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보내는 저녁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3년 12월 20일(금) 14:24
申祉浩
전 영암초등학교 교사
경기도 율동초등학교장 퇴임
현 한국문인협회 회원
얼마 전 조간을 읽는데 포럼 란에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글이 유난히 가슴에 닿는다. 글을 읽기도 전에 제목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진다. 잃어버린 보물단지라도 다시 찾은 듯한 기분이다. ‘저녁’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워낙 따스해서 그런가. 옛날의 정감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굴뚝에선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저녁 놀이 으스름히 비치는 동네 어귀에는 일터에서 돌아오는 발길들이 이어진다. 또래들과 골목에서 놀이에 팔린 애들도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아쉬움을 남기고 일어선다. 저녁이면 누구나 집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내 동기간들이 모인다. 저녁은 오붓하고 따뜻했다. 하는 일이 고달프고 세월이 어수선해도 가족들이 모여 앉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것 같았다. 저녁에 우리네 집은 마음을 의지하는 안식처였다.
오늘날의 세태는 너무나 달라졌다. 산업화 근대화 과정 이후 직장에서는 일거리가 전문화 다양화 되었다. 상호유기체제가 되어 서로 협력해야 했다. 자연히 야근이나 출장이 많다. 퇴근 길은 회식과 함께 술자리가 이어지고 여기저기 모임도 잦다. 저녁은 어느새 지나가버리고 밤이 이슥해서야 사람들은 지친 발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기 일쑤다.
모두가 바쁘다. 학생은 더 바쁘다. 새벽부터 밤까지 학교에서 학원에서 공부에 매달려야 한다. 학생은 아예 남의 식구처럼 사는 것 같다. 직장에서 물러난 은퇴자들도 바깥 세상에 열중한다. 그래야 세상을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른다.
포럼 란의 ‘저녁이 있는 삶’을 읽어보면 요즘 우리나라 사람이 집에서 저녁을 먹는 횟수는 주말을 빼면 1주일에 고작 2번이란다. 이건 바깥 활동이 적은 사람까지들어간 통계이고, 직장인 등 출근하는 사람만의 경우는 거기에도 못 미칠 것이다. 가족과 떨어져서 하는 외식을 당연시하고, 집은 잠자고 옷이나 갈아입는 곳으로 바뀐다면 안 될 일이다.
저녁은 가족들끼리 차분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다. 시간에 쫓기는 아침이나 각자 할 일에 매달리는 낮 시간을 보내고, 저녁은 가족들끼리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보내는 행복한 시간이라야 맞다. 옛날같으면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하고, 어른들의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기도 했다. 지금도 자녀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뜻대로 안되는 일들을 가족들 앞에 털어놓으면 얼마나 마음의 위안이 되고 새로운 힘이 될까. 하루 중에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내가 익힌 재주를 가족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다면 세상살이에 더 자신감이 생길텐데.
가족간에 공유의 영역이 좁아지고 있다. ‘다 같이’가 아니라, ‘나’만의 개인주의 탓이다. 세대의 차이, 인식의 차이도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젊은 세대와 노년의 세대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다. 디지털문명에서도 그렇고, 과거와 현재의 역사인식에서도 그렇다.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가치관이 다르다. 사회적 역할이나 관심영역이 다르다고 해서 부부간에도 말문이 열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로에게 상관을 하지 않으면 남편은 신문이나 펼쳐들고 아내는 전화통에나 매달린다. 한 자리에 있다 해도 입을 꼭 다물고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에나 눈길을 준다. 늦은 시간에 귀가한 아이들은 의례적인 인사나 꾸뻑하고 제 방에 들어가버리면 그만이다. 알뜰살뜰한 대화가 없으니 가족간에 오붓한 저녁이 있을 수가 없게 된다.
가족과 함께 미국에 잠깐 나가 있는 우리 애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2년 기간의 파견 근무를 하는 아들 내외와 다섯 살 짜리 손녀인데 나간 지 이제 6개월이 되었다. 자식자랑 같지만 요즘 이 애들이 무척 기특하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늙은 부모에게 전화를 꼭 한다. 아들 며느리 손녀가 돌아가며 아침에는 그 날에 할 일, 저녁에는 그 날 잘 지냈던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멀리 떨어진 부모의 안부를 살피고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려는 살뜰한 마음에서이다.
이 애들이 국내에 있을 때 이렇게 살뜰한 건 아니었다. 떨어져 살면서도 주말에나 한 번 전화를 할까 말까 했었다. 새벽같이 내외가 각각 출근하고 야근까지 해야 되니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일 거라고 부모는 너그러운 척 했다.
그런데 애들은 미국에서 참다운 저녁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듯 하다. 이른 저녁 시간에 온 가족이 함께 음악회에도 가고 애의 놀이터에도 간다. 잔디도 깎고 집안 정리도 웃음 속에 즐겁게 한단다. 제일 신나 있는 건 엄마 아빠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손녀다. 국내에 있을 때 외로움 속에 시무룩하던 때를 생각하면 정말 다행스럽다. 스마트폰에서 들려오는 손녀의 조잘조잘 말소리에 우리도 신이 난다.
소설가 고 최인호는 가정이란 신이 주신 성소라 했다. 가정은 삶의 원천이 되고 마음을 정화 시키는 곳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아름다운 가정문화를 이어왔다. 그것이 새로운 물질문명에 급속도로 치달으면서 크게 변질되었다. 빠른 변화에 정신체계가 따르지 못한 탓인가.
유럽이나 미국, 일본같은 선진국가는 완만한 발전단계를 거쳐서인지 가정을 우선하는 문화가 유유히 살아있다. 그런 나라는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이 물론 살아있다. 우리도 옛날의 행복한 저녁문화를 다시 이을 수 있으면 사회의 온갖 병폐까지도 저절로 사라질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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