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韓日관계 왕인박사의 상생·호혜 되새겨야" (사)왕인박사현창협회, '한일교류사서 본 왕인박사' 학술강연회 개최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
2015년 04월 21일(화) 08:58 |
현재 韓日 양국이 처한 교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거 韓日의 선린우호의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 가운데서도 왕인박사의 활동을 비롯한 백제의 문물전수와 조선시대의 통신사를 통한 문화교류 등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할 필요가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왜(倭)'의 단계를 넘어 '일본(日本)'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중심에 왕인박사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에 따라 미래의 韓日관계는 일본의 국가 형성기 수많은 도래인들이 보여준 상생과 호혜를 되새겨야 한다는 결론도 나왔다.
이 같은 지적은 지난 4월9일 왕인박사 유적지 내 영월관 2층에서 '2015 왕인문화축제' 학술회의 프로그램으로 열린 '한일교류사에서 본 왕인박사'라는 주제의 학술강연회 주제발표와 토론 등에 따른 것이다.
군과 (사)왕인박사현창협회(회장 전석홍), 전남대 박물관이 주최하고, 왕인문화연구소(소장 박광순)가 주관한 이날 학술강연회에서 박광순 소장은 '일본인의 형성과 도래인'이라는 주제의 종합강평을 통해 "4세기 말에서 5세기 고분시대, 응신·인덕이 형성한 가와찌(河內)정권을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로 보는 것이 정설이며, 바로 이 고대국가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 문화와 각종 산업기술을 몸에 지니고 지속적으로 건너간 도래인이요, 그 중심에 왕인박사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또 "문자의 사용은 문명의 기초가 된다"면서, "왕인은 그저 논어와 천자문을 전수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활용해 일본의 왕자를 비롯한 상류층을 교화시킴과 동시에 일본문자 창안의 단서를 만들었다는데 그 공이 있었던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하우봉 전북대 교수는 '조선시대 왕인에 대한 인식의 전개양상과 그 의미'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왕인박사의 문물전수와 활동에 관해서는 그동안의 연구로 많은 사실관계가 밝혀졌으나 아직 불확실한 분야도 많다"면서, 특히 "현재의 한일 양국의 교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선린우호의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체적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밝히고, 그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할 필요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권오영 서울대 교수는 '마한·백제주민들의 일본열도 이주와 정착'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임나일본부설은 일제 패망 후에도 일본인들의 한반도를 보는 시각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도 악영향을 끼쳤으며, 임나일본부설의 극복이란 과제의 해결이 또 다른 역사왜곡까지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백제사의 특징은 국제성과 개방성이며, 이런 까닭에 삼국시대에 이미 동아시아에서 한류를 실현할 수 있었고 지식강국, 문화대국의 면모를 보이면서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중심축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고구려와의 군사적 긴장 속에서 백제와 왜는 시종일관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상호 이익의 실현에 노력했던 것처럼 미래의 한일 관계 역시 양국 간 이해관계를 일치시켜가면서 상대에 대한 배려, 존중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영진 전남대 교수는 '마한 분주토기의 발전과 일본열도 파급배경'이란 주제발표를 통해 "마한주민의 일본열도 이주는 3세기 후반에서 6세기 후반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파상적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또 강은영 전남대 교수는 '일본 율령국가의 형성과 왕인의 후예씨족'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고대일본의 국가개조작업인 율령체제의 확립과정에서 왕인의 후예씨족들은 율령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호적제도의 기원을 만드는 등 맹활약했다"고 지적했다.
□2015 왕인문화축제 학술강연회 주요내용
'2015 왕인문화축제'의 학술회의 프로그램인 학술강연회가 지난 4월9일 왕인박사유적지 내 영월관 2층에서 '한일교류사에서 본 왕인박사'라는 주제로 열렸다.
