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 줍던 날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5년 06월 12일(금) 13:47
고향에 다녀왔다. 월출산이 우뚝한 전남 영암. 읍내에서도 2십리쯤 더 들어가는 시골. 고향마을 언덕에 섰다. 아스라한 들판이 눈앞에 펼쳐진다. 밀물 때면 푸르디푸른 강물이 끝 없이 출렁거리던 곳. 산천은 저렇게 바뀌었고 사람도 옛사람이 아니다.
저 넓은 벌판에 생선이 팔딱거리던 시절. 우리 마을은 농사를 지으면서 갯것을 잡아 살아가는 반농 반어촌이었다. 열일곱 풋내기 농사꾼이었던 나는 친구들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개펄에 가곤 했다. '개매기'를 찾아 이삭을 주으러 가기도 했다.
고기는 물 따라 움직였다. 밀물에 뻘등을 타고 올라왔다가 썰물이면 물 따라 내려갔다. 어민들은 썰물에 나가고 밀물에 들어왔다. '개매기'는 여러 척의 어선이 합동으로 개펄을 막아 고기를 잡는 방법이었다. 네댓 척, 때로는 십여 척이 함께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부들은 온몸으로 노를 저어 강물을 헤쳐 나갔다. 강 가운데 각자의 배를 세우고 썰물에 뻘등이 드러나기를 기다렸다. 뻘등은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면서 개옹을 경계로 나뉘어진다. 아스라이 넓은 그 블락을 여러 배가 구역을 정해 몽땅 그물로 둘러 싸야한다. 어부들은 개옹을 따라 배에 실린 그물을 차근차근 내려가며, 드문드문 장대를 세워가면서 그물 한쪽을 뻘 바닥에 박아두기 시작한다. 작업을 마치면 물이 들기를 기다린다. 물은 뻘등 아래로부터 차근차근 차오른다. 시시각각 불어나 마침내 뻘등을 덮고 온 강이 물결로 출렁이게 된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되는 순간, 강물은 잠잠해져서 미동도 하지 않는다. 어부들은 이 순간을 '참'이라고 부른다. '참'이 오면 어부들은 둘러친 그물 한쪽을 끄집어 올려, 세워놓았던 장대를 따라가면서 묶기 시작한다. 이제 고기는 모두 그물에 갖혔다. 다시 썰물이 오면 고기들은 물 따라 내려가다가, 빠져나가는 길목에 설치해 놓은 긴 통발 속에 잡히게된다. 그런데 고기들이 모두 얌전하게 통발로 들어가 주면 좋으련만, 기대와 달리 그물 주변 여기저기에 남아있게 마련이다. 그 고기를 주워오는 일이 바로 이삭줍기다.
어느 여름날, 마을에서 멀지 않는 곳에 '개매기'를 막았다. 난생 처음 이웃집 형을 따라 깜깜한 밤에 이삭을 주으러 갔다. 강가에는 마을 사람들이 벌써 여럿 와 있었다. 이웃 마을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긴 보선을 신었다. 개펄에 널려있는 굴 껍질이나 날카로운 것들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갯보선을 신어야 했다. 보선은 무명베를 두세 겹 겹쳐 바늘로 누벼 만든 다음, 생감을 짓이겨 감물을 들였다. 그렇게 만든 갯보선은 갑옷처럼 빳빳하고 억세어 발을 보호하는데 그만이었다. 선조들의 지혜가 놀라웠다.
대로 만든 바구니인 대레끼를 둘러매고 글캥이를 들고 개펄에 들어갔다. 뻘은 무르고 깊어 무릎 위까지 빠졌다. 한 발자국 옮기는 것도 힘이 들었다. 현장이 가까워지자 두런거리는 뱃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고 어둠 속에서 빤닥이는 담뱃불이 보였다.
그물을 들치고 넘어가 글캥이를 뻘 속에 넣어 휘젓기 시작한다. 옆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어둡다. 한 발작씩 옮겨가며 글캥이로 뻘을 휘저으면 포크모양의 쬬쪽한 끝에 장어가 걸려나왔다. 툭, 고기가 걸리면 조심스럽게 고기를 뻘 속에서 빼내어 등에 맨 대레끼에 옮겨 담는다. 옮겨 담는 도중에 고기를 놓쳐버리기도 한다. 뻘 위에 퍼덕이는 자잘한 고기도 주워 담는다. 배가 고프면, 작은 모챙이를 골라 물에 흔들어 와작와작 씹어 먹기도 한다. 원시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여기 저기 사람들이 부지런히 고기를 주워 담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큰 소리가 들린다. "야, 니기미 x같은 xx들아, 내x박을 놈들아, 그물 찢은xx 빨리 나와!" 누군가 글캥이질을 하다가 그물을 찢어놓은 모양이다. 처음 듣는 욕바가지가 몹시 설다. 입에 담기도 험한 무작스런 욕설을 몇 번이나 되풀이한다. 이삭 줍는 사람이 많다보니 뱃사람들의 심사를 건드는 일도 많은 모양이다.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면서 하던 일을 계속 한다. 추수 끝난 들판에 남은 곡식을 부지런한 사람이 주워가듯, 바다 고기를 잡아가는 어부들이 흘린 이삭이니 주워가는 사람을 탓할 순 없을 터. 그래서 당연한 일처럼 '개매기'에 이삭꾼들이 몰려오기 마련인 모양이었다.
뿌옇게 동이 트자 밀물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차오르는 밀물에 밀리어 왔던 길을 다시 뻘에 빠지며 갯가로 나왔다. 웅덩이 물에 몸을 씻었다. 대레끼에 고기가 제법 그득했다.
갯가 선창에는 아주머니들이 어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뱃사람의 가족이다. 생선을 시장에 내다 팔아야 돈이 된다. 이 먼 깡촌까지 고기를 사러오는 사람은 없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금방이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어머니들은 무거운 생선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읍내까지 2십리 길을 달리다시피 걸었다. 생선을 지게에 지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모은 비린내 나는 돈이 아이들의 공책과 연필이 되고 납부금이 되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오랜 만에 찾아왔는데 달라진 고향 풍경이 아무래도 낯설고 아쉽다. 저렇게 강을 막아 논을 만든 일이 잘한 일이었는가 하는 논쟁은 이제 부질없다. 물고기가 펄떡거리던 개펄 위에, 파랗게 벼가 자라고 있다. 먼 훗날 이 언덕에 선 사람들이 저곳이 강물이 찰랑거리던 곳이었다고 기억이나 해줄까.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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