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북한방문 7일째 이야기<9>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
2016년 02월 05일(금) 13:49 |
상점 옆에 ‘국방체육오락’이라는 팻말이 서있다. 총쏘기, 공넣기, 수류탄 던지기, 오리목걸이, 놀이다. 몇 번에 맞추거나 떨구었을 때, 얼마를 지불한다는 내용이다. 당첨금은 상품으로 지불한다고 적혀있다.
어디선가 학생들이 응원하는 소리가 들린다. 편을 갈라 무슨 운동이나 게임을 하고 있는 성싶다. 한 남자가 옥수수대를 지게로 져 나르고 있다. 산중 길이 협소한 곳에선 지게야 말로 유용한 운반수단일 터이다.
룡문대굴 관람요금은 어른 3천원, 학생 1천500원, 단체 200원이라 적혀있다. 주차요금은 5천원이다. 지난 번 평양에서 무궤도 전차 승차 요금이 5원이라고 했는데, 그에 비하면 입장요금이 만만치 않게 비싼 셈이다. 마당 한 쪽에 옥수수를 말리고 있다.
안내원을 따라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비스듬한 동굴 길을 따라 10분쯤 내려갔을까. 우리보다 먼저 온 그룹이 동굴을 둘러보고 있다. 자연학습 나온 학생들이라 했다. 안내원에게 하루에 몇 번씩 관광객을 안내하냐고 물었더니, 하루 두 번 정도라고 한다. 넓이가 6만㎡ 깊이가 최고 326m에, 전체를 다 둘러보려면 다섯 시간이 필요한데, 대부분 관람객들이 일부분만 구경하고 돌아간다고 했다. 연장길이 7.2㎞라는데 천태만상의 돌고드름, 돌순, 돌꽃들이 기기묘묘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지금도 돌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어릴 적, 제주도 만장굴을 구경했던 기억이 살아나고, 미국에서 가 보았던 몇 군데 동굴도 함께 떠오른다. 일정상 한 시간 정도 돌아보고 밖으로 나왔다.
평양에 돌아왔다. 저녁은 호텔 주변 식당에 가서 돌솥비빔밥을 먹었다. 미국에서 먹던 맛과 비슷하다.
호텔에서 김세을 신부를 만났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신부님인데 가족이 북한에 살고 있어 이따금 오신다고 했다. 이번 주 일요일은 성당에 가셔서 미사를 집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고 싶은데, 그 날은 지방에 내려가 머물 계획이다. 아쉽다.
북한 방문 7일째
6시 기상. 산책을 나갔다. 대동강변 여기저기 시민들이 음악을 틀어놓고 율동을 하고 있다. 오늘이 당 창건일이란다. 축일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사람이 많아 보인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고, 체조하는 노인들도 보인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 학생들이 길거리에서 책을 읽으며 걸어간다. 저렇게 열심히 해야 따라갈 수 있을 만큼 경쟁이 치열한거냐고 말을 꺼냈더니, 김 참사가 빙긋이 웃는다. 그에 관한 대답은 며칠 후 고려호텔에서 숙소까지 평양 밤거리를 걸어가면서 듣게 되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책을 펴놓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는데, 본인도 김일성대학 재학 시절 전력 사정이 좋지 못해 저렇게 밖에 나와 가로등이나 공공건물의 야외 보안등 아래서 공부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밤에 가로등불 아래서 공부도 하는데 대낮에 걸어가면서 책 읽는 것 정도야 당연한 것 아니냐는 웃음이었으리라.
김 참사에게 북한의 교육제도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곳 학제는 12년제인데, 학업을 전문으로 하는 교육체제와, 일하면서 배우는 체제의 두 가지로 되어있다고 한다. 남한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6년제 중학을 졸업하면 대학 진학을 하게 된다. 남한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전국 규모의 시험을 치러 기본적인 선발기준을 삼지만, 대학 진학 인원은 각 지방, 근로자, 그리고 여성의 비율을 참작하여 국가에서 선발한다고 했다. 많은 학생들이 선망하는 대학은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인데, 김일성대학은 학생수가 9천명 정도, 김책대학은 1만2천명 정도란다. 중학과정에서 우수 인재를 발굴하여 교육시키기 위해 각 도에 제일중학이 있고, 전국적으로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교육시키는 평양 제일중학교가 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면 학사가 되고, 박사 과정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남쪽의 석사에 해당하는 부원사, 원사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토요일마다 갖는 학습시간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호텔에 도착했다. 여자 종업원 3명이 빗자루로 주변을 쓸고 있다. 날아갈 듯한 흰색 치마저고리를 입었는데 우리 여인들에게 한복이 참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온다. 옷이 고와서였나, 여인들이 예뻐서였을까. 역시 남남북녀인가.
