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왕인문화축제 ‘왕인박사 학술강연회’ 주요내용

연민수, 왕인은 파병의 답례로 보낸 백제 귀족출신의 실존 지식인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3년 04월 12일(금) 10:29
2013 왕인문화축제를 기념한 왕인박사 학술강연회가 지난 4월5일 왕인박사유적지 내 영월관 2층에서 열렸다. 영암군과 한일관계사학회가 주최하고 (사)왕인박사현창협회(회장 전석홍) 부설 왕인문화연구소(소장 박광순)가 주관한 이날 학술강연회 주제는 ‘왕인박사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으로, 최근 일본의 우경화와 이에 따라 왕인박사에 대한 일본 내 위상 훼손이 심각한 상황에 경종을 울리는 좋은 계기가 됐다. 이번 학술강연회 주제발표 주요내용을 살펴본다. <편집자註> ■ 왕인박사의 渡倭와 고대 한일관계
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원은 ‘왕인박사의 渡倭와 고대 한일관계’라는 논문을 통해 2천년 동안의 한일교류사에서 가장 활발하고 우호적인 교류를 했던 시기로 ‘백제와 왜국의 3백년 교류사’와 ‘조선후기 통신사를 통한 근세 한일교류’를 꼽았다. 또 근세의 교류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대참사를 겪은 후여서 표면적으로는 평화의 시기였으나 내면적으로는 경계와 갈등이 존재했던 정치적 성격이 강한 교류였는데 비해 백제와 왜국의 교류는 국교의 시작에서 멸망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교류사에서 불변의 우호국으로 존재했던 ‘유일한 역사’라고 연민수 연구원은 지적했다.
왕인박사의 渡倭시기에 대해 연민수 연구원은 일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각각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대조하면서 4세기 후반 근초고왕, 근구수왕대의 일인지 혹은 5세기 초반 전지왕대의 일인지에 대해서는 5세기 초 전지왕대가 옳다고 생각한다며, 이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란이 극심했던 때로 특히 백제사에 있어서는 ‘國難期’였다고 주장했다. 연민수 연구원에 따르면 이 때 백제의 對倭외교가 시작돼 397년 아신왕이 태자 전지를 파견했고, 전지는 8년간 왜국에 체재하면서 친 백제외교를 주도, 왜병의 파병을 이끌어낸다. 또 전란이 종료되자 백제는 그 답례로 선진문화와 기술을 보유한 인적자원인 아직기와 왕인 등을 보냈다는 것이다.
왕인의 본관에 대해 연민수 연구원은 ‘속일본기’와 ‘고사기’ 등에 한 고조의 후손이라는 등의 중국출자설과 백제출자설이 있으나 모두 윤색(潤色)이라고 주장했다. 모두가 자신의 출자를 고위 신분의 역사적 인물에서 구하는 것이 현실의 정치적 신분을 높일 수 있는 기대감 때문에 이뤄진 일이라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연민수 연구원은 왕인은 중국계 백제인 혹은 백제왕족 출신이 아니라 백제에 본관을 갖는 일반귀족 출신의 지식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다.
왕인박사의 문화전수와 그 영향에 대해 연민수 연구원은 왕인박사가 전했다는 천자문은 후한말에서 魏(220-265)시대에 활동한 종요(鍾繇) 편찬설과 남조 양나라 때 문장가 주흥사(周興嗣) 편찬설이 대립하지만 일본에 전해진 것은 주흥사(470-521)의 것으로 보인다면서 그렇다고 해도 왕인의 실재설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왕인을 부정한다면 같은 시기에 건너간 아직기도 부정되어야 하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의 사료상에 보이는 한일관계의 역사도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연민수 연구원은 왕인의 천자문 전수는 후대의 투영이라고 해도 왕인 자신이 한문에 능통하고 유교 경전에 밝은 지식인임은 분명하며, 일반적으로 조상의 전승은 그 후예씨족의 가전류(家傳類) 등에 의해 기록되고 전승된다는 점에서 당시의 학습서로서 유행하던 천자문의 지식이 투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 영산강유역 출토 마한유물과 왕인박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서현주 교수는 ‘영산강유역 출토 마한유물과 왕인박사’라는 주제논문을 통해 일본 내 영산강유역 출신 이주민들과 왕인박사와의 연관성을 추론했다.
서 교수는 왕인박사와 관련해 5세기 전반부터 영산강유역 사람들이 일본의 畿內지역으로 이주하고 정착해간 점이 주목된다면서 이는 그 시점이 왕인박사의 渡日시기로 추정하는 때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서 교수는 또 왕인박사의 도일 추정 시점이 5세기 초(405년 추정)이고, 왕인의 활동무대가 주로 畿內지역이었을 것이므로 현재 일본에서의 마한계 유물 분포 양상은 이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서 교수에 따르면 영산강유역 출신 이주민들의 활발한 활동 양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은 大阪府 북부유적으로, 이곳 유적은 말 사육과 관련된 취락이며 특히 5세기 때의 영산강유역 관련 유물이 집중되는 곳이다. 또 畿內지역에서 왕인박사의 활동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현재 왕인박사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 곳도 大阪府 북쪽의 枚方市이며, 이 일대에서 마한계 유물이 그다지 많이 확인되지는 않으나 가까운 곳에 영산강유역 출신 이주민들이 많이 정착해 활동했다는 점으로 볼 때 그 이주민들과 왕인박사가 어느 정도 연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서 교수는 주장했다.
