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북한 방문 4일째 이야기<5>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
2016년 01월 15일(금) 14:48 |
북한 측의 주장은 여기서 도외시 하더라도 남한 내에서도 좌익진영이나 그 경향의 연구자들 사이에 다른 의견이 아주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에요. 나 자신도 이문제의 연구과정에서 그와 같은 미국 측 전쟁 유포설까지 포함해서 양쪽 모두의 의도나 필요성을 과학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니까. 그러나 이 문제는 그것을 어느 이데올로기적 또는 정치적 경향에서 보려고 하는 개인적 관점과는 무관하게,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과 중국의 등소평 정권의 개방정책 이후 지난 십여년 사이에 학문적 사실 규명을 위해서 밝혀져야 할 비밀 정보는 거의 다 공개됐다고요.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남한의 적지 않은 인사들이 지녀왔던 전쟁책임론에 대해, 진실이 밝혀진 뒤까지도 자기의 희망이나 선입관을 너무 고집하는 것은 지식인의 과학적 태도가 아니라고 봐요.”
또 한 분의 의견을 소개한다. 원광대학교 평화연구소장으로 진보성향의 학자로 알려진 이재봉 정치학교수가 2015년 1월 29일 LA 원불교당에서 열린 ‘초청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어떤 청중이 “6·25는 남침인가 북침인가”하고 묻자, “남침이지요”라고 대답했다.
이 문제를 포함하여 남북이 상반된 견해를 보이는 모든 사안은 결국, 통일 이후에 남북 학자들이 절차를 거쳐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북한사회의 세 조직 소년단 청년단 조선노동당
점심은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자고 했더니 마침 오늘이 쉬는 날이란다. 옥류관 다음으로 냉면을 잘하는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청류관도 못지않게 잘하는 집이라고 한다. 이곳은 음식점을 무슨 무슨 관으로 부르는 모양이다. 청류관으로 가서 냉면을 주문했다. 냅킨을 입종이라고 부르는데 아기 손바닥만하다. 청류관 냉면 맛이 특별하다. 한 그릇에 4달러다.
오는 길에 차 안에서 김 참사에게 북한사회의 조직에 대해 물었다. 북한에는 소년단, 청년단, 조선노동당, 세 가지 조직이 기본이란다. 소년단은 여섯 살 초등학교부터 시작하는데 잘하는 아이부터 먼저 단원이 되게 하여 경쟁심을 자극한다고 한다. 잘하는 애는 별표를 주며 격려하고 못한 아이는 반성하여 자아비판을 하도록 한단다. 청년단은 중학부터 시작되는 조직이라고 한다.
노동당은 모든 국가 기관의 중심이다. 당이 정책을 결정하면 관리조직이 집행한다. 정책결정과 집행이 2원화되어있다는 얘기다. 북한 사회의 주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원이 되어야 한다. 당원이 되려면 심사도 필요하지만 당원 두 명 이상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간판이 보이는데 ‘빨래집’이라고 되어있다. 세탁소를 말한다고 했다. 지난번 방문 때 ‘전당포’가 있는 것을 보고 좀 놀랐던 기억이 살아난다. 길가에 ‘경축 당 창건’이라는 조형물이 서있다. 10월 10일이 당 창건일이란다.
북한의 결혼절차와 장례절차
호텔에 들어왔다. 김 참사가 급한 공무로 외출을 해야 한다기에 구내 커피숍에 들렀다. 어제와는 다른 아가씨가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정영희’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나도 아가씨와 같은 정가인데 본이 어디냐고 묻자, “영일 정씨”라고 대답한다. 자기 성을 말할 때는 ‘씨’라고 하지 않고 ‘영일 정가’라고 말해야 한다고 지적하자 피식 웃으며 얼굴을 붉힌다. 영락없는 시골 처녀다. 아가씨 이름은 평생 잊지 않겠다고 하자 “왜 그렇지요?” 약간 의아해하며 묻는다. “아, 자기 마누라 이름을 잊어먹는 남편이 어디 있겠느냐”고 변죽을 울리자 “정말 사모님 이름이 제 이름과 같아요?” 아까보다 더 놀란 얼굴을 한다.
아가씨를 어떻게 불러야 실례가 되지 않느냐고 묻자, 그냥 ‘처녀동무’ 또는 ‘봉사원 동무’라고 부르면 된다고 한다. 차 두 잔을 주문하자, “그럴 필요 없습네다”고 손사래 친다. 차 한 잔을 주문했다.
