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6년 03월 28일(월) 11:42
시 기상. 대동강 산책을 나갔다. 거북선 모형 배가 떠있다. 명량해전 현장인 우수영 울돌목에 거북선이 전시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당연한 것으로 여겼지만, 국토종단 중 속초 부근 바닷가에 전시해놓은 거북선을 보았을 때는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대동강에서 또 거북선 모형 배를 보게 되었다.
아주머니가 애완견을 앞세우고 산책을 하고 있다. 엊그제 어떤 남자가 애완견을 데리고 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오늘 두 번째다.
7시50분, 사리원을 향해 숙소를 출발했다. 재령, 신천을 거쳐 개성에 도착할 예정이다. 평양 시내를 물차가 물을 뿌리며 지나간다. 길에 먼지가 덜 나도록 대동강 물을 퍼다 길을 축인다고 했다. 경운기도 보이고 리어카를 끌고 사는 사람도 있다. 그물에 볼을 담아 어깨에 둘러메고 가는 녀석들이 보인다. 깡충깡충 뛰어가는 모습을 보니 아마 어느 팀과 오늘 한 바탕 붙기로 한 모양이다. 평양 변두리의 일요일 아침 풍경이다.
다리를 건너간다. 충성의 다리라고 한다. 강 가운데 뚝섬이 있다. 저곳에서 김구 선생이 한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평양을 벗어났다. 김 참사가 문배주 이야기를 꺼낸다. 모란봉 아래서 대대로 술을 만들어 팔던 집안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아비가 아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아버지가 남쪽에서 술을 만들어 팔았다. 어느 날 아들에게 “이제 세계적인 술을 만들어 팔게 되었는데…” 당시 문광부 장관을 하던 사람을 만나 소개를 했다. 6·15회담 때 박지원이 술을 가지고 방북, 회담장에서 김주석에게 술을 따르며 얘기함으로써 알려졌다. 술맛을 보던 주석이 “모란강 물로 술을 담아야 진짜 술맛이 난다”고 했단다. 그 얘기를 듣던 아버지가 우리 가문 대대로 지켜오던 비밀인데 어떻게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는지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배주가 북한에 알려지게 된 경로란다. <사진1>
<성불사의 밤>를 부르다

정방산 성불사에 들러 가기로 했다. 차가 고속도로를 벗어나 산자락으로 휘어들어 한참을 올라가니 사찰 입구가 보인다.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간다. 밤새 떨어진 낙엽이 바람에 쓸린다. ‘국보유적 87호’ 안내석이 세워져있다. 성불사는 신라 말인 893년에 건립했는데 6·25때 폭격으로 부숴진 것을 1955년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正方山 成佛寺> 현판이 보인다. 이른 아침이라선지 경내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마당 한 쪽에 5층탑이 서있다. 아침 햇살이 절 마당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다. 신발을 벗고 대웅전에 올라가 인사를 드렸다. 천불상, 극락전 등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돌아보는데 스님 한 분이 나타난다. 법성스님(한상열)이라고 한다. 40대로 보이는 젊은 스님이다. 머리를 깎지 않았다. 사찰 둘레가 12킬로라고 한다. 절의 내력에 관해 얘기를 들려준다.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온다. 호수가 맑기도 하다. 단풍든 산이 물속으로 내려와 발을 씻고 있다. 나도 호숫가에 서서 노래 한 곡을 부른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 주승은 잠이 들어 객이 홀로 듣는구나 /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성불사의 밤>을 혼자 부르다가 김 참사에게 이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다. 모르겠단다. 깜짝 놀랐다. 남한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이 가곡을 모르다니.
절 입구 길가에서 엄마를 따라 나와 있던 남자아이를 만났다. 여섯 살이란다. 예뻐서 안아주려고 했더니 저만치 도망쳐 버린다. 도망가는 녀석을 좇아가 붙잡아 안아주고, 차에서 과자 한 봉지를 가져다 손에 쥐어주었다. 지켜보던 어머니 얼굴이 환하다.
송해의 고향 재령평야 나무리벌
신천을 먼저 간 다음, 되돌아오는 길에 재령과 사리원을 들리기로 했다. 사리원을 잠깐 지나 재령 평야지대를 통과한다. 2차선 포장도로다.
황해도 재령은 방송인 송해(88)선생의 고향이다. 그가 자신의 평전 ‘나는 딴따라다’ 출간기념회 자리에서 “2003년 평양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했는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령 나무리벌에서 ‘전국노래자랑 송해, 나무리벌에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한번 외칠 수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습니다.”고 말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고향은 그런 곳이다.
