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암군홍보대사 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북한방문 6일째 이야기<8>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
2016년 01월 29일(금) 14:26 |
향산읍 풍경
5시 기상. 6시에 읍내 산책을 나갔다. 새벽달이 떠 있다. 무슨 미련이 남았기에 저렇게 머뭇거리고 있을까.
읍내가 새벽 어스름에 잠겨있는데 김일성 동상이 서 있는 곳만 불빛이 환하다. 저 앞쪽에 큰 건물이 보이기에, '저게 무슨 건물일까' 혼자 말 비슷하게 했는데, 마침 내 곁을 지나가던 할머니가 들었던지 '고등학교 건물'이라고 말해 준다. 80은 넘어 보이는 할머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이 새벽 어느새 그분이 내 곁을 지나게 되었는지 사실은 좀 놀랐다.
그 분에게 초등학교는 어디쯤 있냐고 물었더니, "난 외지 사람이래요, 딸내 집에 와 있시유." 대답한다. 몇 발자국을 걸어가니 롤러스케이트장이 있다. "와우, 이 시골에 롤러스케이트장이 다 있네"했더니, 그 할머니 내 말을 받아 "모두가 우리 원수님 덕택이디요"라고 맞장구를 치면서 저쪽으로 총총 사라져 가신다. <사진1>
아동공원 앞을 지난다. 어린이 놀이터다. 여러 가지 놀이 기구가 설치되어있다. '생선국집' 간판이 전광판이라 멀리서도 보인다. 새벽 식사를 파는 집인지 모르겠다.
향산 식료품 상회를 지나니 역전이 나온다. 역 광장에 중학생으로 보이는 백여명 남녀 학생들이 옹기종기 앉아있다. 잠바 깃을 세우거나 보자기로 머리를 싸매며 쌀쌀한 새벽을 견디고 있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니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수학여행을 왔다고 한다. 어제 밤새워 기차를 타고와 새벽에 내렸단다. 밤새 기차에서 시달렸을 텐데, 별 대단찮은 얘기를 하면서도 저희들끼리 깔깔대며 웃어대는 저들의 얼굴에 행복이 넘쳐난다.
아, 수학여행. 저맘때쯤의 내가 생각난다. 당시 우리도 중 2학년이 되면 수학여행을 갔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병석에 누어계시는데 수학여행 가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수학여행지는 서울. 다음에 크면 서울이야 가볼 수 있는 곳 아니냐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지만, 며칠을 풀 죽어 지내야 했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수학여행이 끝난 다음, 아이들이 여행에서 있었던 일들을 화제로 삼을 때, 그리고 여행 중 찍은 사진을 나누어 갖거나 돌려보던 때였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오래가는가 보다. 그런 일들은 잘 잊혀지지도 않는다.
역전 사진관, 공업품 상점이 보인다. 공업품 상점의 간판 밑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현지지도하신 공업품상점 주체58(1969년)7월21일'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최고 권력자가 다녀가는 곳은 저렇게 역사가 되는 모양이다. 국토종단 때 문경 새재를 넘어가는데, 문경 시내에 20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하숙 했던 집을 '청운각'이란 표지판을 붙여,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던 것을 보았다.
향산군 체신소 간판이 눈에 띈다. 우체국인 모양이다. '오늘의 신문' 간판이 눈에 띄는데 지방 신문사인 모양이다. 향산군인민병원 앞을 지난다. 일찍 일어난 아주머니 한 분이 리어카를 끌고 지나간다. 리어카에 꽉 차도록 무언가 실었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집 앞을 비로 쓸고 있다. 멀리 묘향산 봉우리들이 산중턱에 낀 안개 띠를 뚫고 봉긋하게 솟아있다.
향산 소학교에 도착했다. 3층 건물인데 기와지붕이다. 내려 쓴 학교 이름 옆에 '3중영예의붉은기'라는 글이 작게 써 있다. 무슨 뜻일까. 교사 정면에 '경애하는 김정은장군님 고맙습니다'는 현판이 크게 붙어있다. '조선을 위하여 배우자' 쓴 말이 멀리서도 뚜렷이 보인다.