아침식사를 느긋하게 마쳤다. 오늘 행사 때문인지 김 참사가 바쁜 모양이다. 그가 당 창건 행사에 함께 가시겠냐고 묻기에, 밀린 글도 정리하면서 쉬겠으니 다녀오시라고 했다.
구내 찻집에 들러 차 한 잔을 주문했다. 지난번 만났던 정영희 안내원이 오늘 당번인 모양이다. 반갑게 인사를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던데 통신대학 기말시험은 잘 치렀냐고 말을 건넸다.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하시냐고 환하게 웃는다. 집이 근처에 있냐고 물으니 지하철을 이용해 출퇴근한단다.
주민들의 생활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서 김 참사에게 들었던 대로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의식이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별히 매주 마다 갖는 ‘학습의 날’은 북한에만 있는 제도가 아닌지 모르겠다. 매주 토요일 그룹별로 학습에 참석하는데 그 모임을 통해 국내외 정세를 전달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이 세상 돌아가는 일을 환히 알고 있다고 했다. 주말마다 모임을 갖는 게 귀찮은 일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고 펄쩍 뛴다. 학습을 통해 개인과 집단의 잘잘못을 고쳐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학습은 매우 중요합니다, 라고 거듭 강조한다. 자아비판을 하는 경우도 있고, 지위의 높낮이와 관계없이 잘못이 있다면 누구라도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했다. 지난 번 김 참사가 ‘잘못될 자유가 없는 나라’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북한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운영되고 있는지 한 평범한 아가씨를 통해서도 대충은 알 수 있다.
소통에 어려움이 많은 남북
찻집에 앉아 얘기를 나누다보니 꽤 시간이 지났다. 방에 올라가 컴퓨터를 켜고 그동안 써 놓은 글을 정리했다. 김 참사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행사가 길어지는가 보다. 부근 시내를 돌아보자는 생각으로 호텔을 나섰다.
길가 상점 간판에 ‘예술사진제작, 증명서, 수복사진, 비닐도포, 수자식사진’이라고 붙어있다. 비닐도포, 수복사진, 수자식사진이란 무슨 뜻일까. 남북이 분단된 지 70년이 되면서, 같은 말을 쓰는데도 소통에 어려움이 있다. 간판 내용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언어생활에 차이가 많아졌다는 증거다. 간판 뿐 아니라 일상용어에서도 북에서 사용하는 말과 남에서 사용하는 말은 많은 차이가 있다. 아이스크림(얼음보숭이), 내프킨(입종이), 브라자(가슴띠), 코너킥(모퉁이차기)처럼 서로 다르다. 남한은 외국어가 그대로 통용되는데 북한은 우리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분단세월이 길어질수록 남북 간 언어의 소통이 어려워질 것은 자명하다.
평양강냉이전문식당, 간판이 보인다. 옥수수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니 강냉이를 재료로 특별한 음식을 만드는 전문식당인 모양이다.
“당과 수령께 충성을 다하자!”,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께서 올해 신년사에서 제시하신 강령적 과업을 철저히 관철하자!”,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크게 쓴 구호들이 길거리에 세워져 있다. 남한이나 미국같은 자본주의 국가는 눈에 띄는 곳에 상품 광고를 설치하는데 이곳은 잘 보이는 장소에 저런 구호를 세워두었다.
“결사옹위”라는 글이 보인다. 決死擁衛. 최고 지도자를 죽을힘을 다해 부축하고 호위하자는 의미이다. 수령 중심인 이곳 정치체제에서는 나올 수 있는 얘기겠다고 생각되었다. 저런 구호는 북한에서만 볼 수 있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귀국 후, 몇 개월 뒤 남쪽 신문에서 똑같은 단어를 발견하고 좀 놀랐다. 다음은 “결사옹위”가 인용된 두 신문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지도부의 7일 오찬회동은 사뭇 비장했다. 박 대통령은 비선 실세 국정개입 의혹 등에 대한 정면돌파 의지를 수차례 표명했고, 새누리당 지도부는 ‘결사옹위’의 의지를 다졌다.”<2014년12월8일자 한국일보 기사 인용>
“…대통령 비서들의 오만과 뻔뻔함이 도를 넘고 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듯 오직 대통령 보위에만 매달린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로서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기엔 정도가 너무 심하다.…그러면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손에는 구정물 한 방울 묻히려 하지 않는다. 비서들의 ‘결사옹위’를 받으며 생색나는 일에만 얼굴을 내민다.” <2014년10월29일자 한겨레신문, <정석구 칼럼>인용> <사진7>
빙수가게 앞에 사람들이 붐빈다. 프로판 가스통을 끌고 가는 모녀의 모습이 보이고, 백팩을 매고 걸어가는 젊은 여인의 뒷모습도 보인다. 서서 빙수를 먹고 있는 여인이 맨 핸드백도 디자인이 독특하다.
