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홍의 초선일지>

4·29 재보선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5년 05월 15일(금) 10:55
설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아무렴 한 두 군데는 건질 수 있겠거니, 했다. 지더라도 네 군데 모두 이렇게 큰 격차(가장 선전한 우리 후보가 9.7% 차로 패배했다니…)로 무너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민심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언론에서 새누리당 보고 "대형 악재(성완종)에도 불구하고 압승했다"고 평가하고 있으니, 우리는 '대형 호재'에도 불구하고 전패한 셈이 되었다.
선거는 비교우위의 게임이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상대가 더 잘하면 지는 거고, 내가 엉망이어도 상대가 더 엉망이면 이기는 것이 선거다. 절대 우위일 필요가 없는 거고, 절대 우위자연(然)해서는 더욱 안 되는 것이다.
새누리당과 무소속의 승자들이 우리보다 나은 게 뭐였을까, 우리가 그들보다 못한 게 뭐였을까, 에 대해 진솔한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한다. 자기 반성은 남의 탓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탓을 하는 거다.(2015년4월30일)
전혀 대단할 게 없는 일, 전남 도당의 장부 공개
(다음은 이번 주 주간조선 2354호(2015년4월27일)에 실린 제 글입니다. 편집 필요에 따라 제목과 내용이 좀 바뀌었습니다. '이제 부패의 고리를 끊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커버스토리로 나온 글입니다. 원래의 제 글을 여기 싣습니다. 4·29 재보선 참패 교훈의 실마리일 수 있다면 더 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일본 당대 최고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기 소설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작업"이라고 쓴 걸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정치란 뭘까? 어떤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속인다는 것, 그 허업(虛業)의 의미를 묻는 작업이 정치인 건 아닐까?
'성완종 이완구 파동'을 겪으면서 우리들은 정치 세계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몸을 떨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하는, 아아, 저렇게까지 인간들이 비속해질 수도 있는 거였구나…하는, 허무함과 쓸쓸함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었다.
누가 정치를 '희망을 과학화하는 예술'이라 했던가? 여의도 정치에 입문해서 늘 스스로에게 묻곤 하는 질문이 있다. 정녕 박수 받으며 정치할 순 없는 것인가?
어찌된 영문인지, 정치권은 허구한 날 싸우고 또 싸운다. 그리고 속이고 또 속인다. 특히 우리의 여의도는 유난히 더 그런다. 지금이야말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될 '골든 타임'이라며 접점 없는 모순적 대립으로 황금같은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있다. 정말이지, 부끄럽고 부끄럽다. 조선 시대 때나 대한민국 시대 때나 이 땅의 조정과 정치판은 허구한 날 찍고 속고 속이고 넘어지고 부딪히며 결사항전하는 이골과 저력이 늘 세계적이었다.
최근 들어 '한국 선진국 불가론'을 언급하는 이들을 꽤 만났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진입에 결정적 한계가 있어서 종당 선진국이 되지 못하고 말거라는 비관론들이다. 우리 동시대 한국인들의 문화와 가치규범과 질서의식과 정치적 조정능력과 사회적 연대감과 공동체적 신뢰 등과 같은 '사회 자본(social capital)'이 너무 얕고, 가까운 장래에 그것이 눈부시게 개선될 가망도 거의 없기 때문에, 어쩌면 그와 같은 가치와 의식이 더 악화될 수도 있고, 가장 중요하기로는, 기존 선진국들과의 그 격차는 갈수록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한국은 끝내 선진국이 되지 못할 거라는 요지다. 경제 자본 성장이 사회 자본의 낙후로 한계에 봉착할 거라는 얘기다. 요즈음 특히 여의도 정치의 고질적 한계 때문에 우리들의 조국은 선진국의 문턱에서 늘 분루를 삼키고 말거라는 우울한 결정론들을 더 자주 만났다.
두 말할 것도 없는 거지만, 유명한 케인즈나 폴 크루그먼도 빈번히 강조하고 있거니와, 정치와 경제는 맞물려 돌아가는 '정치경제학'이다. 세상만사가 다 그러하겠지만, 특히 정치와 경제의 상호작용성은 압도적이다. 정치는 경제에 영향을, 경제는 정치에 영향을 신속히 그리고 깊이 미친다. 정치경제(학)는 사회 전체의 판도와 운명을 쥐었다 폈다 한다. '여의도의 낙후'가 한국(경제)의 비교우위상의 낙후를 결과하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비판은 결코 잘못되지도 과장되지도 않았다.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자연 과학과 달리, 사회 학문(사회 과학)의 대상인 정치(학)에는 딱 부러진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이상 이하도 아닌 딱 그것이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위대한 지도자냐 아니냐, 하는 물음에 대한 정답은 유일 정답이 아니라 다수 정답으로 존재한다. 위대하다는 이, 그렇지 않다는 이, 그 중간쯤이라는 이, 잘 모르겠다는 이 등등, 모두가 그 나름대로 정답일 수 있고, 그 어느 대답 하나도 오답이라고 확정할 수 없는 게 정치와 정치학의 세계다.