군과 (사)왕인박사현창협회(회장 전석홍), 전남대 박물관이 주최하고, 왕인문화연구소(소장 박광순)가 주관한 이번 학술강연회에서는 하우봉 전북대 교수가 '조선시대 왕인에 대한 인식의 전개양상과 그 의미', 권오영 서울대 교수가 '마한·백제주민들의 일본열도 이주와 정착', 임영진 전남대 교수가 '마한 분주토기의 발전과 일본열도 파급배경', 강은영 전남대 교수가 '일본 율령국가의 형성과 왕인의 후예씨족' 등에 대해 각각 주제발표를 했다. 또 박광순 소장이 '일본인의 형성과 도래인'이라는 주제로 종합강평을 했다. 이들의 발표내용을 요약했다. <편집자註>
■ '조선시대 왕인에 대한 인식의 전개양상과 그 의미'
"韓日의 미래 위해 선린우호의 역사적 사실 재조명 절실"
왕인에 대한 문헌기록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현전하는 고대 사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일본과의 교류과정에서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 전기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왕인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일본서기」 기록을 참조하면서 백제의 문물전수기사를 소개했다. 임진왜란 후 국교재개교섭과정에서 일본승려 현소(玄蘇)의 편지를 소개하는 가운데 백제의 박사에 의해 문자와 유교, 불교 등이 전수된 사실을 「선조실록」에 그대로 기술하기도 했다. 이로써 관심 있는 사람은 기본사실 자체는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보다 본격적으로는 조선 후기 통신사행원들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 측 문사와 교류하면서 왕인 관련 사실을 듣고 이를 일본사행록에 소개한 것이다. 남용익, 신유한, 조엄, 원중거 등이 그들이다. 이후 이를 통해 사실을 알게 된 실학자들이 일본서적을 참조하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소개했다. 이덕무, 한치윤, 김정희, 이규경 등이 그들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처음에는 백제문화의 일본 전파라는 관점에서 출발했다가 조선 후기 통신사행원들과 이덕무, 한치윤 등 실학자에 의해 왕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로 발전했다. 이들에 의해 체계화된 왕인에 관한 기술과 인식은 후대로 계승되었고, 오늘날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확고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근대 이후 일본에서는 내선일체, 일선동조론의 상징으로 왕인박사를 이용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왜곡되기도 했다.
현재의 양국 간 교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한국과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는 선린우호의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가운데서도 왕인박사의 활동을 비롯한 백제의 문물전수와 조선시대의 통신사를 통한 문화교류 등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구체적인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밝히고, 그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할 필요가 절실하다.
왕인박사의 문물 전수와 활동에 관해서 그동안의 연구로 사실관계가 밝혀진바 많지만, 아직 불확실한 분야도 많다. 연구사적인 과제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왕인이 도일한 시점에 관해 일본사서와 관련 자료를 엄밀하게 분석해 문헌학적으로 재검토할 필요, ②박사(博士), 길사(吉師) 등의 정확한 의미, ③왕인이 전했다는 논어와 천자문의 실체, 중세 일본인들이 아직기와 왕인이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역경(易經), 효경(孝經), 산해경(山海經) 등이 사실인지 여부, ④왕인의 출자와 관련된 자료 조사의 필요성, 이를 위해서는 문헌 뿐 아니라 구전설화나 고고학적 접근을 통한 학제적 연구의 필요성, ⑤백제의 고대국가 성장과정에서 영산강이 차지하는 위상문제 재검토 등이다.
