로 약간 경사져 들어가는 형태이다. 확인된 크기는 길이 183㎝, 너비 90㎝, 깊이 18㎝이다. 4층의 암갈색 점토층으로 보아 목관 토광묘였을 것으로 추정됐다. 출토유물은 없다.
1호 민묘의 동쪽 50㎝ 떨어진 곳에 위치한 2호 민묘는 평면형태가 장방형이며, 바닥은 시신을 안치하기 위한 목관 등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 유골만 안치한 2차장이었을 것으로 판단됐다. 역시 출토유물은 없다.
가마 북동쪽에서 발굴된 옹관묘는 표토층을 10㎝ 정도 걷어내자 묘광의 윤곽선이 확인됐다. 옹관으로 이용된 옹기는 일상생활에서 동이로 사용했던 것으로 일부 유실된 상태로 노출됐다. 옹관은 옹기를 횡치해 구연부를 마주보게 만든 합구식으로 대옹을 북쪽에 두고 소옹을 남쪽에 배치했다. 묘광을 장방형으로 굴광했고, 크기는 길이 95㎝, 너비 43㎝, 깊이 12㎝이다.
■ 조사성과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서는 이처럼 분청사기 가마터 1기, 숯 가마터 1기와 옹관묘 1기를 포함한 민묘 4기의 유구가 조사됐다. 또 출토유물로는 분청사기를 중심으로 백자와 초벌 등의 자기류, 갑발과 도지미 등의 요도구가 확인됐다.
가마 내부와 가마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은 인화와 조화박지, 귀얄 기법 등으로 시문한 다양한 분청사기편이 확인됐다. 조사단은 특히 집단인화문을 시문한 분청사기는 절정기 양식으로 상월리 분청사기의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사단은 또 조사가 이뤄진 분청사기 가마가 운영되기 이전의 선행 퇴적층이 확인되어 주변에 여러 기의 가마가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특히 상월리 일대에는 6기의 가마터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이 일대가 ‘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자기소와 도기소 가운데 한곳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司’ 銘 분청사기와 집단인화문 분청사기, 祭器, 上品의 기물을 번조할 때 사용한 갑발 등이 출토되고 있으며, 주변 가마터에서 ‘仁壽’ 銘 분청사기가 수습되고 있어 공납용 자기를 만들었던 자기소 또는 도기소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는 것도 조사단의 설명이다.
조사지역 내에서 확인된 민묘는 근대 옹관묘 1기를 포함해 모두 4기다. 이 가운데 2기는 일단으로 굴광한 후 목관을 안치했으며, 1기(민묘 2호)는 이단으로 묘광을 만든 후 안치했다. 내부에 목관 흔적이 없어 유골만 안치한 2차장으로 판단된다. 조사단은 출토유물이 없어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토층 양상을 살펴볼 때 가마 폐기 이후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1기가 확인된 옹관묘는 일상생활 용기인 옹기를 사용했다. 내부에서 잔존 길이 14㎝ 정도의 어린이용 검정 고무신이 확인됐다. 고무신은 1920년대 순종(純宗)이 처음으로 고무신을 신고 있어 이 옹관묘는 근대 이후 매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조사단은 설명했다. 또 옹관묘는 1970년대까지도 어린이의 매장 관행으로 사용되었던 장법이었다. 따라서 근대 이후 어린이를 매장하기 위해 조성하였던 것으로 판단됐다.
조사단 관계자는 “이번 상월리 유천 1호 분청사기 가마터의 조사는 면적이 협소하고 경작 등으로 유구가 훼손되어 가마를 제외한 시설은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았다”면서도 “그러나 주변에 여러 기의 가마터가 분포하고 있고, 주변의 상월리 유천 2호 가마터에서 ‘仁壽’銘 분청사기가 수습되고 있어 이곳이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자기소와 도기소 가운데 한곳으로 판단되며 따라서 이번 조사가 영암지역 분청사기의 생산과 유통 구조 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사료된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앞으로 상월리 일대에 대한 전면적인 학술조사가 이뤄져 가마뿐만 아니라 관련시설이 추가로 확인되어 영암지역 분청사기 가마터의 전모가 밝혀지길 기대한다”면서 “이는 국내 최초의 시유도기인 구림 도기의 전통 계승과 창조적 발전에도 유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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