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아, 네 주제를 알아야지!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6년 02월 05일(금) 14:07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치고 돌아왔다. 800km 가까운 길을 아내와 함께 31일 동안 걸었다. 그 길에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길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은 길이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걷기 24일째 되던 날 카카베로스 지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침 7시30분에 숙소를 떠나 걷기 시작했다. 길가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아침을 먹게 되었다. 커피 한 잔과 빵 등으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떠나려 하는데 주인이 문밖까지 나와 와인 한 병을 선물로 주었다. 아침 손님 몇 분께 특별히 드리는 선물이니 가져가 잘 마시라기에 엉겹결에 감사하다며 받았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몇 걸음 걸어가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지금 배낭을 지고 걸어가는 순례자였다. 짐을 줄이기 위해 얼굴에 바르는 로션까지 버려가며 걷는 처지에 이 무거운 와인을 짊어지고 가다니. 오늘 걸어야 할 거리가 30km가 넘는 먼 길이 아닌가.
배낭은 가벼울수록 좋다. 그래서 전문 산악인들은 짐을 꾸릴 때 칫솔 손잡이를 반으로 잘라내어 무게를 줄인다고 하지 않던가.
고맙게 받았지만 사정을 얘기하고 주인에게 반환하고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처한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내가 선물을 준 사람에게 되돌려줄 수가 있느냐며 자기가 짊어지고 가겠다고 병을 달라고 한다.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인가. 달라느니 안 된다느니 티걱태걱 하는 모습을 보면서 순례길을 함께 걷던 한국에서 온 김씨 부부도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다. 선물로 받은 와인 한 병이 아침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애물단지가 된 와인 병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식당 주인은 사정을 빤히 알텐데 왜 와인을 선물했을까. 순례길을 걷는 동안 신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를 들었다 놓았다 시험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짜 선물이라고 덥석 받아드는 내 모습을 신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저녁 한 때 한 잔의 즐거움을 위해 무거운 와인을 안고 끙끙대며 언덕길을 올라가는 이 미련한 사람. 이놈아, 네 주제를 알아야지! 공짜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애라이 덜된 녀석 같으니라고!
생각할수록 얼굴이 뜨거워왔다. 내 살아온 인생에서 분수를 모르고 설쳤던 때가 언제였을까. 진정한 노력이나 대가 없이 무엇을 바랬던 적은 없었는가. 내 속에 있는 나를 불러내 따지듯 묻고 또 물었다.
한 시간쯤 걸어가다가 텃밭에 나와 있는 농부를 만났다. 여차여차하여 와인 한 병을 얻었는데 필요하면 드리겠노라 했더니 반갑게 받는다. 농부에게 와인 병을 건네주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도 몸도 편안해졌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진정한 나를 만나는 길이었다. 그 길에서 만난 각양각색의 사람들, 때로는 길가에 핀 들꽃 한 송이까지도 내 안의 나를 다시 바라보게 했다. 그분들이 모두 위대한 스승이었다. 이놈아, 네 주제를 알아야지! 쩌렁쩌렁한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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