이들 주제에 관해서는 보다 정밀한 분석과 함께 동아시아 교류사라는 폭넓은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학제적 연구가 필요하고, 객관적이고 학술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절실하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의 왕인박사 관련 기사를 추가적으로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200여종에 달하는 필담창화집(筆談唱和集)에 많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한국인들은 이것을 많이 참고하지 않았으나 이제 역주작업이 다 이루어져 본격적으로 접근해 분석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통신사행원들과 일본문사들과의 대화내용이 무엇보다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왕인 기사의 전승과정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통신사행원들의 일본사행록도 보다 세밀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으며 문집 등에서도 새로운 기사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 '마한·백제주민들의 일본열도 이주와 정착'
"고대 한일관계사의 이해 배려와 존중 속에서 이뤄져야"
고대 한일관계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시대의 변화, 국가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장 극적으로 대비되는 두 시각이 바로 '남선경영론'과 '분국설'이다. 남선경영론이란 고대 야마토(大和)조정이 한반도 남부에 군사적으로 진출해 가야는 직접지배,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는 간접지배를 펼치면서 고구려와 한반도 전체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는 주장이다.
이 논리는 스에마츠(末松保和)의 임나일본부설로 구체화된다. 임나일본부설은 일제의 조선지배가 역사적인 연원을 갖고 있다는 황국사관적 인식의 산물로, 일제의 패망 이후에도 일본인들의 한반도를 보는 시각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임나일본부설은 한국인에게도 악영향을 끼쳤다. 식민사학의 극복이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계의 과제로 대두된 이후 왜곡된 고대 한일관계사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임나일본부설을 분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가야사는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설의 극복이란 과제 속에서 가야사는 관계사로서만 위축되는 결과가 생긴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임나일본부설의 극복이란 과제의 해결이 또 다른 역사왜곡을 낳고 있다. 삼한, 삼국의 주민들이 일본열도 곳곳에 정착하여 분국을 건설했다는 김석형의 인식정도가 아니라 일본 고대사를 한국 고대사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거나 고대 한반도의 일방적 우위를 주장하는 국수주의적 견해 역시 역사왜곡의 한 부분인데, 이러한 견해가 학계와 사회 전체에 강력한 힘을 갖게 되는 배경에는 임나일본부설의 극복이란 시대적 과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패전 이후 황국사관적 인식이 점차 사그라지고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연이어 진행되면서 일본 고대사와 한일 관계사에 대한 새로운 정보와 지견이 쏟아져 나오게 됐다. 그 결과 야마토조정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스에마츠 식의 임나관은 일본에서 거의 사라지게 됐다. 임나일본부가 존재했지만 정치군사적인 침략의 거점이 아니라 교역거점이었다거나, 외교사절단이라는 식으로 변형됐다. 이렇듯 임나일본부설은 과거나 현재나 한일 양국 국민의 고대 역사에 대한 이미지를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미래의 바람직한 양국 관계를 방해하는 폐해를 끼치고 있는 셈이다. 고대 한일관계사가 곧 임나일본부는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면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백제와 왜의 관계다.
백제와 왜는 국교를 맺기 이전부터 오랜 기간 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다. 중간 중간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고 상호 경쟁하는 관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고구려, 신라와 장기간에 걸친 무력항쟁을 경험한 것과 비교해보면 매우 이례적이다.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양국의 이해관계가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왜가 고대국가로 발전하는데 필요한 기술과 사상, 국가운영체계는 한반도의 영향, 주로 백제를 통한 것이었다. 백제가 선진기술과 정보를 제공한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는 한반도, 나아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강적 고구려와 힘겨운 싸움을 전개해야 했던 국제정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후방의 군사, 병참기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왜의 효용가치가 높았을 것이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함락된 후 왜군 2만7천명이 백제 부흥전쟁에 참여한 사실, 부흥전쟁에 실패로 돌아간 후 수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열도에 이주 정착한 사실을 볼 때 백제로서는 국가멸망시의 피난처를 마련한다는 고려까지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백제사의 특징은 국제성과 개방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삼국시대에 이미 동아시아에서 한류를 실현할 수 있었고 지식강국, 문화대국의 면모를 보이면서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중심축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고구려와의 군사적 긴장 속에서 백제와 왜는 시종일관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상호 이익의 실현에 노력했다.