우리네 학교처럼 철봉이 키 순서로 나란 나란히 서 있고, 축구 골문이 운동장 양쪽에 세워져있다.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가 운동장을 빙 둘러 서있다. 몇 개의 구호를 빼면 남쪽의 어느 학교와 다를 바가 없다. 철봉을 붙들고 얘기를 나누고 있던 학생 두세 명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길가 벽에 '우리당의 총대철학 - 군대는 곧 당이고 국가이며 인민이다'는 내용이 붉은 글씨로 크게 붙어있다. 호텔이 가까워 오는데 길가에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십여 명이 앉아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영국에서 온 관광객들
호텔에 도착. 간단한 한식과 빵 종류가 놓여있다. 옆 테이블에 외국인들 네댓 명이 아침을 먹고 있다. 영국에서 온 관광객이란다. 어제 저녁 늦게 들어왔다고 한다. 한국음식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아주 특별하고 맛이 좋다고 한다.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을 옆 친구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렇지 않다는 표정이다. 음식 맛이야 제각각 기호에 따라 다를 터이니 어쩌겠는가.
호텔 로비에 나오니 배낭들을 늘어놓았다. 등산을 갈거냐 물었더니, 오늘 묘향산을 오를 계획이라고 했다. 북한 관광이 어떠냐고 물었다. “very interesting"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럴 것이다. 사실 서방 사람들 눈에 북한은 흥미로운 관광지가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고 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을 말해달라고 했더니, 주체탑과 김일성 김정일 동상을 언급한다. 체제 구축을 위해 만든 상징물들이 좋은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관광 산업은 외화가득율 100%인 훌륭한 사업이다. 남한 국적자를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 사람에게, 적대국 미국까지도 포함하여 관광의 문이 열려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남한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북한 관광산업을 일으키는 첫걸음이 아닐까 싶다.
제법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짊어지고 모두들 일어선다. 일행이 11명이라고 했다. 고려 여행사 밴 차를 타고 출발하는 걸보니 그쪽 여행사를 통해 들어온 성 싶다.
10달러에 배를 전세 내다
호텔 뒤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텃밭에 심은 배추가 여물대로 여물었다. 강가에 유람선이 매어있다. 배 삯을 물어보니 한 사람 당 2달러란다. 10달러만 내면 강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단다. 10달러? 한 시간정도 걸린다고 했다.
“값이 눅습네다”
요금이 싸다며 운전사 방동무가 한 마디 참견한다. 배를 전세 냈다. 선장이 배를 움직일 채비를 끝내자, 유람선 영업소 사장 아주머니가 동승한다.
배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단풍 든 산천이 아름답다. 물결이 잔잔하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새벽 강에 산들이 내려와 앉아있다. “장강에 배를 띄우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인생을 돌이켜보니 망망대해의 좁쌀처럼 보잘 것 없더라.” 중국 송나라의 대 문장가 소동파가 유배 중이던 항저우 장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며 읊은 적벽부(赤壁賦)의 한 소절이 생각난다.
이른 아침이라 날씨가 차다. 잠바를 꺼내어 입었다. 사장이 커피를 만들어온다. 한국산 1회용 봉다리 커피다. 조숙희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전에 묘향산에서 안내원을 했다고 한다. 안내원 일도 누구 못지않게 잘했고 손풍금도 잘 탄다고 선장이 한마디 거든다. 여자가 성격이 막힘이 없고 호방하다. 칭찬을 받았으니 그냥 있을 수 있냐며 술 한 병을 가져온다. 머루와 살구 등 온갖 과일을 섞어 빚은 술이라고 한다. 사업하는 역시 사람은 다르다. 작은 잔에 한 잔을 따라 주는데 술 맛이 일품이다.
