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북한방문 10일째 이야기<16>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6년 06월 03일(금) 11:41
다시 차를 돌려 나와 길을 올라가는 도중, 학교를 파하고 걸어오는 초등학교 여학생에게 길을 물었다. “이 길로 쭈욱 올라가면 황진이 묘가 나옵네다” 똑똑하게 가르쳐준다.
‘황진이 묘’ 라는 푯말이 길가에 서 있다. 운전사 방동무에 의하면 이곳이 개성에서 15㎞쯤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차에서 내려 낮으막한 언덕을 올라가 황진이 묘에 당도했다. ‘보존유적 1543 황진이 묘’ 표지석이 서있다. 표지석 한 칸 위 묘 바로 앞에 ‘명월 황진이의 묘’라는 비석이 세워져있고, 그 뒷면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있다. “십륙세기의 이름난 녀류 음악가, 시인. 천오백십륙년 개성에서 황진사의 딸로 출생.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리웠다. 당대의 민간음악과 시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세를 풍미했던 기녀 황진이. 사람은 누워있지만 시 한 수가 남아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어른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오래 전 학교에서 배웠던 시 한 수를 읊으며 송학소주 한 잔을 올렸다. 묘에 술을 뿌리고 나도 황진이를 생각하며 음복을 하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숨차게 올라온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토바이로 달려 왔다고 한다. 개성시 민족유산 보호관리소 현장기사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바람이 세서 오느라 꽤 애를 먹었다고 하기에, 황진이 묘에 잠깐 들려 인사나 하고 가려했는데 이렇게 수고스럽게 오셨냐고 내가 화답했다. 황진이 묘에 관해 제대로 알려드리는 것이 자기의 임무라고 웃으며 얘기한다.
이 무덤에 황진이의 뼈가 묻혀있는 게 맞냐고 물었다. 실제 뼈를 묻은 것은 아니고 옛 사람들로부터 전해오는 말을 참조하여 이곳에 가묘를 만들었단다. 기록에 의하면 황진이가 “나는 죽어 묻힐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니 아무데나 버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안내원을 따라 묘 아래쪽으로 오솔길을 내려갔다. 널찍한 바위가 나타난다. 안내원이 그 중 움푹 파인 곳을 가리키며 입 우물, 여성의 옹달샘이라고 설명한다. 말을 듣고 다시 보니, 바위에서 생수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데 그 모형이 여성의 생식기를 제대로 닮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셔왔다고 한다. 죽을 무렵에 이 바위 위에서 백 번째 남자를 맞아 정사를 나누었고, 이 부근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고 했다.
널찍한 바위 중앙에 주의사항을 써 붙여 놓았다. “1. 황진이 우물과 주변을 위생 문화적으로 잘 관리하여야 한다. 2. 보존구역에서 집짐승을 방목할수 없다. 3. 보존구역내에서 나무도벌과 일체 불놓는 것을 금지한다.”
황진이는 1516년생인데 죽은 날짜는 알 수가 없고, 40대쯤이 아니었겠는가 짐작할 뿐이란다. 이 묘는 2000년 5월에 완성했다고 한다. 기사가 똑똑하고 사명감이 넘친다. 서른 살이란다. 자칫 밋밋할 뻔 했던 일정이 젊은 기사님 덕택에 훨씬 생동감 있는 방문이 되었다.
황진이 묘를 떠나면서 임제(林悌)가 지었다는 시 한 편이 생각났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 /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황진이를 그리워하던 그가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가는 길에 그녀의 묘 앞에서 지었다는 노래다. 그런데 그는 결국 이 일로 파면을 당했다.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임종을 맞으면서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선죽교, 살아있는 충절
개성으로 나오는 길에 인삼밭이 보이는 마을 앞에서 잠깐 멈췄다. 그 유명한 개성인삼을 어떻게 재배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2009년과 2011년, 걸어서 국토종단과 국토횡단을 할 때 전국적으로 인삼을 제배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동안 남쪽에서는 금산, 풍기지역 정도가 인삼재배지로 이름이 있었는데, 남쪽 끄트머리로부터 강원도 휴전선 부근까지 인삼밭이 없는 곳이 없었다. 대규모 인삼재배를 하는 모습이 전국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길가 둑 건너편에 자그마한 인삼밭이 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워낙 인삼으로 유명한 지역이니 다른 곳에 대규모 재배단지가 있지 않겠나 싶지만, 저 인삼밭은 관리가 제대로 되는 것 같지 않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는데 ‘제대로 좀 하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안타깝고 좀 속상하다.
농가 지붕 위에 깻단을 말리고 있다. 호박넝쿨이 지붕을 타고 올라가고, 노랗게 익은 호박이 넝쿨 속에 숨어 궁둥이만 내 놓고 나뒹구는 모습이 보인다. 노오란 호박을 따다가 호박떡을 해먹으면 참 맛있겠다. 동네 앞에 아이들이 나와 놀거라 기대했는데 아이도 어른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선죽교에 도착했다. 한석봉이 친필로 쓴 ‘善竹橋’ 표식비가 서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적으로 등록되었다는 표지가 함께 서있다. 원래는 ‘선지교’였는데 정몽주가 이성계의 정권 탈취를 반대하다가 이 자리에서 죽은 다음 참대가 솟아나 ‘선죽교’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때 그 다리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선죽교 다리 바닥과 난간에 핏자국이 선연하다. 신기하다.
이방원의 ‘하여가’에 ‘단심가’로 답할 수밖에 없었던 충신. 역사 속에 시퍼렇게 살아있는 선비의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죽교 밑으로 냇물이 무심히 흐르고 있다.