어제 모란봉에 갔다가 신랑신부를 만났던 얘기를 꺼내며 결혼에 관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우선 짝을 만나는 과정은 옛날에는 중매가 많았는데 요즘은 학교나 직장에서 만나 연애하여 결혼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결혼절차는 신랑과 신랑의 친구들이 신부 집에 들러 상을 받은 다음, 만경대나 모란봉 같은 공원에 들러 사진도 찍고 즐겁게 어울린 다음 신랑 집으로 가는 것으로 결혼이 끝난다. 형편에 따라 식당으로 양가 부모와 친구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하기도 한단다. 살림살이 준비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평소에 신부 집에서 그릇이나 솥단지 등 준비해 둔 살림 물건을 결혼 다음 날 신랑과 함께 인사차 와서 가져간다고 했다. 집은 새 집이 마련될 때까지 신랑 집에서 시댁식구와 함께 지낸다고 한다.
장례절차는 사람이 죽으면 3일 동안 시신을 집에서 모시고, 3일째 되는 날 공동묘지에 묻거나 화장을 한단다. 시골은 묻는 경우가 많고, 평양에서는 화장을 하여 봉안소에 모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모든 장례비용은 국가에서 부담한다기에 약간 놀랐더니, “당연한 일 아닙네까”하고 반문한다. 결혼식 축의금이나 장례식에 부의금은 주고받느냐고 물었더니 친불친에 따라 약간씩 마음을 표시하는 경우가 있단다.
학비는 대체로 얼마쯤 되느냐고 물었다. “대학까지 전혀 내지 않습네다”는 답이 돌아온다. 중학교 6년 졸업 후 일부는 대학에 진학을 하고, 대학 안 가는 사람은 군대를 가거나 직장에 근무하게 된다. 직장은 국가에서 정해준다고 했다. 군인 가는 것은 의무가 아니며 지원제라고 했다.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참 많다. 그렇지만 어린 아가씨에게 그런 문제까지 꺼내놓고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가씨 나이를 물어보니 88년생, 우리 아들과 동갑이다. 중학 졸업하고 군대 가서 5년을 복무하고 왔다고 한다. 깜짝 놀라 군인 생활이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자, “군인복무는 공민의 신성한 의무입네다.” 당연한 듯 대답한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지금은 통신 대학에 등록하여 대학과정을 밟고 있으며, 회계를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에 통신대학이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 내가 들어올 때 읽었던 책도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나도 통신대학을 졸업했기에 반갑기도 하고, 궁금한 점도 많아 학교에 관해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평소에 통신을 통해 공부를 하고 일정기간 학교에 나가 출석 수업을 하는 등, 이곳 통신대학도 남한의 초기 시스템과 비슷하게 운영되고 있다.
남한은 1972년 서울대학교 부설 2년제 방송통신대학으로 출발했다. 방송과 통신을 통해 교육을 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던, 당시에는 무척 생소한 개념의 학교였다. 나는 제1회 졸업생이다. 대학 문턱도 딛어 보지 못할 뻔 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통신대학은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지금은 4년제 대학으로 발전 독립하여 TV를 통해 교육을 하고 있는 모교를 생각하면, 참 흐뭇하고 감사하다. <사진3>
리어카 노점상의 홍시감
방에 올라왔다. 공치는 소리가 들려 밖을 내다보니 호텔 남녀 직원들이 섞여 뒷마당에서 배구시합을 하고 있다. 쉬는 시간일까. 6인제 배구다. 하나 둘 하이! 하면서 볼을 올려주면 네트 앞에서 내리치는 연습을 되풀이 한다. 뒤뜰 한켠에 ‘수령복’ ‘태양복’ ‘장군복’ 이라고 흰 바탕에 금색글씨를 쓴 입석이 세워져 있다.
주변 마을을 돌아보고 싶어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 젊은 엄마가 아이를 포대기에 안고 간다. 아이를 앞으로 안을 수 있도록 만든 담요다. 호텔 뒤쪽으로 돌아가니 골목입구에 과일 노점상이 있다. 안경 낀 주인아주머니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이 웃는다. 벌써 여러 번 앞을 지나쳤더니 눈에 익은 모양이다.
아파트 앞 골목에 종이를 깔고 옥수수를 널어놓았다. 빨랫줄에 빨래를 말리는 풍경, 둥글둥글하게 만든 연탄을 말리는 모습도 보인다. 바로 옆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원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정문이 낮은 철문으로 되어있어 안이 환히 보인다. 선생님 지도로 무슨 게임을 하고 있다.
아파트를 지나 모퉁이를 돌아서자 오른쪽으로 위안소(이발, 이용, 미안, 목욕)라는 간판이 보인다. 꽤 큰 2층 건물이다. 마을 주민들을 위한 편의시설인 모양이다. 아래층 이발소에서 여자 이발사 두 명이 이발하는 모습이 보인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작은 공원이 나온다. 젊은이들이 배구시합을 하고 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배구장 주변을 빙 둘러 서있다. <사진4>
마을을 둘러본 다음 천천히 시내 쪽으로 걸었다. 광장이 나온다. TV에서 많이 보았던 김일성 광장이다. 이곳저곳 건물 옥상에 구호들이 보인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선군혁명 총진군', '백두의 혁명정신' 모두 붉은 글씨다.