■ 한국과 일본의 왕인박사 전승과 교육
일본 시네마현립대학 김선희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왕인박사 전승과 교육’이라는 주제논문을 통해 일본 응신천황(應神天皇)대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백제출신 왕인박사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와 ‘고사기’ 등에 남아있으나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 등 어떤 사료에도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 없고, 조선 후기에 와서야 일본 측 기록을 참고해 소개한 저술이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특히 일반적으로 한치윤의 ‘海東繹史’를 왕인박사 관련 최초의 기록으로 보고 있으나 해동역사에 왕인의 가계와 활동 등 풍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왕인 관련 최초의 기록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왕인박사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은 조선 효종 때 남용익의 사행일기인 ‘문견별록’에 처음 등장하며, 역시 해동역사보다 집필시기가 앞선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도 왕인의 가계 등 상세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
김 교수에 의하면 왕인박사에 대한 기록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오간 통신사들의 사행일기에 처음 나타난다. 사행일기는 일본 현지인들과의 문답 등을 통해 체득한 정보를 간략하게 기록한 것으로, 모두 3권이 전해지며 17세기부터 18세기 중엽까지의 시기에 집필됐다.
김 교수는 특히 일본사행의 기록에 나타나는 왕인에 대한 서술은 매우 단편적인 언급에 그치고 있으나 일본 현지에서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며, 시기에 따라 왕인에 대한 서술이 보다 구체화되어 간다고 그 의미를 높게 평가했다.
또 18세기 초반과 중반에 저술된 ‘문견잡록’(통신사 신유한이 쓴 사행기)과 ‘해사일기’(통신사 조엄이 쓴 사행기)에 소개된 왕인은 일본에 처음으로 문자를 전해주거나 서적(경전)을 가르친 인물로 묘사되면서 일본학문의 시조, 스승으로서의 이미지를 차츰 구축해가고 있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 또 왕인의 이러한 이미지는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관련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뤄 16세기 이후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즉 해사일기에 나오는 것처럼 17세기 들어 일본의 성리학이 확립되면서 성리학의 시원(始原)으로서 일본 유학의 수용과 전파에 관심이 높아졌고, 그 결과 유학과 문학의 시조로 왕인이 선택 발굴된 것으로 김 교수는 추정했다.
김 교수는 조선후기 실학파의 백과전서류인 청장관전서와 해동역사 등에는 왕인과 관련된 전승이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정도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사행일기가 일본 현지에서 입수한 정보인 문견에 의존하고 있는데 비해 청장관전서와 해동역사 등은 일본서기와 고사기,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이나 일본 백과사전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등 일본 학자들의 관련 자료를 널리 참고하고 직접 일본 고대의 관련 사료를 확인해 편찬됐다.
김 교수는 이를 토대로 18세기에 들어와 왕인은 일본의 학문과 유학의 시조인 동시에 일본 전통문학의 시조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고, 역사적 사실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왕인에 대한 높은 평가는 일본 유학자들의 기원과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며, 이처럼 일본에서 형성된 왕인의 이미지는 일본 지식층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었고 화한삼재도회를 통해 조선 지식인들에게도 그대로 수용되었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
개항기에 들어서도 왕인 관련 기록들이 문집이나 견문록 등에 간간이 나타나고 있는데, 김 교수는 일본문화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백제인 왕인의 이미지는 일본 내에서 뿐 아니라 일본에 대해 일정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던 한국 지식인층에게도 이미 상식으로 통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추사 김정희의 시문집인 ‘阮堂集’에 나오는 왕인 관련 내용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지만 일본 자료의 인용에만 그치지 않고 추사가 직접 고증한 사실인 점에서 다른 문헌들보다 진일보했다고 김 교수는 평가했다. 즉 추사는 아시카가학교(足利學校)에 소장되어 있는 경전 중 일부를 직접 열람하고 이를 왕인과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왕인을 역사적 실존인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자 구체적 유물검증을 통해 왕인을 파악하고자 한 첫 사례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또 메이지시대 일본의 초·중등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왕인에 대한 서술경향은 하나로 정리된 서술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즉 천황의 위덕을 상찬하는 문맥에서 아직기와 왕인이 황태자의 교육을 위해 내조하였다는 내용으로 언급되는 등 학교교육을 통해 이미 왕인은 일정한 프로파간다로 성립되어가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토론요지
대진대학교 나행주 교수는 토론문을 통해 연민수 연구원이 ‘왕인박사의 渡倭와 고대 한일관계’를 통해 백제가 아직기와 왕인을 왜국에 파견한 것은 왜국에서 직접 청병활동을 했던 전지왕이 귀국 후 파병에 대한 답례로 이뤄졌고, 왕인의 실제 출자가 백제왕족이 아닌 일반귀족 출신의 지식인으로 추정한 것은 매우 타당한 결론이라고 평가했다. 나 교수는 특히 왕인이 전했다는 천자문이 왕인보다 한참 후에 성립한 양나라 주흥사의 것으로 추정되고 이에 따라 왕인의 실재성을 의문시하는 논거로 악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연민수 연구원은 왕인과는 절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인 아지사주(阿知使主) 즉 아직기의 실재성을 증명함으로써 앞으로 왕인의 실재성을 둘러싼 학계의 논란에 큰 종지부가 찍혔다고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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