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암군홍보대사 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2>북한 방문 이틀 째 이야기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5년 12월 11일(금) 15:07
"야, 곱다고 기러시는데 사진 찍게 하라우" 시어머니 말씀 지엄하다
청사건물이 어느 쪽인지 보이지도 않는다. 자동차를 타고 청사로 이동하는 모양이다. 무슨 일일까. 셔틀 버스를 타고 5분 정도 갔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활주로 공사를 하고 있다. 왼쪽도 오른 쪽도 노동자들이 각자 소속된 깃발 아래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모래를 나르는 사람들, 날라 온 모래를 고르는 사람, 시멘트를 등에 지고 가는 사람. 물통을 양 어깨에 메고 오는 모습…장관이다. 바람이 불때마다 흙먼지가 날린다.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조선 속도" "결사 관철" "전투명령은 내렸다 폭풍치자 화약에 불이 붙은 것처럼" 등, 여러 가지 구호가 적힌 배너가 붉은 깃발과 함께 펄럭인다. 도로 포장은 포크레인이나 롤러 같은 특수 장비를 이용하여 매끈하게 만들어 내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저 넓디넓은 활주로를 저렇게 사람의 힘으로 건설하다니. 이곳이 로켓을 쏘아올리고 원자탄을 실험한다는 그 나라 맞아?,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공항 청사에 도착하기도 전에 특별한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순안공항 청사에 도착했다. 9년 전에 왔던 그 건물이다. 청사 옆에 새 건물을 짓고 있다. 입국장 저편은 마중 나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공항 구내매점 옆에 서서 짐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전시되어 있는 수예품이 예쁘다. 북한의 수예작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작은 수예품 한 점에 30위엔, 5달러란다.
매점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활주로 공사는 2년 전쯤 시작되었는데 금년 안에 끝마칠 예정이란다. 멀리 베너에 쓰인 구호가 “당에서 정해준 시간에…” 뒤쪽 글씨는 희미해서 보이지가 않는다. 끝마친다, 정도가 아닐까 싶다. 지금 짓고 있는 청사가 완성되면 훨씬 넓고 편리할 것이라고 아주머니가 말한다.
평양에 도착하다
입국수속을 끝내고 나니 4시30분. 밖에 나오니 두 분이 맞아준다. 해동 영접국 김재천 참사, 그리고 머무는 동안 나를 안내해줄 김광현 참사, 라고 했다.
순안 비행장에서 평양에 들어가는 길. 날씨가 약간 흐리지만 9년 전과 달리 나무가 많아 보인다. 호텔에 도착하니 어둑하다. 해방산 호텔이다. 객실 83개인 3층 건물이다. 오른편에 로동신문 사옥이 보인다. 멀지 않는 곳에 대동강이 있다고 한다.
가방을 방에 놓아두고 일정을 토론하기 위해 모이기로 했다. 내 방 바로 옆방이 안내원 숙소다. 3층 미팅룸으로 올라가는데 계단에 전등이 들어오지 않아 깜깜하다.
두 분 참사와 함께 우선 맥주를 한 잔씩 나누었다. 대동강 맥주다. 맛이 좋다. 김재천 참사가 남쪽 출신 작가로서 3주간 이상 북쪽에 머물게 된 경우는 정선생이 처음이라고 말문을 연다. 이번에 안내를 맡은 김광현 참사는 김일성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으며, 미국에서 온 작가를 위해 특별히 문학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 선정했다고 소개를 한다.
마련한 일정을 살펴보니 미국에서 받아본 것과 큰 차이는 없지만, 소월의 고향 영변 약산과 통일교 문선명 선생의 고향 방문 등이 빠져 있다. 그리고 2005년 방문 때 갔었던 진남포가 방문지에 들어있다. 나는 이번 방문이 북녘 땅을 유람하러 온 것이 아니라 북한 동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왔다고, 그리고 돌아가면 느낀 그대로 전할 것이라고 차분히 설명했다. 실상을 제대로 아는 것이 남북이 서로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통일의 초석이 되지 않겠냐며, 그 일을 하는데 보탬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조용히 듣던 두 분이 방문 목적에 부합하도록 일정을 조정해보겠다고 화답을 한다.
또 한 가지, 사진에 관해서 의견을 말했다. 사진은 마음껏 찍겠으니, 혹 불편한 생각이 들면 떠나기 전에 필름을 검토해 보면 어떻겠는가. 하고 제안했다. 그 문제도 이견이 없었다.