이 강에 칠색송어, 쏘가리, 붕어 등 물고기가 많다고 한다. 어죽이 일품이라고도 했다. 저녁에 한 번 더 오시면 특급 요리로 대접을 하겠단다. 저녁 시간에 배 띄워놓고 물고기 요리에 술 한 잔이면 그만이겠다. 달이라도 휘엉청 떠 있는 밤이면 더하여 무엇하랴.
물안개 낀 잔잔한 강가, 이 시간 즈음이면 낚시에 딱 좋은 시간이다. 그런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낚시꾼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대동강 변에는 낚시꾼들이 제법 눈에 띄었는데 이쪽은 거기와는 사정이 좀 다른가 보다. <사진3>
멀리 군인들이 작업하는 모습이 보인다. 물놀이 공원을 만들고 있는 중이란다. 묘향산에 가족단위로 오는 관광객, 그리고 이 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시설이 될 거라고 한다. 집 굴뚝 여기저기서 연기가 곧게 피어오른다. 아침밥을 짓는 모양이다.
저런 풍경을 보면 고향 생각이 난다. 어스름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시던 어머님 얼굴이 보이고, 솥 닦는 소리, 쌀 씻는 소리 호두둑 호두둑 솔개비 타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가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소리도 들린다. 집안 가득히 번지는 연기 냄새며 가만가만 따스워지는 아랫목 구들장의 온기와 함께 날이 밝아오고, 쇠죽 끓이는 냄새와 밥 재지는 냄새가 고삿길로 흘러들 무렵이면 햇살이 눈을 부비며 청청한 소나무 사이로 빠끔히 얼굴을 붉혔다.
점점 따스워오는 이불 속을 빠져나오기 싫어 머뭇거리는 우리 남매들을 향해 어머니는 나직하게 말씀하셨다. “아그들아 학교 늦겄다, 얼릉얼릉 일어나가라 잉” 몇 번을 불러도 소식이 없자 드디어 어머니가 부지깽이를 들고 들어와 이불을 확 걷어치우셨다. 이불 속에서 오불오불 병아리 새끼들 마냥 허리를 구부려 누워있는 우리들을 보면서 어머니는 “어이구 이놈의 새깽이들” 하시며 우리들의 볼기짝을 때리는 시늉을 하셨다. 그런 시절이 엊그제 인 것 만 같다. <사진4>
강 저편에 나루터가 보인다. 강 이쪽과 저쪽을 건너 주는 나룻배가 운행을 하는 모양이다. 자세히 보니 아주머니 한 분이 앉아있다. 배를 기다리고 있는 성 싶다. 나루터 뒤 산기슭에 흰 염소 대여섯 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염소란 놈은 먹성이 좋아 풀뿌리까지 뜯어 먹는다. 그래서 작은 섬에 염소를 방사하면 섬 전체가 몽땅 망가지곤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방사하는 염소는 아닌 것 같다.
배가 작은 물결을 일으키며 지나가자 물 위에 내려와 있던 산자락이 물결 따라 흔들린다. 물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다. 저 멀리 묘향산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있다. 산이 산을 업고, 산이 산을 보듬고, 산 산이 어깨동무를 하며 아스라이 여울져 간다. 희뿌연 안개 너머로 아침 해가 불끈 솟아오른다. 한 시간이 금방이다.
용문대굴 가는 길 풍경
오늘은 용문대굴을 둘러 본 다음 평양으로 가는 일정이다. 향산읍을 벗어나는데 왼쪽으로 비닐하우스가 보인다. 여러 동이다. 비닐하우스 양쪽을 반원형 시멘트 구조물로 만들어 놓았다. 저렇게 반 영구적인 비닐하우스는 처음 본다. 채소를 심어놓았다.
신작로 가로수 그늘을 따라 소가 달구지를 끌고 간다. 추수하러 들에 나가는 모양이다. 농부는 고삐를 쥐고 소걸음에 맞춰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까. 소걸음에 맞춰 시간도 느릿느릿 지나갈 성싶다. 까마득한 세월 저편에 웅크리고 있던, 눈물 나도록 그립던 목가적인 풍경이다.