이곳 재령평야 나무리벌은 청천강 연안 넓은 안주평야 열두삼천골과 함께 북한 최대의 곡창지대다. 아니나 다를까. 상당히 오랫동안 자동차를 달려도 계속 들판이다. 청일전쟁 당시 파죽지세로 청군을 몰아치던 일본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이곳 재령평야를 지나면서 “황해도 땅이 비옥하니 일본의 식량창고로 써야 한다”고 이토오 히로부미에게 전보를 쳤다는 일화가 있다.
시절이 10월 중순인지라 나락을 베어 묶어 놓은 곳이 많고 이미 추수를 끝낸 논바닥도 여기저기 보인다. 쉬지 않고 달려 신천에 도착했다.
신천박물관,‘야만의 시대’
당시 군청건물이 신천박물관이 되었다
잠깐 휴게실에 앉아 쉬는 동안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었다. 신천은 인구 15만 정도의 도시라고 한다. 이곳에서 2백여리 떨어진 곳에 구월산이 있단다. 이 지방의 유명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종달 온천이 유명하단다. 옛날 발목이 상한 새가 그 물가에 왔다 갔다 하더니 상처가 낫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산리의 가물치 맛도 일품이란다. 이 지역은 농업지대이며 강냉이, 고구마, 수수, 기장 등을 주로 심어먹는다고 설명해준다.
신천박물관으로 안내한다.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저질러졌다는 장소다. 군청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란다. 입구에 “신천땅의 피의 교훈을 잊지말자!” 라는 구호가 새겨져있다. 바로 옆에 ‘승냥이 미제를 천백배로 복수하자!’는 그림이 보인다. 안내원에 의하면 당시 신천군민 1/4에 해당하는 3만5천여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 중 어린이, 노인, 부녀자가 절반이 넘는다고 한다. 사건을 증거하는 여러 가지 물건과 기록이 보관되어있고, 당시 주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십자가, 찬송가, 묵주 등 성물이 전시되어있다. 방공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왔다는 생존자의 증언도 들었다.
북한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 기록을 찾아보니 신천 민간인 희생에 대한 다른 의견도 있었다. 신천군 사건은 미군에 의해 전적으로 저질러진 일이 아니라, 해방 전후의 좌-우 대립과 갈등을 비롯한, 복합적인 원인이 맞물려 동족 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라는 견해였다.
당시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일어났던 ‘노근리양민학살사건’, 그리고 한국군이 미군과 함께 싸웠던 월남전에서도 양민학살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도를 통해 알고 있다.
수많은 민간인이 전쟁 중에 죽임을 당했다. 전쟁은 그렇게 잔인하다. 후일, 미국 정보국장이었던 데니스 블레어는 이렇게 술회했다. “1930년부터 1975년까지는 동남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야만적 충돌의 시기였다. 군인들이 군인들을 죽이고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죽였으며 민간인들이 서로를 죽였던 시기였다.”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야만의 시대였다. <사진4>
재령의 해림상회

고향사람을 기다리는 재령 해림상회
차를 돌려 재령으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미국 우리 동네에 재령 출신이 있다. 위진록씨다. KBS 아나운서로 6·25사변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처음 방송으로 내보낸 분이다. 그 분의 수필집을 읽어보면 이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분들이 초기에 얼마나 고생을 하며 살아왔는지 알 수가 있다. 그 분 뿐이겠는가. 막막한 세상 하루 세끼를 해결하는 것마저 힘겨웠을 저들의 고통은 짐작도 할 수가 없다. 많은 실향민, 이산가족들이 고향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다. 나이 들어 생이 얼마 남지 않는 그들이 고향을 찾아가고, 가족을 만나게 할 수 있는 길은 정녕 없는가. 분단의 비극이다.
넓은 재령평야 곳곳에 볏단을 쌓아놓았다. 삼시강 협동조합 앞에 “큰소리치고 잘 살날이 눈앞에 보인다”는 베너가 걸려있다. 한 주민에게 재령출신이면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오래된 건물이 있냐고 물었더니 ‘해림상회’를 보고 가란다. 그가 말해준 곳으로 갔더니 해림상회(海林商會)라는 간판이 붙은 2층 건물이 길가에 서있다. 1910년에 지은 이지역의 유명한 상업건물이라고 했다. 보존 상태가 좋다. 오랜 세월 주민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을 해림상회가 고향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시작한 일은 끝을 본다”는 베너가 보인다. 소달구지가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점심때가 되어 들판 가운데 있는 그늘 밑으로 가서 주문해 가져온 도시락을 폈다. 눈앞에 보이는 배추며 수수대며 깻단, 그리고 누렇게 익은 벼 이삭이 정겹다. 땅 한 평이라도 허비하지 않으려는 듯 손바닥 만 한 곳도 비워두지 않고 배추를 심었다.