간단한 저녁식사 후 방으로 들어와 티비를 켰다. 영어 방송이 나오는데 홍콩사태 등 세계 정세를 방영하고 있다. 알 자지라(Al Jazeera)방송이다. 아침마다 일찍 산책을 나가기로 안내원과 약속했다.
대동강 새벽 풍경
닭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5시 좀 넘은 시간이다. 평양 시내에 왠 닭울음소리? 잠결에 잘못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양 첫 밤이라 너무 긴장했을까.
6시15분 기상. 아직 어둑어둑 하다. 안내원이 벌써 몸을 풀고 있다. 앞으로 3주간 나를 안내해 줄 김광현 참사를 그냥 편하게 ‘김 선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대동강 산책을 나간다. 지하도를 내려가 큰 길을 건넌다. 지하도에 전등은 달려있는데 불이 들어오지 않아 깜깜하다. 일찍 출근하거나 산책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길에 보인다.
강물이 잔잔하다. 강변 따라 해묵은 버드나무가 늘어서있다. 평양을 ‘유경柳京’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겠다. 오른쪽으로 철교가 보이고 강 건너에 주체탑이 높이 서있다. 강가에서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다. 언덕에 <3,500톤급 종합봉사선 ‘무지개’호 전경도>가 그려져 있다. 건조 중인 배가 지척에 보인다. 배는 조선소에서만 만드는 것으로 알았는데 저런 식으로도 건조하는가 보다. 군인 한 명이 배 쪽으로 사람이 다니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다. <사진1>
왼쪽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이른 새벽이라선지 사람이 많지 않다. 강 위에 각종 놀이 배가 떠있다. 작은 보트다. 강물에 무슨 구조물이 삐죽삐죽 나와 있어서 무엇인가 물었더니 조명등이란다. 이곳이 광장 앞이라 저녁 행사가 있을 때 여기서 조명을 비춘다고 한다. TV에서 불꽃놀이를 보여주던 바로 그곳이다.
2층으로 된 유람선이 정박해 있다. 꽤 큰 배다. 맨 위에 ‘내나라 제일로 좋아’라는 글이 큰 글씨로 붙어있다. 건너편 언덕에 ‘식당배 <대동강호>안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평양랭면, 회국수를 비롯한 주식류, 여러 가지 료리들, 대동강맥주와 청량음료를 봉사한다고 써 있다. 봉사시간은 12시~15시, 17시30분~21시. 일요일은 휴식일이다. ‘주의사항1,식당배안에서는 절대로 담배를 피울 수 없습니다. 2.술에 취한 사람, 부피가 큰 짐을 가진 손님, 애완용 동물은 배에 오를 수 없습니다. 3.11미만의 어린이는 보호자 없이 배에 오를 수 없습니다’고 적혀있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주머니 몇 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오고 있다.
대동문 앞에 이르렀다. 아침 해가 붉게 떠오른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대동강이 한 눈에 보인다. 강 건너편에 주체탑이 보인다. 서울에 남산, 광주는 무등산, 부산은 해운대가 떠오르듯 평양 하면 생각나는 것이 대동강과 을밀대다. 유구한 평양의 역사를 품에 안고 대동강은 저렇게 말없이 흐른다.
大同門은 대동강을 마주하여 서 있는데, 예전에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이곳을 통해야만 평양에 입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동문 정면에 현판을 세 개나 써 붙여 놓았다. 맨 밑은 무지개문 머릿돌에 음각으로 새겼고, 문루 1층과 2층에도 걸려있다. 1층 현판은 단군 이래 최고의 명필이었다는 봉래 양사언(1517-84)이 초서로 쓴 현판이고, 2층은 평안감사 박엽(1570-1623)이 쓴 것이라 한다. <사진2>
대동문 바로 옆에 연광정이 있다. 연광정은 보수중이다. 지붕 서까래를 갈고 있다. 둘레를 철망으로 막아놓았다.
대동문 뒤편으로 최신형 고층 아파트들이 서있다. 창전거리라고 한다. 9년 전 왔을 때는 없었던 건물들이다.
