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原流, 조상 섬김, 그리고 존재이유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5년 03월 27일(금) 11:23
조찬재(曺贊在)
昌寧曺氏 靈巖 世豊南隱公 都門中 公司員(대표)
서울중앙법원 서기관 정년퇴임
前 영암군파크골프연합회 2대 회장
우랄 산맥 이남, 카스피 해 동쪽, 텐샨 산맥 서쪽이 곧 중앙아시아지방이다. 한민족은 이곳에서 구석기시대를 전후해 몽고지방으로 이동했고, 다시 남하해 한반도에서 살게 됐다. 우랄알타이어족인 원시 퉁구스족의 한 갈래로, 고대 중국에선 동이(東夷)라고 부른 민족이 바로 우리조상이다. 형질상 특징으로는 우선 눈에 속 쌍꺼풀이 있으며, 두드러진 광대뼈와 중키에 몸매는 옆으로 바라졌다. 속 쌍꺼풀에 실눈과 광대뼈는 오랫동안 추위와 싸우고 감기, 축농증, 폐렴 등을 이겨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으로, 빙하기 때 바이칼 호 남동쪽에 펼쳐졌던 빙하에 막혀 내려오지 못하는 동안 추위에 적응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머리뼈로, 뒤통수에서 눈까지는 짧고 양 귀 사이는 넓으며 높이는 세계인종 중 가장 길다.
현대우주론에 따르면 세상만물은 약 137억년 전 대폭발(Big Bang)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주는 지금도 계속 팽창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태양과 지구가 만들어진 시기는 50억년이 채 못 되고 생명이 시작된 것은 40억년 전으로 본다.
인류의 선조가 지금 우리와 아주 비슷한 모습을 갖게 된 것은 100만년 전쯤으로 추정한다. 계속 팽창하고 있는 우주가 약 50억년 뒤엔 태양이 거대한 크기의 적색 거성으로 변해 지구 등을 태워버리고 ‘빅 크런치’, 모든 것이 수축해 하나의 점으로 붕괴하는, 우주의 종말에 이른다는 학설도 있다.
그렇다면 대자연의 모든 법칙은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움직이는가, 아니면 대자연의 물리적 화학적 현상에 따라 움직이는 것인가? 어떤 이는 이 모든 것이 초원자의 신성(神性)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 신성이란 바로 하느님이요, 예수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당시 기독교가 앞장서 불변의 진리로 내세웠던 천동설을 부인했다. 온갖 탄압이 계속됐지만 지동설은 끝내는 진실로 판명되었다.
나는 대자연의 법칙은 대자연의 법칙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믿는다. 그 법칙이 비록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움직인다고 할지라도 그 초자연적인 힘을 지상의 어떤 종교나 그 교주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약에 신이 있어 그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그 신은 또 누가 창조했단 말인가? 나는 신의 영광이 빛나는 천국이나 죄인들이 불타고 있다는 지옥 같은 것은 없다고 믿는다. 현재 내가 서있는 이 자리가 바로 천국이고 지옥이다. 바로 이 시각, 이 장소에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이 천국의 즐거움일 수도 있고 지옥의 고통일 수도 있다. 전생이나 후생을 떠나 내가 처해있는 이 시점, 이 자리, 지금 하고 있는 일,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조상들이 가장 소중한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지구, 이 우주의 주체는 바로 나, 또는 이웃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물론, 우리 조상들이 주체다. 내가 눈을 감으면 내 주변은 물론 우주가 없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세상의 주체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인간이라기보다 살아있는 생명체다. 천국이나 지옥을 부정하는 것, 더 나아가 신을 부정하는 것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연민과 우정, 애정 등 인간 본연의 자세를 찾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정치가이며 과학자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신앙을 통해 보는 방법은 이성(理性)의 눈을 닫는 것’ 이라고 지적했다. 찰스 다윈은 코페르니쿠스가 시작한 혁명을 이어받아 인류에게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서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다윈은 이 우주론을 생물학으로 확장시켰다. 그는 ‘사람들은 지적인류가 출현한 것이 경이로운 사건이라고 자주 말하는데 다른 감각기관을 지난 곤충의 출현도 아주 경이롭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간중심주의에 맞섰다. 다윈 사상의 핵심은 ‘자연선택’이다. 이론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생물은 살아남을 수 있는 숫자보다 더 많은 자손을 낳는데 이 가운데 환경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변화한 자손만이 살아남아 자식을 퍼뜨리고 이 변화가 각 개체군에 축척된다는 것이다. 문화, 종교, 전쟁, 우주에 대한 인식 등 모든 것은 인간이 생겨난 후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고 인간에 의해 인식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신(神)도 물론 마찬가지다. 우주의 대법칙은 인간이 존재하기 훨씬 전, 백수십억년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지상의 각 종파들의 기원은 겨우 수천만년 전으로 한정되어 있다. 인간은 정신적 육체적 한계로 인해 우주에 대해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달에 이어 화성에도 착륙을 시도하고 있다. 