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 vs 김기태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4년 11월 07일(금) 11:10
아홉 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냈던 김응용 감독의 분풀이 방식은 유별났다. 경기도중 심판진이나 선수들이 못마땅하다 싶으면 걸터앉은 의자며 책상을 가차 없이 내던져 산산조각내곤 했다. 심판 판정에 대한 무언의 항의표시이자, 선수들에겐 정신집중을 촉구하는 회초리였던 셈이다. 한 점차 리드를 지키기 위해 당시 SK의 김성근 감독처럼 번트를 지시하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 대신 강공으로 밀어붙이거나 선수 자신의 판단에 맡겼다. 하지만 불같은 성격의 이 '코끼리' 감독도 우승한 뒤 인터뷰를 할 때면 잊지 않는 말이 있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우승은 전국 어디를 가나 마치 홈구장인 것처럼 열렬히 응원해준 팬들의 성원 때문이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지방신문들도 프로야구 전담기자를 두고 있을 때 해태 선수단의 경기일정을 따라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인천, 그리고 전주까지 거의 1년 동안 떠돌아다닌 적이 있다. 아쉽게도 우승 모습을 취재하진 못했지만 아무리 원정경기라도 타이거즈 덕 아웃 쪽은 항상 해태 팬들로 꽉 찼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장 크고 최신이었던 잠실구장에서는 주로 호남사람들이었던 해태 타이거즈 팬들이 상대팀 스탠드까지 점령(?)할 정도였다. 경기가 열리는 날 그들은 우승한 어느 한국시리즈에서도 그랬듯 타이거즈 선수들이 때리고 달리는 일거수일투족에 그야말로 울고 웃었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게 된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구전문가들은 가장 직접적인 계기 중 하나로 '5·18'을 꼽는다. 전두환 정권시절 청와대 11명의 수석들 중에는 이학봉 민정수석비서관도 들어있다. 이 수석은 '5·18'로 흉흉해진 민심을 야구 쪽으로 돌려놓기 위해 프로야구 창단을 염두에 두었고, 11인의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사 생도 시절 축구선수였던 전두환은 왜 프로축구가 아닌 프로야구 창단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려했을까. 바로 관중 때문이었다.
당시 전 대통령은 축구선수 출신답게 한가할 때면 축구중계방송을 즐겼다고 한다. 더구나 축구는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였다. 하지만 이는 국제대회에 출전한 대표팀의 경기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고교축구나 실업축구가 열리는 경기장의 관중석은 썰렁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야구는 딴판이었다. 옛 동대문구장은 고교 야구가 벌어지면 그야말로 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것이 전두환 정권이 프로축구 대신 프로야구를 '5·18' 뒤 민심수습의 방편으로 삼고자 했던 이유다. 고교야구에서 확인된 '모교애'를 토대로 프랜차이즈(연고지)제를 도입해 '향토애'까지 자극한다면 흥행에 성공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계산은 적어도 광주·전남·북에선 정확했다. '5·18'의 아픔과 울분을 달리 토해낼 방법이 없었던 호남사람들은 프로야구에 푹 빠졌다. 김봉연, 김성한 같은 '거포'에 김일권, 이순철, 이종범 같은 '호타준족'이 즐비했고,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 같은 강속구 투수까지 보유한 해태 타이거즈 역시 암울하고 답답한 호남인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줬다. 해태가 승리할 때마다 '목포의 눈물'이 구장 가득 메아리쳤다. 특히 경기소식을 요즘처럼 방송이 아니라 주로 지면을 통해 파악해야 했던 당시에 선수 하나하나의 기록을 줄줄 외우는 전문가 급 팬이 있었는가 하면 홈런을 친 선수가 몇 구째를 통타했는지까지 기억하고 지면의 오기(誤記)를 항의하는 팬들도 있었다.
올 시즌 최하위권으로 추락한 KIA 타이거즈의 선동열 감독이 결국 물러났다. 구단은 유임시켰지만 열성팬들이 가만있질 않았다. 후임 감독은 김기태(45) 전 LG 트윈스 감독이다. 선수시절 고향 팀 타이거즈는 그를 철저하게(?) 외면했었다. 그의 운명을 가른 일은 1991년11월 프로야구 1차 신인지명 때. 당시 해태 타이거즈 김응룡 감독은 인하대 출신의 강타자 김기태 대신 한양대 출신의 우완투수 오희주를 지명한다.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결정이었다. 타이거즈 내에는 마땅한 좌타자가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더구나 투수는 선동열, 조계현, 김정수, 이강철, 신동수까지 버티고 있어 오희주를 지명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결국 김기태는 신생팀 쌍방울레이더스에 지명돼 강타자로 이름을 날리며 울분을 훌훌 털어버리긴 했지만, 고향 팀의 선택을 받지 못한 서운함은 풀길이 없었을 터이다. 이런 그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고향 팀의 감독이 되어 금의환향했다. 오랜 기간 돌고 돌아 고향 팀에 안착한 김기태 감독의 리더십이 참으로 기대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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