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우리집 매화나무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3년 10월 11일(금) 11:45
날씨가 푹푹 찐다. 잎사귀들이 축 처져있는 걸 보니, 이렇게 더운 날은 나무도 견뎌내기가 힘든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뒤뜰 나무들에게 물주는 일을 잊었다. 해가 설핏하면 물을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는데 외출했던 아내가 들어왔다. 물을 주었냐고 묻기에 깜박 잊었다고 대답했더니 잔소리를 시작한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이든 남편들은 안다. 나도 담임선생님 앞에 선 초등학교 3학년 학생처럼 다소곳이 말씀을 들었다.
감나무, 대추나무, 레몬나무, 석류나무에 차례로 물을 주었다. 무엇보다 매화나무, 아내에게 구박을 받고 있는 저 가련한 녀석에게 더 많은 물을 주었다. 시원한 물을 잎에도 뿌려주었다.
저 녀석이 우리 집 뒤뜰로 온 날이 20년도 넘었다. 거실 유리창을 열면 바로 보이는 가장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해마다 봄이면 누구보다 일찍 꽃망울을 터뜨리며 봄을 알려주는 저 녀석. 그러던 어느 해, 내가 저 녀석을 베어버리자고 했다. 그랬더니 아내가 펄쩍 뛰었다. 그 이야기로 시 한편을 썼다. ‘누가 시인일까’라는 제목이다.
“이사 온 다음 해 뒤뜰에 심었던 / 복숭아나무가 열매를 잘 맺지 않아 / 베어버리자고 했더니 / 아내가 펄쩍 뛰었다 // 저것도 목숨인디 / 잘 크는 나무를 뭣땜새 뜬금없이 / 잘라버리자 하느냐고 / 집안에 복숭아나무가 있으면 / 여인네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는 / 속설을 믿고 혹시 그러냐고 / 기를 쓰고 말렸다 // 먼 산에 하옇게 눈이 쌓였는데 올 봄도 / 꽃망울 터트려 환한 봄소식 전해주는 / 나무를 바라보며 / 떠오르는 생각하나 // 하마터면 생목숨 잘릴 뻔 했던 / 녀석의 눈에는 / 누가 시인일까 / 나일까 / 내 마누라일까”
그런데 이번에는 아내가 녀석을 베워버리자고 한다. 나무가 오래되어 벌레가 떨어지고, 양 옆에 심은 예쁜 푸루베리아 꽃나무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나는 다르다. 젊은 여인이 싱싱하고 매력은 있지만 나에게는 나이든 마누라가 더 이뻐 보인다. 참말이다. 믿기지 않으면 용현이 형님이나 동찬이 아우에게 물어보면 안다. 같은 이치다.
그러던 중, 엊그제 매화나무 가지 하나가 잘려나갔다. 나 없는 사이 아내가 베어버린 것이다. 다시는 손대지 말도록 쐐기를 박아 놓았지만, 잘린 가지는 엎지러진 물이 되었다.
요즘 아내의 잔소리가 좀 늘었다. 잔소리는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다. 병든 새는 노래할 수 없다. 아내의 잔소리를 듣는 동안 나는 최소한 앞치마를 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 홀연히 아내가 잔소리를 그친다면, 나는 얼마나 막막할 것인가. 어느 날 뜬금없이 잔소리를 들어줄 게으름뱅이 남편이 사라진다면 아내는 또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가련하고 불쌍한 매화나무. 이런저런 사단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늘 저렇게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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