인간의 노력으로 대자연의 법칙을 조금씩 더 알게 되는 과정을 깊이 존중해주고 싶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세계, 자신만의 이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신분, 직장, 보수, 남편, 아내라는 일상적인 것을 빼 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면 무의미하지 않겠는가? 아무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누가 박탈하려해도 뺏을 수 없는 영원한 무엇인가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신앙일 수도 있고 신념일 수도 있고 비전이나 철학일 수도 있다. 신앙이나 신념을 갖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신앙이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 배타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천국과 지옥, 말세(末世) 위협이나 강압적 전도(傳道) 등을 일삼아서는 더욱 안 된다. 성철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은 이런 질곡에서 벗어난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평생 동안 그 많은 전도의 유혹에서 용케도 헤어 나와 지금에 이르렀다. 나는 이 세상에 나를 있게 해주고 나를 알뜰하게 키워주고 자상하게 교육시켜준 부모나 조상들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 입으로만 외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분들의 주문대로 가치 있게 삶을 유지하고 그분들에 대한 존중을 끝까지 계속하면서 그 분들이 안겨준 생명을 진실하고 정직하며 아름답게 마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1940년 영암읍 춘양리 651번지(남춘동 막사당골)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50년을 넘게 살았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한 번도 고향 춘양리를 떠난 적이 없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영암으로 내려와 자리 잡은 우리집안은 전통 유가(儒家)로, 부모, 조부모에서부터 25대조까지 제사와 시제를 지낸다. 그 위로도 가계는 이어져 신라 지평왕의 사위로 43대조인 시조 태사공 계룡(繼龍)에 이르기까지 창녕조씨(曺氏) 대종회에서 제례를 모신다. 시조 유래 설화가 있고 득성지(得性地)도 있다. 유별나게 그런 설화를 부인하고 싶지는 않지만 분명 그 위로도 혈통은 이어져 있을 것이다.
현대 인류와 비슷한 모양을 지니게 된 것은 수백만년 전부터로 본다. 유인원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분명 그때까지도 연결고리가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신의 원류(原流)에 대해 먼저 생각해 봐야겠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한 사람의 생명은 그냥 아무렇게나 태어난 것이 아니다. 부모에서부터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에서 그 위로 수십대, 수십만대, 수억대 그리고 거의 무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해서 지금 열매를 맺은 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아무 의미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렇다면 부모에게서 태어난 뒤 얼마나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인연을 맺어 왔는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혹여 버림받은 것이 아닌가? 돌이킬 수 없는 패배는 아니었는가? 비굴한 복종과 온갖 야유 속에 노예적 편익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는가? 일생이 번민과 고통은 아니었는가? 정직과 인내, 사랑과 용기를 잃지는 않았는가? 그렇지 않고 만물의 영장(靈長)으로 군림하고 있는가? 기쁨과 슬픔으로 무늬 놓아 곱게 짜낸 한 필의 고운 비단은 아니었는가?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자신의 원류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은 지구상에 널려있는 무수한 생명체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해파리나 모기나 아메바 같은 그 숫한 의미 없는 생물일 뿐이다. 자신이 존재할 수 있게 해준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진정한 사랑과 용기를 알지 못한다. 책임감과 정의감도 희박할 것이다. 부모의 은덕을 생각할 때마다 인생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혜택만을 입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무수히 부모의 혜택만을 입고 베푼 것은 없다. 많은 사람들은 대신 자식들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모에게 베푼 기회가 있는데도 대부분 외면하는 것이 현실이다. 나를 낳아 이세상의 일원이 되게 하고 알뜰하게 키워주고 정성들여 가르쳐주고 나의 2세를 갖도록 해주신 부모의 은혜를 어떻게 저버릴 수 있겠는가? 부모뿐만 아니라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에 대한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술 마시고 온갖 취미에 몰두하고 돈 버는 일엔 혈안이면서도 부모 산소 한 번 찾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정직하고 성실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원류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알고 은혜에 보답할 줄 알겠는가? 나의 남은여생은 사회에 봉사하면서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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