자, 그렇기 때문에 정치는 죽기 살기로 싸워서 마침내 끝장을 볼 그런 속성의 세계가 전혀 아니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의 주장과 입장에도 정당함이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정치학과 정치인들에게 제일의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당신의 생각을 혐오하지만, 당신의 그 자유는 목숨으로 지켜주겠다" 했던 볼테르(1770년)의 세계관 같은 것이다. 정치는 기만의 사술이나 부정의 변설이 아닌, 설득과 합의의 공적 담론이기 때문에 독선·독존일 수 없는, 타협·공존일 수 밖에 없는 세계다.
정치(학)의 세계에서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다 옳고, 모든 입장이 다 허용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모든 주장이 다 고만고만한 타당성과 진리를 갖고 있다면 정치의 세상은 늘 뒤죽박죽인 난장판의 세계에 지나지 않게 될 거다. 자연(완력)의 '법'만이 존재할 뿐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 떼법이 난무하고 지역과 집단의 이기주의가 판치는 야단법석의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럴 순 없기 때문에 우리가 국가와 헌법과 법률에 동의했던 거다. 이판저판 오로지 개판인 듯한 이 나라 정치에도 기준과 원칙이 있다는 얘기다.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다. (헌)법과 국민이다. 법치야말로 이 나라 대한민국의 존재 근거다. 그러나 모든 일, 모든 사안에 대해서 (헌)법이 일일이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치가 존재하고 여의도 국회가 기능하는 것이다. 이 정치는 민의를 대변한다. 국회를 '민의의 전당'이라 부르는 이유다. 법치와 똑같은 무게로 중요한 것이 국민의 다스림(民治)이다.(그 실에 있어서, 법치와 민치는 같은 동전의 다른 면이며, 동어(同語) 반복처럼 그게 그거다.)
정치에 기준이 없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정치의 기준은 국민이다. 한국 정치의 유일 척도가 한국 국민들일 수 밖에 없다. 다수 국민들의 뜻이 결국 민심이다. 민심이 곧 천심이고, 하늘의 기준이다. 정치의 기준이 민심이다.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표현이 적절할는지 모르겠지만, 종교의 세계에서 그 신이 정답이라면, 정치 세계에서의 정답은 그 국민이다. 국민은 비록 틀렸을지라도 옳다. 때때로 국민들이 막상막하로 분열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는 그 국민들이 모두 정답(들)이다.(물론, '필요악' 같은 선거제도는 승자 독식을 명하지만, 정치의 세계에서 양시(兩是)는 허다하다. 그래서도 정치적 선악 이분법은 위험하고 해롭다.) 정치의 유일 기준인 국민의 뜻을 과학적으로 확인하는 길은 이미 확립되어 있다. 특히 빅 데이터의 활용을 통해 다양한 국민 기준을 한결 더 확실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 과학기술의 쾌거가 가져다준 의문의 여지없는 사실상 직접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거다. 속이고 싸울 일이 없거나 줄어들었다는 말이다 .
이완구 총리가 국민 여론(민심)이라는 기준에 숨죽여 부합했더라면 오늘 저처럼 초라한 사면초가의 신세가 되어 있진 않았을 거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 여론을 좇아 겸허하게 이 파동을 대면하고 순리대로 수습해갔더라면 이 싸늘한 국민 여론 앞에 서 있는 자기 가치의 수인(囚人)처럼 왜소해보이진 않을 거다. 야당 의원으로서 하는 얘기이지만, 우리 당도 성완종?이완구 파동을 국가적 악재로서 인식하고 낙담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던 빨리 그리고 철저히 수습하지 않으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좋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대처하는 것이 국민 기준에 합당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진심이고 필로소피이어야, 나아가 대선 전략이어야, 마침내 집권도 이룰 수 있게 되는 거라고 믿는다. 국민 기준 없인 국민 감동 없고, 국민(유권자) 감동 없인 대선 승리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두어 달 새정치연합 전남도당 위원장으로서 도당의 당비 수입과 사용 내역 일체를 매월 낱낱이 공개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언론과 여러분들의 비교적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어떻게 그런 용기있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느냐는,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그런 극찬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기분은 좋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뭐 그리 대단하고 특별한 일인지 정말 잘 모르겠다.