언제 왔는지 초등학교 2,3학년 정도의 아이들 대여섯 명이 빗자루를 들고 대동문 주변 청소를 하고 있다. 이름이 뭐냐고 한 아이에게 말을 건네자, 대답은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며 논다. 아이들은 저처럼 아이다워야 한다. 아이들이 때로는 어른 말에 어깃장을 놓을 줄 알아야 한다. 고분고분 하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소 판돈을 훔쳐 달아났던 정주영. 그가 아버지 말씀을 따라 그대로 집에 눌러 앉았다면 천하의 정주영이 될 수 있었겠는가.
저만치에서 웃통을 벗고 뛰는 노인도 보인다. 9년 전 대동강변에서 푸에불로호를 보았던 기억이 떠올라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새로 지은 전승기념관으로 옮겼다고 한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성당을 방문하도록 일정을 잡아놓았다고 한다. 미국에서 제출한 서류의 종교란을 보고 내가 가톨릭 신자임을 알았던 모양이다. 10시 미사에 늦지 않도록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김성주 소학교’ 앞을 지난다. 돌판에 음각으로 ‘경애하는 김정은 장군님 고맙습니다’는 말을 새겨놓은 게 보인다.
대중교통은 무궤도 전차

식당에 뷔페식 음식이 준비되어있다. 호텔 손님을 위한 아침 식사다. 곱게 차려입은 안내원이 차를 따라준다. 은은한 향이 좋아 무슨 차냐고 물었더니, 쑥차라고 한다. 쑥을 다려 차를 만들었다는데 맛이 특별하다. 건강에도 좋다고 한 마디 덧붙인다.
손님들이 식사하는 곳과 안내원들이 식사하는 장소가 다른 모양이다. 김참사는 다른 룸으로 들어간다. 옆자리에 어제 공항에서 만났던 얼굴들이 보인다. 목사님 일행과 가족을 만나러 미국에서 왔다는 분. 또 한 분은 장애자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한식과 빵이 차례로 놓여있다. 죽과 밥, 몇 가지 나물과 김치와 국, 그리고 외국인을 위한 것인지 빵도 종류별로 세 가지나 된다. 쌀죽이 맛이 있다. 김치도 사근사근하고 고사리나물이랑 미역국이 입맛을 당긴다.
아침을 먹고 나서 방에 올라가 샤워를 했다. 더운물이 시간제로 나온다고 했다. 어제 저녁 빨지 못한 양말과 속옷을 빨아 널었다.
안내원과 약속한 시간 보다 약간 일찍 밖으로 나왔다. 로동신문사 쪽으로 무궤도 전차가 선다. 정류장인 모양이다. 일요일 아침인데 꽤 많은 사람들이 내린다. 버스 두 대가 붙어 있는 모습이다. 지하철처럼 전선을 따라 움직이지만 철로가 아닌 아스팔트 위로 움직이는 버스다. 마침 김 참사가 보인다.
“김 선생, 무궤도 전차 승차 요금이 얼마입니까?”
“5원입네다”
5원? 달러로 치면 얼마나 될까. 얼른 감이 잡히지 않는다. 공식 환율 100:1로 치면 5센트가 되겠지만, 실제로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환율은 8000:1정도라니 계량이 쉽지 않다. 이곳에서 외국인은 공식적으로 달러와 유로화, 그리고 중국 돈 위완화가 통용된다고 한다.
북한과 가까운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서는 외국 돈은 통용되지 않는다. 외국인은 환전소를 통해 외국인 전용화폐인 쿡(CUC)로 환전을 한다. 공식 환율은 달라와 쿡이 1:1 비율이다. 화폐운용 면에서는 북한이 훨씬 개방적이다. <사진3>
김참사가 택시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일요일은 우리 운전사가 쉬기 때문에 택시를 타고 성당에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30분 정도를 헤매다가 가까스로 택시를 잡았다. 그것도 성당으로 가는 큰 길이 지금 포장공사 중이어서 성당 가까운 곳까지만 간다는 조건이다. 운전사에게 “평양시내에 택시가 몇 대쯤 있을까요” 물으니. “4,5백대쯤 될겁네다” 대답한다. 택시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이 늘었다고 한다. 택시 회사는 5개라고 했다. 큰 길을 15분쯤 갔을까. 샛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더니 어느 지점에 내려준다. 택시비를 물었다. “다섯 달러입네다”
낡은 아파트 단지 사이를 10분쯤 걸어간다. 높지 않은 2,3층 아파트다. 흙먼지가 일고 저만치 웅덩이에서 쓰레기를 태우고 있다. 연탄을 말리는 모습도 보인다. 서울 산동네에서 많이도 보았던 풍경이다. 저게 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다.
