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박사는 일본유학의 ‘기원’

근세 에도시대 유학자들이 ‘일본유학의 4대 성인’으로 자리매김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2013년 04월 12일(금) 09:37
왕인 관련 국내 첫 기록은 해동역사 아닌 聞見別錄·靑莊館全書
2013왕인문화축제 ‘왕인을 둘러싼 한일의 역사인식’ 주제 학술강연회 성황
일본 고대문화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 왕인박사는 근세 에도시대 유학자들에 의해 일본유학의 4대 성인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로 자리매김 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또 왕인박사에 대한 우리나라 기록 가운데 실학자들이 쓴 ‘백과전서류’는 당시 일본학자들의 자료는 물론 일본 고대의 관련 사료를 확인해 저술됐으며, 이에 따라 왕인의 실재성 등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집대성이라는 평가도 내려졌다.
특히 왕인박사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가 아니라 그에 앞선 남용익의 사행일기인 문견별록(聞見別錄)과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이며, 아직기(阿直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신유한의 문견잡록(聞見雜錄)에 나오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2013 왕인문화축제’ 개막에 맞춰 지난 4월5일 왕인공원 내 영월관 2층에서 ‘왕인박사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을 주제로 열린 왕인박사 학술강연회에 따른 것이다. <관련기사 3면>
영암군과 한일관계사학회가 주최하고 (사)왕인박사현창협회(회장 전석홍) 부설 왕인문화연구소(소장 박광순)가 주관해 열린 이날 학술대회는 특히 최근 일본의 우경화와 더불어 왕인박사가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제외되고 심지어는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억지주장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열려 이를 논박하고 학계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 ‘한국과 일본의 왕인박사 전승과 교육’이란 주제논문을 발표한 김선희 교수(일본 시마네현립대학)는 “일반적으로 한치윤의 해동역사를 우리나라 왕인박사 관련 최초의 기록으로 보고 있으나 왕인의 가계와 활동 등 풍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왕인 관련 최초의 기록은 아니다”면서 “왕인박사에 대한 기록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오간 통신사들의 사행일기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조선 효종 때 문신 남용익이 쓴 사행일기 문견별록에 왕인이 등장하며, 70년 뒤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신유한의 ‘聞見雜錄’에도 왕인과 아직기가 등장하고 있어 아직기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또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펴낸 백과전서류인 청장관전서와 해동역사 등에는 왕인전승이 완성되었다고 할 정도로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서 사행일기는 일본 현지에서 입수한 정보인 문견에 의존하고 있는데 비해 청장관전서와 해동역사는 일본서기와 고사기, 古今和歌集, 일본 백과사전인 和漢三才圖會 등 일본 학자의 관련 자료를 널리 참고했을 뿐 아니라 직접 일본 고대의 관련 사료를 확인해 편찬됐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이 같은 사실들을 근거로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에 간략하게 언급되며, 고대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많은 선진문물과 인적교류 중 한 인물에 불과한 왕인이 일본문명의 주요인물 또는 유학의 개창자로 추앙된 것은 에도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라면서 “임진왜란 후 일본에서 유학이 성립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유학을 지배이데올로기로 확립시키기를 원했던 많은 유학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본 유학의 기원을 최대한 끌어올리려 했으며 그 과정에서 왕인이 아직기나 오경박사 등 수많은 이들을 제치고 발굴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 뒤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검증을 거친 ‘역사적 사실’로 인식되었다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
또 이날 학술대회에서 ‘왕인박사의 渡倭와 고대 한일관계’라는 주제논문을 발표한 연민수 연구원(동북아역사재단 역사연구실)은 “백제에서 2명의 지식인인 아직기와 왕인이 왜국에 파견된 것은 왜국에서 직접 청병활동을 했던 전지왕이 귀국한 뒤 백제지원을 위한 왜의 파병에 대한 답례로 선진문화와 기술을 보유한 인적자원의 제공차원”이었다면서 “왕인은 백제 왕족이 아닌 일반 귀족출신의 지식인”이라고 추정했다.
특히 연민수 연구원은 일본에 전해진 천자문이 왕인보다 훨씬 후에 성립된 양나라 주흥사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왕인이 직접 천자문을 전했을 가능성이 희박하고 이로 인해 왕인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논거로 사용되고 있으나, 왕인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인 아직기의 실재성을 증명해냄으로써 왕인의 실재성을 둘러싼 학계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평가도 받았다.
이밖에 ‘영산강유역 출토 마한유물과 왕인박사’라는 주제논문을 발표한 서현주 교수(국립한국전통문화대학교)는 “일본 畿內지역의 마한계 토기나 토제품은 5세기 전반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하며 호서나 호남지역과 관련된 유물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영산강유역 출신 이주민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 大阪府 북부지역으로 이곳에서 멀지않은 枚方市 일대에 왕인박사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정황으로 보아 영산강유역 출신 이주민들과 왕인박사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날 학술대회를 주관한 (사)왕인박사현창협회 전석홍 회장은 “최근 들어 일본 역사교과서에서 왕인박사가 제외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왕인박사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왕인박사가 독도 못지않게 일본인의 도덕과 양심을 일깨울 수 있는 역사주제임을 생각하며 한국과 일본이 왕인박사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도록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하기 위해 학술대회를 열었다”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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