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일태 전 군수가 걸어온 길

'死而後已'의 정신 몸소 실천…늘 군민과 함께 했던 氣찬인생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2014년 09월 19일(금) 10:15
3선 도전 실패 불구 氣찬랜드, 상대포역사공원 등 찾아 영암군 발전방향 고민
JC 등 사회단체활동 활발 통대의원, 교육위원 등 역임하며 지역발전에도 앞장
민선4,5기 군정 맡아 농축산업, 복지, 관광개발분야 등에서 탁월한 업적 남겨
민선 4,5기 영암군정을 맡아 열정적으로 일했던 김일태 전 군수가 복강 출혈로 전남대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지난 9월14일 별세했다. 향년 69세인 김 전 군수는 6·4 지방선거에서 3선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지난 6월30일 군수 퇴임 후에도 거의 매일 자신의 재임 중 최대 업적인 氣찬랜드와 상대포역사공원 등을 찾아 영암군 발전방향을 고민하는 등 그가 정치철학으로 삼아온 '사이후이'(死而後已, 죽은 후에야 일에서 손을 뗀다)의 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군수 재직시절 일부 반대세력과의 과도한 대립 등은 흠으로 남지만, 그가 일궈낸 군정 성과들은 이 같은 흠집을 훨씬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평가다. 고 김일태 군수의 삶과 민선4,5기 영암군수로서 일군 성과들을 되짚어본다. <편집자註>
■영암군민과 함께한 '氣찬 인생'
김 전 군수는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펴낸 자신의 세 번째 자서전의 제목을 '군민과 함께한 氣찬 인생'으로 정했다. 낙선의 고배를 딛고 군수로 당선되어 민선 4,5기 8년 동안 일군 군정의 성과물들이야말로 그에게 氣찬 인생이었다는 표현이다. 실제로 그는 자서전 서두에 "나는 단순히 인간 김일태의 자서전을 내기 위해 이 책을 내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는 영암군민의 땀과 눈물과 기적과도 같은 성장의 역사가 담겨있다. 나와 함께 영암군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간 영암군민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쓰고 있다.
김 전 군수는 정치에 몸담게 된 계기를 고교시절 농촌봉사활동이라고 회고한다. 그는 자서전에서 "학교 RCY(청소년 적십자) 활동에 참여해 방학동안 농촌마을에서 한글을 가르쳐주는 한글봉사를 했다. 여름방학에는 해남군 화원면 이목리에서 15일간 한글공부를 지도하는 농촌봉사활동을, 겨울방학에는 영암군 군서면 성양리 양지촌마을에서 농촌마을의 처녀 총각과 우리글을 모르는 어르신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는 농촌봉사활동을 했다. 당시 한글을 가르쳤던 추억은 영암군의 정책에도 자연스럽게 반영되었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김 전 군수는 재임 중 특수시책사업으로 각 읍면 마을별로 한글 및 셈을 못하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2007년부터 '왕인문해학교'를 열었고, 올 여름학기까지 모두 6천300여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우리말을 읽고 쓸 수 없었던 어르신들이 손자손녀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왕인문해학교의 성공적인 운영을 늘 자랑스럽게 여겨온 김 전 군수는 "군수가 된 뒤 조사해보니 문맹자가 전체 영암군민 가운데 10%에 달했다. 언젠가 영암군은 '문맹률 제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할 정도였다.
■지역사회와 함께한 인생역정
김 전 군수는 자신의 20대를 '피 끓는 열정으로 똘똘 뭉친 시기'로, 3,40대를 '영암사랑을 실천한 시기'로, 50대를 '氣찬 인생의 여로가 시작된 시기'로 꼽은 적이 있다.
대학 재학 중 월남전에 참전했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영암군산악회를 조직, 월출산 구름다리 설치를 추진했다. 천황사 계곡 단풍나무 식목활동과 군서에서 도갑사까지 벚꽃나무 식재를 군민헌수운동으로 추진한 것도 그가 앞장서서 한 일이다. 또 영암라이온스클럽, 밀알회, 한국방공연맹(현 자유총연맹) 영암군지부 사무국장, 대한웅변협회 영암군지부장, 영암청년회의소(JC) 창립멤버 등 사회단체활동도 활발했다.