오래된 주거지역이다. 80년대에 지은 아파트라고 한다. 길가에 백여 명 되는 남정네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다. 부근 주민들인 성 싶다. 무슨 논의를 하려는 것일까. 의견이 맞지 않는 듯 서로 째려보는 모습이 한바탕 소동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다.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보다

성당에 도착했다. 좀 늦었다. ‘장충성당’ 현판이 보인다. 한 신자가 문 앞에서 반갑게 맞아준다. 미사가 진행 중이다. 맨 뒷줄에 가서 가만히 앉았다. 100여명 신자들이 앉아있고,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고 계신다. 앞쪽 벽 놓은 곳에 예수님과 성모님 사진이 걸려있다.
강론 중에, 남조선 박근혜 대통령 이야기가 나오고 10.4선언에 관계된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기도 한다. 어제가 10.4선언 7주년이어서 거기에 맞추어 강론을 준비한 모양이다.
신자들의 기도가 절차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모든 의식이 가톨릭 미사 순서에 따라 마무리 되는가 생각하는데, 헌금 절차와 신자들의 기도가 끝난 다음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바로 헤어진다. 영성체 봉헌 의식 없이 끝나서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신자 대표가 진행하는 공소예절이었다. 신부님이 계시지 않으니 영성체 순서가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미사가 끝나고 신자대표와 인사를 나누었다. 김철웅(프란치스코)라고 반갑게 악수를 청한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밖에 나와 주변을 돌아보았다. 신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 모두들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터가 꽤 넓고, 별채 작은 건물이 서있다. 제법 규모가 있는 성당이다. 1988년 성당을 세웠고, 현재 신자가 300명 정도 되는, 북한에 있는 유일한 성당이다.
전국적으로 가톨릭 신자가 몇 명쯤이나 되는지 물었더니 3천 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북한 주민들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는 중에 김철웅 회장이 “외부에서 잘못 알고 이러니 저러니 얘기들을 하는데, 진정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함부로 말들을 한다”고 퉁명스럽게 한 마디 한다. <사진4>
미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길 건너 공원에 사람들 10여명이 빙 둘러서서 무언가 구경하고 있다. 옆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니 꽤 먼 곳에서 온 분도 있나 보다. 호기심에 가 보았더니 나무그늘 아래 장년 남자 둘이 장기를 두고 있다. 장기를 두는 사람은 담배가 타 들어가 곧 손가락이 데일 성 싶은데도 게임에 푹 빠져있다. 옆 사람들은 훈수를 못해 몸이 근질근질 한 모양이다. 침을 삼키는 사람도 있다. 모두 장기에 홀려 있어서 내가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어도 관심조차 없다. 몰아의 경지다. 장기판을 슬쩍 넘겨다보니 장기 알 ‘궁’이 한나라 ‘漢’자와 초나라 ‘礎’자인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 게 아니고, 한글로 ‘궁’이라고 표기되어있다. <사진5>
성당 옆 장충공원에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다. 시이소 타는 아이, 철봉에 매달리는 녀석,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도 보인다. 부모들은 의자에 앉아 어린애들이 미끄럼틀 타는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한쪽 구석에서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티격태격 싸움질을 하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일요일 풍경이다.
김참사와 함께 택시를 잡을 수 있는데 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길가에 “위대한김정은동지따라최후의승리를향하여앞으로!” 붉은 글씨로 쓴 현판이 걸려있다. 열 명 정도의 초등학생들이 그룹을 지어 백 팩을 매고 걸어간다. 놀러 가는 모양이다.
<군밤>이라고 쓴 가게가 보인다. 새로 만들어 붙인 상호인 듯 깨끗하다. 상호 아래 ‘동대원구역종합식당(10)’이라고 작은 글씨가 보인다. 군밤만 파는 곳인줄 알았는데 유리창에 ‘냉동사이다’‘얼음물’도 판다고 표시해 놓았다. 매점에서 과자 한 봉지를 샀다. 북한 돈만 받는다고 하니 옆에 있던 김참사가 대신 돈을 내준다.
밀가루를 튀겨 만든 과자다. 맞은편에서 엄마 손을 잡고 걸어오는 꼬마를 만났다. 하도 귀여워서 과자를 하나 건네주려는데 엄마가 받지 말라고 손짓을 한다. 아이가 머쓱하여 내민 손을 접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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