한 여름, 수수대는 농촌 사람들의 군것질 깜이었다. 껍질을 벗기면 하얀 속살이 나왔다. 사근사근한 그 속살을 씹으면 단물이 혀를 적셨다. 껍질을 벗기면서 날카로운 껍질에 입술을 베이기도 했다.
저렇게 깨를 베어 단을 만들어 세워놓았다가 마르면 깨를 털었다. 어머니는 밭 귀퉁이에 이불 호청을 깔고 그 위에서 깨를 떨었다. 수북수북 쌓여가는 깨를 보며 “하따 오지다 징허게 오지다야”, 참말로 오지게 웃던 우리 엄니 웃음소리며, 흩어 떨어진 깨알을 쓸어 담으시며 “오~매 으째야 쓰꺼나 깨 한 말이면 느그들 한 학기 납부금인디” 하시던 말씀 귓가에 맴돈다. 게으르게 깻단을 날라 오는 나에게 죽으면 “썩을 삭신 애깨서 뭐한다냐”며 혀를 끌끌 차시던 어머니가 보인다
오래 전 추억이다. 저만치 다리 위로 주민들이 걸어간다.<사진5> <사진6>
달구지에 깻단을 싣고 가는 농부
닭을 데려와 풀어놓고 공부하는 아이
점심을 먹고 있는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리어카를 끌고 논바닥으로 들어선다. 가만히 지켜보았다. 리어카에 실린 나무 가구의 문을 열자 닭이 쏟아져 나온다. 열댓 마리는 되어 보인다. 닭들이 논바닥에 떨어져 있는 벼이삭을 주워 먹느라 바쁘다. 그런 다음 녀석은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저렇게 닭을 데려다 이삭을 주워 먹게 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점심을 끝내고 논두렁을 따라 녀석에게 갔다. 무어라 물어도 씽긋이 웃기만 한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는 이삭이 남는다. 남은 이삭을 쥐도 먹고 새도 먹고 야생동물이 주워 먹으며 겨울을 난다. 저렇게 닭 모이도 된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면 저런 모습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요즘 남한에서는 논바닥에 이삭을 남기지 않는다. 기계로 타작을 한 다음, 볏짚을 비닐로 말아 유산균으로 발효시켜 ‘곤포(梱包) 사일리지’를 만든다. 이 사료뭉치 하나면 소 50마리의 한 끼 식사가 된다고 한다. 논에서 볏집과 이삭이 사라지면서 야생동물에게 비상이 결렸다. 먹을 것이 없어져 생존을 위협받게 된 것이다. 남겨주는 미덕이 그리운 세상이다. 힘든 시절, 아버지 밥상을 곁눈질하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남기신 밥 한 숟갈도 이를테면 이삭이 아니었을까.
곤포 사일리지를 먹는 소도 옛날을 그리워할 성 싶다. 작두로 볏집을 썬 다음 콩깍지와 쌀겨를 섞어 쇠죽을 끓여 소를 먹이던 시절, 마굿간에서 쇠죽을 끓이면 소가 냄새를 맡고 혀를 내둘리면서 침을 흘렸다. 소죽을 퍼주면 맛나게도 먹던 황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논두렁에 콩을 심어놓았다. 내가 농사를 지을 때도 논두렁콩을 심었다. 식량 자급자족을 외치던 시절이었다. 돔부콩을 드문드문 넣어 햅쌀로 밥을 하면 고소한 쌀밥 속에 섞인 포근포근한 콩이 부드럽게 입에 씹혔다. 자르르 기름기가 흐르던 햅쌀밥을 생각하면 입에 침이 고인다.
한 농부가 달구지에 깻단을 싣고 느릿느릿 걷고 있다. 푸른 가을 하늘, 달구지에 깻단을 싣고 소 코뚜리를 붙잡고 집에 돌아가는 농부의 모습. 한 폭의 그림이다. 우리가 살아왔던 추억이 북녘 땅에 저렇게 고스란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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