김 전 군수는 특히 자신의 사회단체활동 가운데 JC에 대해서는 늘 진한 애정을 표시하곤 했다. "1971년 JC에 몸담은 이후 43년간 JC를 멀리하고 살아본 적이 없다. 영암JC의 활동이 영암군 발전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JC활동은 내가 영암군수직을 수행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JC활동을 하면서 맺어진 다양한 인맥과 지도역량이 군정을 수행하는 지금의 나를 만든 자양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 전 군수가 공직에 입문한 것은 33세에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고서다. 그는 통대의원으로 활동하며 가뭄극복을 위해 양수기 기증사업을 펼쳤고, 영암읍 우회도로 개설 등 지역발전을 위한 현안해결에 앞장섰다. 또 영암군번영회 제5대 회장으로 영암에서 삼호 용당까지 벚꽃 길을 조성하기도 했다. 특히 번영회장으로서 그는 월출산 국립공원 승격에 앞장섰고, 영암 삼호반도 목포편입 저지를 위한 단식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부친의 건설업을 도우며 익힌 경영능력도 탁월했다. 현재의 영암군 청사는 김 전 군수가 건화건설(주) 부사장이던 1980년 신축공사를 직접 맡아 시공했다. 그는 33년이 지난 지금 타일 한 장 금이 가거나 떨어지지 않는 청사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고 술회하곤 했다.
첫 부인과 이혼하는 시련을 겪기도 한 김 전 군수는 미망인이 된 부인 임향숙 여사에 대해 "어떤 노력으로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지고 산다"며 늘 진한 애정을 표현했다.
김 전 군수가 '氣찬 인생의 여로가 시작된 시기'로 꼽는 50대 때는 전라남도교육위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로서는 두 번째 공직인 교육위원으로서 삼호서초교와 삼호서중의 설계를 위해 서울 상명초교를 현장답사 하는 등 개교에 노력했고, 신북공고(현 영암전자과학고)와 구림공고 통합을 저지하기도 했다. 또 교육위원회 의장을 맡아 삼호고 신설에 앞장섰다.
2002년 군수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46%의 지지를 얻고도 낙선한 김 전 군수는 4년 뒤 민선4기 단체장을 뽑는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서 당선의 영예를 안은 전국 19명의 기초단체장 중 한명이 됐다. 또 2010년 민선5기 단체장 선거에서는 무투표 당선의 영예까지 안았다.
■ 민선4,5기 군정성과
민선 4,5기 영암군정을 맡았던 김 전 군수가 일군 성과물은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이 가운데 특히 김 전 군수가 자랑으로 여기는 것은 농축산분야다. 영암 농산물의 마케팅을 위해 조성한 영암군 친환경 농·특산물 직거래장터(氣찬장터), 달마지쌀 골드, 매력한우 등 브랜드화사업 등이 그것이다.
또 월출산 氣찬랜드는 그가 가장 애정을 갖고 추진한 시설물로, 전남대병원에 입원하기 전날까지도 이곳을 찾아 피서객들과 대화를 나눌 정도로 애정을 갖고 있었다. 또 하(河)미술관 개관, 상대포역사공원 조성, 낭산 김준연 선생 기념관 건립, 체육진흥 등도 그의 업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김 전 군수는 복지정책분야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유명하다. '달뜨는 집'과 왕인문해학교, 장애인복지시스템, 영암군민이 함께 만든 130억원의 장학기금 등등. 특히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시행한 '2012년 지역사회복지계획 시행결과 평가'에서 영예의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전국 지자체 대상 복지 분야 평가에서 천하통일을 이룬데 대해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술회해왔다.
일부 안티세력과의 끊임없는 불협화음과 특정업무 추진과정에서의 일부 독단적인 모습 등으로 인해 이처럼 많은 업적을 남기고도 적잖은 비난 내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김 전 군수는 재임시절 집무실에 액자로 걸어두고 되새겼던 삶의 지표이자 정치철학인 온고지신(溫故知新), 선공후사(先公後私), 사이후이(死而後已)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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