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성당 그리고 사제서품 30년 황용주 전 영암여중·고 교장 영암미래교육연구회장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
2013년 02월 27일(수) 19:36 |
이곳은 영암의 옛 고을 수령(首領)들의 안가(安家)로 사용했다고 전해 오는데 1957년 10월 4일 광주교구장이었던 현 대주교 Harold Henry가 영암을 방문하여 두 곳을 보고 그 중 현 본당 장소를 승인하여 공소로 확정하고 군인용 콘센트로 공소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1968년 8월15일에 영암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고 골롬반회 소속 우 프란치스코 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면서 현 교육관 자리에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다는데 지붕은 슬레트요, 마루는 판자를 이은 형태의 건물이었다.
1985년 10월 한 교우의 실수로 교리실(예전 사택)이 모두 불에 타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해 11월 교리실 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신자들의 헌금과 신부의 협조로 1,500만원을 마련하여 다시 사무실과 교리실을 다시 건축하였다.
1987년 당시 성당은 현재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건물이 노후 되어서 슬레트 지붕 사이가 새고 바닥이 낡았고, 무엇보다 공간이 협소하여 대축일 미사를 드릴 때 신자들이 다 들어오지 못한 채 밖에서 미사를 드려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이에 모든 신자들의 동의하에 1987년 10월 새 성전 신축 공사를 확정하여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76-2번지로 새 성전과 사제관을 선정하였다. 그 후 1991년 2월 3일 사제관 축성식이 거행되었으며 그해 8월 14일 성전 건립 설계를 하여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님을 모시고 1차 기공식을 하였다. 총대지 1157평, 연간평 252평, 지하1층 지상 2층의 성전을 착공하였으며 당시 금액 7억 원을 들여 지어진 새 성전은 1993년 10월 25일 완공되어 봉헌식을 갖게 되었다. 1997년 2월 4일 양희문(다니엘) 신부가 부임하여 사제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 영암 본당으로서는 첫 사제가 탄생하는 경사스런 일이 있었다. 우 알베르또 신부의 추천, 이 마누엘라 수녀의 심신고양으로 신학교에 들어간 김영철 (요한 보스꼬) 신부의 첫 미사가 1999년 1월27일 본당에서 있었다.
2007년 2월 1일 손대철(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여 사제 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 두 번째 사제 최영희(바오로) 신부, 수도자 김지은(비비안나) 수녀의 첫 미사가 2008년 1월16일 진행되었다. 현재 재직중인 김승희(다니엘) 신부는 2010년 9월9일 제12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으며 지난 2013년 1월27일 본당 김승희(다니엘) 주임신부의 사제서품 30주년을 맞이하였다.
김승희(다니엘) 신부는 해남본당에서 꿈 많은 청소년을 보내며, 18세의 어린 나이에 자아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83년 1월26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 후 1983년 2월7일부터 전남지역의 본당을 두루 재직하고, 1994년 2월부터 1998년까지 호주 멜보론에서 교포사목으로 활동하였으며, 1998년 2월부터는 주월동 본당, 광양본당, 지산동 본당에서 주임신부로 사목에 전념하였다. 다정다감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김승희(다니엘) 신부는 삶에 대한 높은 가치를 세속보다는 신앙에서 찾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나눔을 일상화시키는 강론은 결코 짧지 않은 30년의 신앙생활과 믿음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철학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스스로 인간적인 부족함과 허물을 눈감아 주시고 보살펴주신 하느님, 항상 기도하는 성당 교우님,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 신학교에 보내주신 김충호(미카엘)신부님에게 감사를 드린다는 김승희(다니엘)신부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라는 강론. 오늘 따라 이 말씀이 다시 한번 나의 마음속에서 뜨겁게 되새김질하게 하는 울림은 무엇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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