미래의 한국과 일본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로 양국 간 이해관계를 일치시켜가면서 상대에 대한 배려, 존중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특히 왕인박사에 대한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승, 문헌에 대한 검토만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남긴 실물자료를 통해 백제와 왜의 교섭의 실상에 접근해야 한다.
■ '마한 분주토기의 발전과 일본열도 파급배경'
"마한 분주토기 왕인박사 도일 역사적 배경 이해에 도움"
마한 분주토기(墳周土器)에 대한 연구는 지난 10여년동안 자세한 형식 분류와 편년이 이뤄지면서 발생 배경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이 주어지고 있다.
마한 분주토기의 발생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열도 세력 간의 장제의례를 통한 상호방문의 결과 기나이(畿內)정권이 전남지역에 백제와의 교섭창구가 될 친(親)기나이정권집단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 당시 기나이정권과 백제의 교류관계와는 구분되는 영산강유역권의 마지막 마한세력과 규슈지역 사이에 별도의 교류가 이뤄지면서 나타난 것으로 본 견해, 일본열도와의 통상적 교류 속에서 호형 분주토기를 수립하는 풍습을 공유한 결과라는 견해,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 백제와 왜가 교섭을 시작한 이후 백제의 요청에 의해 왜 세력이 진출하면서 왜의 영향을 받은 호형 분주토기가 나타난 것으로 본 견해 등이 제기된 바 있다.
이 같은 견해들은 대부분 마한의 호형 분주토기가 일본의 호형하니와(壺形埴輪)와 상통하면서 3세기에 등장하는 일본의 호형하니와 보다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것밖에 확인된 바 없었던 상황에서 일본 호형하니와가 그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제기된 견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산만권의 원통형 특수토기를 비롯해 최근 조사된 새로운 자료들을 바탕으로 호형 분주토기의 발생과정을 재검토하고 분주토기들이 확산되는 배경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분주토기는 계통에 따라 호형(壺形), 통A형(筒A形), 통B형으로 구분된다.
둘째, 호형 분주토기는 아산만권의 분정제사에서 술을 공헌하는데 사용되었던 원통형 특수토기가 3세기 말∼4세기 초 금강 하류지역 마한제국의 수장묘에서 분구 장엄용으로 변용된 다음, 영산강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6세기 중엽경 현지에서 단절되면서 부분적으로 일본으로 파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통A형 분주토기는 5세기 중엽경 영산강유역권 마한제국의 수장묘에서 당시 일본에서 성행했던 원통형과 호통형하니와 세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현지 기대의 기형과 도립, 분할 제작기법이 가미되어 독자적인 유형으로 성립된 다음, 주변으로 확산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6세기 중엽경 현지에서는 단절되면서 부분적으로 일본으로 파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통B형은 5세기 말∼6세기 초 영산강유역권의 일본식 장고분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서, 장고분 뿐만 아니라 분주토기, 분주목기 등의 분주물까지 일본에서 기원하되 그 제작에 있어서는 현지 공인들이 참여했으며, 6세기 중엽경 장고분과 함께 완전히 소멸됐다.
다섯째, 호형과 통A형은 호남지역, 특히 영산강유역권을 중심으로 마한제국의 수장층 사이에서 자신들의 무덤에 분주토기를 장식하는 것이 신분에 걸 맞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성행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통B형은 일본 망명세력이 일본 전통에 따라 재현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모두 6세기 중엽경 백제의 병합에 따른 규제로 인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마한 분주토기와 관련된 이상과 같은 내용들은 시기적으로 3세기 후반∼6세기 후반에 해당하며 백제의 마한지역 병합에 소요되었던 기간과 일치한다. 이는 백제에 병합된 마한지역 주민의 일본열도 이주가 오랜 기간에 걸쳐 파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왕인박사의 도일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일본 율령국가의 형성과 왕인의 후예씨족'
"율령체제 확립 통한 국가개조에 왕인의 후예씨족 맹활약"
고대의 일본 열도사회는 최종적인 단계로서 '율령체제'의 시대를 경험한다.