두 젊은이가 가스통을 끌고 간다. 한 젊은이가 입은 재킷에 ‘adidas’ 상표가 뚜렷하다. 많은 평양시민들이 프로판 가스로 취사를 해결하는가 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가스를 사용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연탄을 사용하는 성 싶다.
젊은 엄마가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밀고 가는 모습도 보인다. 먹고 살기 위해 취사도구가 필요하고, 유행에 따라 옷을 사 입어야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데 유모차도 필요하겠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미국이나 사람 살아가는 모습들은 저렇게 어디서나 모두 비슷하다. <
평양 동네이발소 무료이발
엊그제 걸었던 호텔 뒤쪽 골목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노점상이며, 유치원이며 어느새 눈에 익은 풍경이 되었다. 위안소(이발, 이용, 미안, 목욕)간판이 보인다. 아래층 이발소에 여자 이발사가 흰 유니폼을 입고 이발을 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이발소, 이용일, 미안실, 목욕탕이 2층 건물에 함께 들어있다. 요즈음 남한은 목욕탕에서 이발도 함께 하도록 되어있는 곳이 많지만, 예전에는 이발소가 따로 있었다.
이발소 앞에 놓인 긴 나무의자에 두 사람이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열댓 살 정도의 남학생은 ‘adidas’ 상표가 찍힌 셔츠를 입고 있고, 또 한 분은 40대 남자다. 아까 길에서도 'adidas' 옷을 봤는데 이 학생도 같은 상표 옷이다. 요즈음 평양에서 'adidas'가 유행인 모양이다. 이발관 문을 빠끔히 열면서 물었다.
“이발 할 수 있습니까”
“해방산 려관에서 오셨습네까, 거기가 설비도 좋을텐데…”
그냥 돌아가 주면 좋겠다는 말투다. 40대 중반쯤 보이는 아주머니다. 내 옷차림을 보고 담박 해방산 여관에 묵고 있는 여행자인 것을 알아차렸나보다. 그냥 문들 닫고 돌아설 줄 알았는데 문이 반쯤 열린 그대로 계속 문고리를 잡고,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보면서 잠깐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짤막한 몇 분이 지난 다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한다. “해 드려야지요, 앉아 기다리시라요”
복도에서 기다리라는 얘기다. 하던 사람의 이발을 끝마치고 나를 부른다. 기다리던 두 사람을 돌아봤더니, 괜찮다며 나더러 먼저 하라고 순서를 양보한다. 이발관 의자에 앉았다. 같은 의자가 세 개 나란히 놓여있다. 오래전 고향에서 많이 앉아보았던 평범한 이발관용 의자다. 앞에는 큰 거울이 걸려있고, 바로 내 앞에 나무로 짠 가구가 놓여있다. 유리를 통해 이발 기구도 보이고, 차곡차곡 쌓여있는 흰색 수건들도 보인다. 면도날을 세우는 넓적한 가죽띠가 못에 걸려 길게 늘어져 있다. 가죽에 묻어있는 손때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그리고 한 쪽 구석에 빗자루와 쓰레받이가 놓여있다. 고향 이발소에 온 느낌이다. 거울 위쪽에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 그림 한 폭이 걸려있다면, 그리고 “세월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푸시킨의 시 한 편이 걸려 있다면, 그야말로 영락없는 옛 우리 동네 이발관 풍경이겠다 싶어진다.
“기계로 해 드릴까요, 가위로 할까요”
“가위로 해 주세요”
익숙한 솜씨로 머리를 자르기 시작한다. 잘 보이는 곳에 <영웅, 전쟁로병, 영예군인, 교원, 과학자, 제대군관들은 우선 봉사합니다>라는 글씨가 붙어있다. 저런 분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모양이다. 저만치 구석에 나무판자가 보인다. 어린 아이를 이발 시킬 때 의자 위에 놓고 앉히는 판자다. 판자가 반들반들 윤이 난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되살아난다.
내 초등학교 2학년 때쯤 일이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발소에 갔다. 키가 작고 어린 나를 어른 의자 위에 나무 판지를 얹고, 그 위에 나를 앉혔다. 머리를 깎던 아저씨가 얌전히 앉아있는 나에게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하셨다.
“야, 이 녀석 참 잘 생겼다. 이 머리에다 사각모를 턱 씌워놓으면 정말 멋지겠다. 넌 꼭 그렇게 될 거야. 그때 이 아저씨 생각해야한다. 응!”
아저씨가 어린 꼬마 기분 좋으라고 한 그 말은 날아가지 않고 내 머리 속에 남았다. 이발소에 오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아저씨는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만 해도 대학생은 시골에서 선망의 대상이었고, 누가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그 지방의 사건이 되는 시절이었으니까.
대학 졸업식장에 사각모자를 쓴 모습은 내 인생에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으로 머리에 각인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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