집을 나설 때는 저렇게 빈 몸으로 가지만, 돌아올 때는 저 빈 달구지에 콩이며 팥이며 고구마 등속을 그득 채워 올 것이다. 봄부터 여름에는 집에 만들어 쌓아둔 퇴비 따위를 들로 실어 나르고, 가을이면 들녘에서 추수한 것들을 집안으로 가져왔다. 내가고 실어오는 일이 농사일 중의 큰일이었다. 남정네는 지게를 사용하여 져 나르고, 여인네는 머리에 이어 날랐다. 큰 부자집이 아니면 저렇게 달구지를 이용하는 일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들녘에 나락을 심어둔 채로 트랙터가 지나가면서 한 번에 타작을 끝내는 시대가 되었다. 2009년도에 걸어서 국토 종단을 하면서 지게를 지고 가는 농부를 강원도 에서 딱 한 번 보았다. 그런데 2011년도에 국토횡단을 하면서는 단 한 차례도 지게 진 농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제 남쪽에서는 달구지나 지게는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귀하신 몸이 되어버렸다.
불과 몇 십 년 만에, 적어도 내 당대에 그런 모습을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시대가 와버린 것이다. 나처럼 농촌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물론, 재래식 농업방식을 보고 자란 한국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어릴 적 체험이나 풍경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을 것이다. 저렇게 소가 달구지를 끌고 가는 모습이야말로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지 않을까 싶다.<사진5>
어제 차를 타고 올라왔던 청천강 기슭을 길 따라 내려간다. 왼쪽은 강이 흐르고 오른쪽은 산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이쪽은 숲이 비교적 울창하다. 묘향산 일대를 특별히 관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철이 철인지라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발그레한 산천이 참 곱다.
큰길을 벗어나 왼쪽으로 꺾어들자 ‘섯!’ 표지판이 보인다. 검문소다. 총을 맨 군인 두 명이 검문을 한다. 북한에 온 후 처음 보는 모습이다. 행정구역을 넘을 때면 이렇게 검문을 하는가 싶다. 샛길로 들어서며 청천강을 건넌다. 시멘트 다리인데 물이 불면 넘치는 섶다리 형태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셋씩 넷씩 그룹을 지어 작은 빈 리어카를 끌고 지나간다. 무엇을 가지러 가는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 시골길로 들어선다. 옥수수대를 눞혀 놓은 풍경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추수를 끝내고 빈대만 널브러져 있다. 이쪽 지역은 밭농사 중심지역이고 주로 옥수수를 심는 모양이다. 옥수수 대는 말려서 땔감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다. 산 속 소나무 사이에도 옥수수를 심었다. 빈터가 없을 만큼 토지를 이용하고 있다.
차에서 내려 산길을 걸어 올라간다. 소나무 숲 아래 누런 솔잎이 수북이 쌓여있다. 갈퀴나무다. 옛날 시골에서 농사를 지을 때, 웬만큼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울 지낼 땔감을 준비하는 게 중요한 일이었다. 저렇게 소나무 밑에 떨어진 솔잎을 갈퀴로 긁어 집으로 날랐다. 낙엽이 쌓여 썩어야 거름이 되어 나무가 잘 자랄 터인데, 그 당시 농촌에는 변변한 취사와 난방 수단이 없던 시절이므로 산에 나무를 보호할 겨를이 없었다. 밥을 끓여 먹고, 구들장을 덥히는 생존의 문제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때 우리는 해마다 식목일 즈음이면 민둥산에 나무를 심었다. 학생들은 물론, 각 마을 단위로 주민들이 동원되었다. 그렇지만 산은 푸르러지지 않았다. 농촌에 연탄이나 가스가 보급되면서 산이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남한의 산들이 사람이 들어서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이 우거졌지만, ‘산림녹화’ 구호가 여기저기 붙어있던 시절이 실은 그리 먼 옛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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