율령체제는 삼국통일전쟁이라는 동아시아의 동란에 대응하기 위해 7세기 후반에 형성되어 10세기 중반에 해체되기 까지 300년 정도의 명맥을 유지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다.
율령체제를 지탱하는 것은 관료제와 공지공민제다. 지배계층은 관료로서 조직화되어 국가기구를 독점적으로 운영했고, 피지배계층은 공민신분이 되어 지역구분에 바탕을 둔 대정(호적)에 의해 국가의 관리대상이 된다.
공민은 이전 호족들의 사유민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국가가 관리하는 구분전(공지)을 할당받아 조용조로 대표되는 조세를 공납하고, 징발되어 군사·경찰력으로 편성됐다. 이러한 여러 제도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하나의 시스템으로 기능하는 것이 바로 율령체제다.
고대 일본이 율령체제를 확립하게 된 배경은 대외정세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640년대 당의 압력을 받은 삼국은 권력집중을 꾀하고, 이에 연동해 왜(야마토정권)도 '을사의 변'과 '대화개신(大化改新)'을 통해 권력집중에 성공한다.
그러나 660년 나당연합권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고, 663년 백제를 부흥하기 위해 군사개입을 행한 왜는 백강전투에서 대패한다. 더욱이 당은 668년 고구려를 멸하고, 이듬해에는 왜의 정벌을 계획한다. 결국 당의 왜 정벌은 중단되었지만 왜는 당과 신라가 언제 침입해올지 모르는 위기감을 느끼면서 이에 대응해 체제정비에 힘쓰게 된다. 즉 백강전투 패배이후 왜는 임전체제를 유지하면서 일본 최초의 호적인 경오년적(庚午年籍)과 최초의 율령이라 할 수 있는 근강령(近江令)을 시행해 강압적인 국가체제를 구축했다.
천지천황 사후 왜의 임전체제는 천지의 동생 천무에게 계승된다. 그러나 천무10년(681년)을 기점으로 왜의 임전체제는 평화체제로 전환된다. 이 전환의 원인은 당의 팽창정책의 좌절과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에서 찾을 수 있다. 실질적으로 7세기 내내 동아시아를 감쌌던 전운은 사라졌지만, 왜 정부는 평화시대에 맞는 국가체제로 전환하지 않고, 임전체제의 근간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제도와 의례면에서 정비를 했다. 따라서 율령체제는 이러한 임전체제에 근간을 둔 평화체제라는 형태로 확립됐다.
이처럼 전면에 걸친 국가개조작업은 율령체제의 확립이라는 목표 아래 단시간에 집중적으로 이뤄지는데, 여기에 선진적인 문화를 경험한 도래인들의 힘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먼저 왕인의 후예씨족은 율령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호적제도의 기원을 만들었다. 대화개신 이전 시대에는 왕인의 후예들과 관련되어 한정적으로 이용되었던 조적(造籍)에 대해 기나이(畿內)에 거점을 둔 야마토정권은 전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유효한 방식으로서 이를 채용했다.
뿐만 아니라 율령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왕인의 후예들이 활약했다. 또 율령체제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왕인의 후예인 교키(行基)와 교키집단은 국가적 위기극복에 일일을 담당했다. 이로써 고대 일본은 율령체제의 최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 '일본인의 형성과 도래인 - 일본열도는 도래인 열도'
"일본 최초 고대국가 형성에 왕인 등 도래인이 중심 역할"
현대 일본인의 뿌리에 대해 일본의 학자들 사이에 많은 연구가 이뤄져왔고, 따라서 의견도 분분하다. 이를 크게 나누면 인종교대설, 혼혈설, 이행설, 도래설로 대별할 수 있는데 이 가운데 도래설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하니하라 교수의 '이중구조 모델설'이 사실(史實)에 제일 부합된다. 이는 현대 일본인의 조상이 직접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거나 그들과 혼인해 피가 섞인 도래인계(북아시아계)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으나, 그 이전 구석기 죠몽시대부터 살아오던 재래인계(남아시아계)도 북해도 및 동북지방 일부와 오끼나와 등에 남아 있어 일본인의 뿌리는 이중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한반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왜로 건너간 것은 대체로 다음 네 가지 이유다. 첫째, 지구의 한랭화에 따라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어렵게 되자 보다 온화한 새 천지를 찾아 떠난, 이른바 프런티어 개척자들, 둘째, 대륙과 한반도에서의 정치정세의 변동에 따라 전란을 피해 안전지역에로의 이주, 셋째, 왕인박사나 그와 동행한 각종 기술자들과 같은 왜의 초청, 그리고 마지막으로 7세기 후반 백제 및 고구려의 멸망에 따른 대대적인 정치적 망명 등이다.