박연폭포에 들다
박연폭포를 향해 출발한다. 개성을 떠나 고속도를 타고 가다가 오른쪽으로 12㎞쯤 산길을 들어가면 도착할 거라고 한다. 산골 마을을 지나간다. 강냉이를 길가에 말리고 있다. 강냉이 수확은 9월이면 완료 된다고 한다. 강냉이 대가 밭에 그대로 서있는 모습도 보인다. 우선 열매를 따내고 대는 아직 세워둔 모양이다. 학교를 파하고 가던 여학생 두 명이 우리를 보더니 꾸벅 인사를 한다. 손을 흔들어 주었다.
천마산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니 박연폭포가 보인다. 가뭄이 심하다더니 떨어지는 폭포의 물이 많지 않다.
“한줄기 긴 물줄기가 바위에서 뿜어나와 /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황진이가 지은 박연폭포는 ‘폭포수가 백 길이 넘고 물소리가 우렁차다’는데, 지금 물줄기는 가까이에서 겨우 보일정도다. 그렇지만 단풍이 물들어 가는 주변 경관과 어울려 그대로 아름답다. 폭포의 높이는 20m 정도다. 금강산의 구령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폭포로 불리운다고 했다.
폭포 이름이 박연으로 된 전해오는 얘기가 있단다. 옛날 박 진사란 사람이 못 위에서 피리를 불었단다. 그 소리에 반한 용녀가 박진사를 데려다 남편을 삼았는데 그런 연유로 이름이 박연이 되었다고 한다.
폭포 주변 바위에 여러 개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김 아무게, 이 아무게... 저렇게 높은 곳에 이름을 새기려면 꽤 높은 사다리를 동원했을 성 싶다. 이름을 남기려는 인간의 본능이다. ‘양반들의 행태’ 라고 김 참사가 한마디 거든다.
결혼식 커플이 폭포 앞 넓적한 바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고 있다. 이름 있는 명소엔 예외 없이 신랑 신부가 보인다. 바로 위 높은 언덕에 정자가 서있다. 경치 좋은 이곳에 정자가 없을 수 있겠는가. 폭포 주변 자갈밭에 앉아 준비해간 도시락을 먹었다. “생명 위험, 물에 들어가지 말것!” 푯말이 세워져있다.
주위를 거닐다가 소풍 나온 일행을 만났다. 7,8명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놀러 왔다고 한다. 칠면조고기를 구워 안주 삼아 얘기하는 중이었다며 한 잔 하고 가시라고 붙잡는다. 못 이긴 척 자리에 끼어 한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술 인심 밥 인심은 남이나 북이나 이렇게 똑 같이 푸짐하다. 남쪽에서 걸어서 국토종단을 하던 중, 나그네를 불러 술과 밥을 먹여 보내던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
걸어서 오솔길을 내려와 주차장 부근에서 아주머니를 만났다. 안내원이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말문이 트였다. 남쪽 사람들이 많이 오던 때, 황진이 묘에서 안내를 맡았다고 한다. 화담선생 묘는 물론 박지원의 묘에 대해서도 환히 꿰뚫고 있다. 화담 선생 묘 바로 아래쪽에 선생의 고모를 비롯 일가친척의 묘가 많이 있고, 그 아래 저수지는 송도 저수지라고, 그리고 그 바로 아래 한석봉선생의 필체로 쓴 비석이 있는데 그걸 못 보았냐고 물어본다. 아깝다, 는 말이 절로 나온다. 역시 아는 만큼 보게 되는 모양이다
황진이 묘 아래 있는 바위와 관련하여 ‘한 몸을 더 해서 100사람을 채웠다’ 는 얘기를 꺼낸다. 남쪽에서 온 관광객 하나가 거기서 웃기는 짓을 했던 기억이 있다며, 피식 웃는다.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보려다 낯부끄러운 일인 듯싶어 그만 두었다.
박지원의 묘에 대해 물었더니, 그 묘에는 실제로 박지원과 그 아내의 시신이 묻혀 있다고 한다. 본인이 직접 참관하여 눈으로 보았다고 했다. 그는 80까지 살았던 분이고, 96년도에 봉분을 완성했다고, 쭈욱 꿴다.
성불사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하니 그곳 샘물을 마셔보았느냐고 묻는다. 안 마셨다고 했더니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성불사는 우물이 셋 있단 말입네다. 남자중 샘물, 여자중 샘물, 아기중 샘물이란 말입네다. 그런데 기중 여자중 샘물이 가장 맛있단 말입네다.” 진즉 알았더면 샘물을 마셔보았을 텐데 아쉽다고 했더니, 또 따라서 웃는다.
이곳 박연폭포는 사철 아름답지만 계절마다 아름다움의 특징이 있고, 특히 겨울철에 얼음고드름의 모습은 천하 절경이라며, 다음에 한 번 겨울에 꼭 들리시라고 말을 맺는다. 신복순 안내원이다. 그 분을 통해 송도 3절에 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4시30분 평양을 향해 출발. 길 따라 나뭇짐을 이고 지고 가는 사람들이 보이고, 군인들이 행진하는 모습도 스쳐지나간다. 산골 계단식 논도 추수를 끝냈다. 올해는 비가 많이 부족했다는데 평년작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어제와 오늘 600킬로미터를 달렸다고 운전사 방동무가 얘기한다. 7시30분 어둑 무렵 평양 도착. 저녁밥을 먹고 나니 10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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