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3년 05월 31일(금) 10:35
이제 그 정본을 명산에 깊이 간직하고 그 부본을 경사(京師 즉 수도인 장안)에 비치하니 그 진가를 알아줄 성인군자가 후세에 나오길 기대 할 뿐이다.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황제로부터 태초에 이르기 까지를 순서대로 서술하여 130편으로 끝을 맺는다.’ >
이처럼 사마천이 방대한 역사적 자료를 담으면서도 다양한 내용을 서술하는 데에는 단순한 편년체 형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하겠다.
이러한 기전체는 사건을 연대순으로 나열하는 편년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역사적 사실은 물론 사관의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는 역사 서술방식으로 사마천은 기전체란 새로운 역사서술 방식을 채택하여 그 시대의 사회구조와 그 내부의 발전상과 인물과 사건 그리고 제도 등 그 사회의 제반현실에 역사적 해석을 부여하고 자신의 비판적인 역사관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하였다.
사기란 명칭은 사마천이 사망한 후 위의 태사공서 도는 태사공기(太史公記)라 불렀는데 이 태사공기의 약칭이 사기이다.
사기는 태사공서에서 보듯 본기(本紀) 12편, 표(表) 10 편, 서(書) 8편, 세가(世家) 30편, 열전(列傳) 70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다섯 부분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본기는 역대 왕조의 역사를 편년체 형식으로 오제 본기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무제의 효무 본기 등 12본기로 이루어져 있다. 본기의 독특한 점은 임금은 아니었으나 유방과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루었던 항우와, 한의 2대 황제인 혜제 대신에 실질적으로 권력을 휘두른 유방의 황후인 여태후가 본기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점이다. 또한 진 본기와 함께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황제가 된 진시황 본기가 따로 있다는 점이다.
표는 연표 또는 계보도를 말하는데 사관의 기록인 연대기 .계보도. 역(歷 즉 달력)등을 기준으로 10편으로 만들었다.
서란 일종의 부분별 문화사인데 이런 서술방식은 사마천이 처음 시도한 방식으로 예서. 악서. 율서. 역서. 평준서 등 8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가는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제후와 그에 버금가는 인물들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30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가 편에서도 사마천의 독특한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즉 벼슬로는 노나라의 관리에 불과했던 공자를 세가 편에 기록하여 유학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보여 주고 있으며, 반란의 주동자로 진의 멸망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우리에게 왕후장상의 피가 따로 있느냐란 말로 잘 알려진 최초의 농민 반란자 진승을 진섭 세가로 기록하였다. 또한 한 나라의 개국공신이자 명재상인 소하를 소상국 세가로, 유방의 군신인 조참 장군과 그 후손을 다룬 조상국세가, 장자방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장량을 다룬 유후세가,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한 진평을 진승상세가로 기록하여 비록 제후는 아니지만 한의 건국과 그를 위해 공을 세운 개국공신들을 제후의 반열에 올린 것은 사마천 남다른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같은 개국공신이자 한의 천하통일에 지대한 공을 세운 한신은 그 유명한 고사의 토사구팽 당한 후에 반란을 일으켜 죽임을 당해 세가의 편이 아닌 열전 편에 기록하여 한 나라 시대의 역사가로서 현실적인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열전은 사기의 백미로 개인의 전기, 즉 개인의 사적을 기술한 것이지만, 그 개개 인물들의 삶이 다양하려니와 그 형식에 있어서도 사마천의 비판적인 역사관의 진수를 볼 수 있다. 70편의 열전은 한 사람을 다룬 경우도 있으나 여러 사람을 한데 묶어서 기록하기도 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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