초기의 이주, 즉 죠몽만기에서 야요이시대에 이뤄진 이주는 첫째 및 둘째 이유에 의한 것이었다면 후기의 이주, 즉 고분시대∼초기 역사시대에 이뤄진 이주는 셋째 및 넷째 이유에 의한 것이다. 제1단계는 야요이 전기(BC200년 전후)로부터 고분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의 기간으로, 이 때 한반도 남부로부터 도작(稻作)문화가 도래인들에 의해 전수된다. 제2단계는 4∼5세기 응신·인덕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고대국가 형성기로, 이 때 일본에 문자가 전수되고 각종 산업기술이 이전된다. 제3단계는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으로 새로운 도래인들이 신기술을 갖고 건너와 국가의 기틀이 어느 정도 정비되는 시기다. 제4단계는 천지천황를 중심으로 하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에 이르는 기간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망명객들이 대대적으로 건너와 율령국가를 완성시킨다.
특히 일본은 4세기말에서 5세기 고분시대에 이르면 단순한 소국의 연맹체가 아닌 대국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응신·인덕이 형성한 가와찌정권(河內政權)으로, 이 정권을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로 보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바로 이 고대국가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 문화와 각종 산업기술을 몸에 지니고 지속적으로 건너간 도래인이요, 그 중심에 왕인박사가 있었다.
문자의 사용은 문명의 기초가 된다. 왕인은 그저 논어와 천자문을 전수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활용해 일본의 왕자를 비롯한 상류층을 교화시킴과 동시에 일본문자 창안의 단서를 만들었다는데 그 공이 있었던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요컨대 일본열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왜(倭)'의 단계를 넘어 '일본(日本)'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까지에는 도래인의 힘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우에다(上田) 교수와 함께 도래인 연구에 큰 기여를 한 동북대학 세끼(關晃) 교수의 이야기처럼 '일본의 선조들이 귀화인을 동화시킨 것이 아니라 귀화인이 일본의 선조'이다.
결론적으로 현대 일본인은 북해도의 아이니누에서 오끼나와 및 유규인처럼 죠몽인의 특질을 많이 지니고 있는 재래계(남아시아계)와 야요이시대 이래 대량으로 건너가 혼혈을 통해 그들을 소진화시킨 도래계(북아시아계)와의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으나, 후자가 수적으로는 물론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 제 측면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세끼 교수의 말을 빌리면 북아시아계 도래인들이야말로 '일본인'이요, 그들이 세운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성씨록」에 등재된 전체 제번의 비율은 약 30%인데 비해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가 형성된 가와찌국에서는 70%에 달하고 있는 사실을 감안하면 현대 일본인의 뿌리는 한반도요, '일본'이라는 새 나라를 세운 주역 또한 한국계 도래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머릿속에 담고 오늘의 한일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언제까지고 근친질시(近親嫉視)의 소아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을 것이 아니라 일본의 국가 형성기에 수많은 도래인들이 오직 상생과 호혜를 생각하며 흘렸을 고한(膏汗)과 인고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왕인박사와 도래인 문제를 연구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