솔직한 얘기인데, 매월 1억원 안팎의 도당 경비 공개 결정은 전혀 어려운 일도, 아예 심사숙고할 일도 아니었다. 전남도의 당원들이 낸 돈으로 당 살림을 하고 있으니 살림살이를 그 당원들에게 일일이 보고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뭐 어려울 게 있으며, 대단할 일이 뭐겠는가?
지난 1월18일 전남도당 위원장 선거가 있었다. 도당 재정 운용 내역 전체를 매월 투명하게 공개하겠다고 공약했다. 당비를 낸 당원들에게 그 돈을 어떻게 어떻게 사용했다고 알려드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물었다. 당선되면 즉각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선되었고, 약속을 지켰다. 그 뿐이다.
지금까지 그 어떤 여야 정당도, 그 어떤 시·도당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러니 대단하다는 거다. 나는 그게 이상했다. 이처럼 간단한 일을 그동안 왜 안 하고 못 해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 감출 게 뭐 있으며, 구릴 게 뭐 있단 말이냐.
스스로 단 한 가지만 결심하면 되는 일이었다. 위원장인 내 자신의 사적 용도로는 1원 한 장 가져다 쓰지 않겠다는 결심과 각오, 그거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 입장을 밝혔고, 지금껏 그 입장을 지키고 있다. 도당 각종 회의의 의장 또는 위원장이기 때문에 당연히 회의 수당을 10만원씩 받게 되어 있지만, 도당 사무실이 있는 목포시로 오가는 경우 자동차 기름 값을 청구할 수도 있겠지만, 도당 위원장으로서 추진해야 할 업무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월 100만원이라도 업무추진비를 가져다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 모든 걸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다짐했다. 이미 국회의원으로서 상당한 월급을 받고 있기 때문에 따로 도당 경비를 가져다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거니와, 도당 위원장을 철저한 봉사직이라 믿기 때문에 내 시간과 내 몸으로 그리고 때때로 내 돈으로 헌신하고 봉사하겠다는 가벼운 생각이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우리 정치가 워낙 고비용 구조이기 때문에, 위원장으로서 도당 당비를 정당한 명목으로 가져다 쓰고 싶은 충동, 정당한 용도로 가져다 쓰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지 않느냐는 자기 유혹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내 결심을 마친 뒤, 해야 할 다음 일은 도당의 당직자들에게 간곡하게 그리고 엄하게 당비의 투명 사용을 지시하는 일이었다. "우리 당을 사랑하기 때문에 매월 천원씩 2천원씩 당비를 내주시는 당원들의 마음을 생각할 때 어떻게 우리가 단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쓸 수 있겠느냐, 자기 돈처럼 아끼고 또 아껴서 가장 모범적인 도당 운영을 솔선수범해주기 바란다"는 취지의 주문을 했다. 업무 수행상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 지출을 억제하는 건 아니지만, 지출을 절감해야 한다는 것, 문제가 있고 없고는 본인들 자신이 잘 알 것이기 때문에 각자 책임 하에 잘 사용할 것, 문제가 발생하면 일벌백계로 문책할 것임을 경고했다.
지금까지 매월 내는 당보를 3회 발행했고, 거기에 월별 도당 경비 지출입 내역을 낱낱이 공개해오고 있다. 전남도당의 이 같은 시도를 비교적 새롭고 신선하게 평가하는 것은 그것이 국민 기준에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여의도 정치가 투명해지기를 바랄까, 아니면 불투명해지기를 바랄까? 두 말할 것도 없이, 국민 여론은 한국 정치의 투명화를 절대 열망하고 있다. 그러면 그 길로 가는 거다. 이러저러한 구구한 특수함을 들어 어렵다느니 시기상조라느니 하는 변명은 그저 구차하다.
정치의 기준, 그것도 유일 기준인 국민은 한국 정치가 국민의 뜻대로 움직이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 역시 증명이 필요 없는 ‘정치학적 공리’다. 결국 정치적 성패는 누가 더 잘 싸우느냐에 있지 않고, 누가 더 잘 속이느냐에 있지도 않고, 어느 편이 더 국민의 뜻을 따르려 했느냐에 달려 있다. 링컨의 얘기대로, 역사(국민)가 누구 편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역사(국민)의 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거다.
집권을 원하는가? 선거 승리를 원하는가? 국민의 박수를 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국민의 마음 문을 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가, 정치권이, 국민 기준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직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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