광장을 지나니 분수가 뿜어 나오고 하얀 조형물들이 보인다. 선녀들이 군무를 추는 형상이다. 남녀 청년들이 분수대에 걸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다. 대학생이라고 했다. 무슨 공부를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중국역사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고 웃으며 대답한다. 이곳이 만수대 예술극장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어간다. 학교가 끝나 집에 가는 모양이다. 내려가는 길에 작은 기와집이 있어 지나치려다 보니 현판이 세워져 있다. '숭령전', 단군을 제사지내던 곳이라고 안내판에 설명되어있다.
호텔 부근 리어카 노점상에 홍시감이 먹음직하여 한 봉지 사고 싶었는데, 이곳 돈이 아니면 받지 않는다고 고개를 흔든다. 낯을 제법 익혔으니 달러를 받아도 될 법 한데 똑 같은 대답을 들었다.
호텔 구내식당에서 된장국을 주문해 저녁을 먹었다. 한 그릇에 2달러 50센트다. 달이 밝다. 대동강으로 안내원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 보름달 아래 펼쳐지는 대동강변의 정취가 그만이다. 철교를 따라 아치를 그리는 불빛이 강물이 비친다. 강 건너 저쪽은 어둠에 쌓여있다.<사진5>
대동문 산책에서 만난 풍경들
어렴풋이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5시다. 평양 첫날 새벽 닭 울음소리를 듣고 의아했는데, 부근 어느 집에서 닭을 기르고 있는가 싶다.
6시, 대동문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으로!’란 표어가 보인다. 국보유적 제4호라는 표지 옆에, ‘평양시민위원회’에서 세운 대동문을 설명하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대동문은 6세기 중엽에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으면서 세운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서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리용되었다. 문루에서 손을 드리우면 대동강의 맑은 물을 떠올릴 수 있다는 뜻에서 일명 <읍호루>라고도 불렀다. 대동문은 우리나라 옛 건축술의 높은 발전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당시 대동강을 건너 남과 북을 오가는 사람과 물자들이 모두 이 문을 통과했다는 얘기다. 을밀대로부터 능선을 따라 이어진 평양성벽이 이곳에서 잠시 멈춘다. 8도에서 모아진 물산이 서해를 통해 대동강을 따라 이곳에 도착한 다음, 이 문을 통해 평양성 안으로 들어갔다. 당시의 왁자지껄 북적였을 강변의 모습은 흔적도 찾을 길이 없다. 대동문 하나 덩그러니 혼자 남아 저렇게 지나간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대동문 부근 공원 잔디 위에 한복을 입고 비녀를 꼽은 여자가 가야금을 타고 있는 실물크기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멀지 않은 곳에 황소 청동상이 보인다. 앉아있는 황소 등에 망태를 맨 아이가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이다. 앉아있는 황소가 금방이라도 몸을 툴툴 털고 일어나 몸을 부르르 떨 것만 같다. 소뿔을 가만히 잡고 녀석을 달래주었더니 편안히 눈을 꿈벅이며 꼬리를 흔들어 파리를 쫒고 있다. 조각솜씨가 돋보인다. 어디서 피리소리가 들려오는 성 싶다.
저런 조각품들이 도시의 품격을 높여 준다.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걸어가면서 크고 작은 도시마다 전시된 조각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특별히 부르고스에 들렀을 때, 그곳 시내 곳곳에 세워진 청동 조각품인 황소상, 밤 굽는 아주머니상, 거리의 악사상,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진6>
큰길을 청소하는 분들이 보인다. 건너편에는 등굣길 학생들이 정류소 앞에 길게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큰 길에 자전거 서너 대가 지나가는 한적한 출근 시간이다. 자동차로 북새통을 이루는 서울이나 로스앤젤레스 출근길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대동문 앞에 앉아 있는 중학생들을 만났다. 책을 보고 있기에 무슨 공부를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책과 노트를 보여준다. 고급 중학교용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 혁명력사 학습참고서>라는 책이다. 표지에 백두산 천지 사진이 있다. 노트는 한자로 英語簿라고 써 있고 아래에 에펠탑 그림이 실려 있다. 호기심으로 노트를 열어보았더니 네 줄이 그려진 노트에 영어를 한국어로,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한 문장들이 빽빽하다. “체육은 수백만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다.(Sports provide____for millions of people), 당신이 늙었을 때 일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retire)” 등의 내용들이다. 사진을 찍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라고 순순히 내어준다. 집이 이 근처라서 새벽에 나와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한다고 했다. 사진을 함께 찍자고 했더니 스스러움 없이 세 녀석이 내 곁에 선다.
여학생이 강가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왼손을 위아래로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아예 통째로 내용을 외우는 모양이다. 누가 보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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