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북한방문 11일째 이야기<18>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6년 06월 17일(금) 11:53
시중호 부근 휴게소에 잠깐 들렀다. 휴게소 뒷문을 열고 바닷가로 나가니 모래사장이다. 천혜의 해수욕장이다. 넒은 모래밭을 5분정도 걸어가니 “섯!, STOP!” 사인이 서 있다. 둘러보아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초소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푯말 하나가 발길을 붙들어 맨다. 저 푯말을 무시하고, 어쩌면 모르고 넘어갔던 여인이 총에 맞아 숨진 불행한 사건 때문에 금강산 관광이 무산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휴게소 복도에 ‘녀자 샤와실(FEMALE SHOWER)"이라는 사인이 붙어있다. 남한과 북한이 표기법이 다르다.
통촌을 지나간다. 통천군은 현대그룹 (고)정주영 회장의 고향이다. 그는 1915년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호 ‘아산’은 고향 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거라고 했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 소학교를 졸업한 것이 학력의 전부였던 사람. 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집을 나가,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현대왕국을 건설한 사람. 그가 태어난 마을은 어디쯤일까 궁금했었다. 도전과 응전으로 엮어지는 삶의 치열함을 몸소 가르쳐준 그 분을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겠지만. 나 역시 중학을 졸업하고 농사를 짓다가 스물한 살에야 고등학교에 진학한, 쉽지 않았던 내 삶에서 그는 오랫동안 나의 멘토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방북 때 꼭 그의 고향마을을 방문하고 싶었다.
방문 전부터 정주영회장의 고향을 방문하고 싶다고 관계자에게 말해두었는데 금강산 가는 길에 통천을 지나게 되니 그 때 보자는 대답을 들었다. 소월의 고향 영변, 그리고 문선명 통일교 창시자의 고향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소월의 고향을 찾고 싶었고, 당대에 전 세계인을 아우르는 종교의 성을 이룩한 문선명 교주의 고향도 방문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답변을 아직 듣지 못하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통천군 소재지를 지나치는 것을 보고 나서 김 참사에게 정주영 회장의 얘기를 꺼내자, 그제야 생각난 듯 길가에 차를 세운다. 그리고 길을 걸어가던 한 아주머니를 붙들고 정주영 회장의 고향마을이 어디쯤 있냐고 묻는다. 그녀가 뭐라고 답변을 하는 모양인데 시간이 어중간하니 오는 길에 들리면 어떻겠냐고 내 의견을 묻는다.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이삭 줍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을이면 저렇게 흘린 이삭을 줍는 일은 노인이나 아이들 몫이었다. 초등학생 때, 전체 학생들이 동원되어 들판에 나가 한 줄로 서서 이삭을 줍기도 했다. 사람이 줍고 남은 것은 새나 들짐승이 먹었다. 이를테면 상내림인 셈이다.
이삭 줍는 모습을 보니 밀레의 그림 ‘이삭줍기’ 도 생각나고 ‘만종’도 떠오른다. 해을녘 하루 일을 끝내고 부부가 작은 감자바구니를 놓고 교회당 종소리를 들으며 정중히 감사 기도를 올리는 그 모습. 많은 사람들이 ‘만종’을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그림은 애초에 애초에 관이 그려져 있었는데 덧칠하여 없애버렸다 한다. ‘수확에 감사하는 부부’가 아니라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부부’로 보는 게 옳다는 주장이다. 과학적 방법으로 규명된 사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식을 잃고 슬픔에 겨워 기도를 드리는 모습으로 그림의 의미가 대폭 달라진다. 슬픔 보다는 평화와 안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금강산 도착
금강산 입구 검문소에 도착했다. 주민들이 대기하고 있다. 휴전선이 멀지 않으니 DMZ안에서 농사를 짓는 주민들도 저렇게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 모양이다. 남한에서도 민통선 안에서 농사를 짓는 분들이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농사일을 할 수 있는데, 그 때마다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금강산 참관 접수 사무실에 도착했다. 김 참사가 접수하러 사무실로 들어간다. 금강산관광 안내표지를 보니 만물상15달러, 만폭동20달러, 삼일포10달러, 해금강10달러...로 관광 요금이 매겨져있다.
마을 아파트가 바로 앞에 보인다. 삼일포 9㎞ 금강37㎞라는 푯말이 서있다. 군인 두 명이 길가에 보초를 서고 있고, 아이들이 학교를 파했는지 엄마가 아이의 백팩을 대신 메고 작은 아이의 손목을 잡고 걸어가는데, 큰 녀석은 깡총거리며 내 앞을 지나간다.
몇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온다. 농사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가 보다. 자전거 뒤에 농사 수확물을 그득하게 실었다. 곡식이나 고구마 종류인 모양이다. 언덕이라 내려서 천천히 자전거를 끌고 간다. 자루에 넣은 수확물이 무거워 바퀴가 터져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여자 세 명, 남자 한 명이다. 아주머니들의 억척은 알아주어야 한다. 한 명은 아가씨인지도 모르겠다. 한국 여인들, 여자 축구나 양궁 그리고 세계 여자골프를 장악하고 있는 한국 여인들을 보면 우리 여인들의 DNA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주머니가 리어카에 물통을 싣고 간다. 물을 길러 오는 모양이다.
한 아주머니가 리어카에 물통을 싣고 간다. 물을 길러 가는 걸까, 제법 묵직하게 밀고 가는 모습을 보니 물을 길러 오는 모양이다. 옛날, 마을 공동 우물터에서 물을 길러다 먹던 시절이 생각난다. 아가씨는 샘에서 바가지로 물동이에 물을 퍼 담은 후, 바가지를 물동이에 엎었다. 그리고 나서 머리를 흔들어 두 손으로 쓰다듬어 뒤로 넘긴 다음, 또아리를 머리 위에 얹고 줄을 입으로 물었다. 조심스레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나서 한 손은 동이를 잡고 한 손으로 흐르는 물방울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모아 흩뿌리며 걸어가던 아가씨의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두둥, 두두둥” 바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지는 해를 뒤로 긴 그림자를 남기며 하늘하늘 물동이를 이고 가던 여인의 뒤태를 보며 가슴 두근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그런 풍경은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산천은 아름다운데 밤이 되니 적막하다

오늘 저녁 숙소는 ‘금강산 가족호텔’이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언덕위에 서있는 건물이다. 현대에서 지었다는데 시설이 훌륭하다. 하룻밤 요금이 $150. 호텔 앞으로 호수처럼 항구가 자리 잡고, 오른쪽 저만치 현대에서 만들어 놓은 해상 호텔이 바다 위에 떠있다. 항구를 빙 둘러 마을이 자리하여 크고 작은 건물들이 저녁 햇살을 받아 가까이 보인다. 바다를 배경으로 해질녁 금강산 전경이 아름답다.
방을 정한 다음 온천을 갔다. 온정리 금강산 온천이다. ‘온정(溫情)’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옛날부터 이 지역은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온천은 37-40도를 유지하며 신경통, 심장병, 고혈압, 관절염 등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2003년 속초에서 여객선 ‘설봉호’ 를 타고 3박4일 일정으로 금강산 관광을 왔었는데, 그 때 그 온천장이다. 목욕 요금은 개인탕 7달러, 공중탕은 5달러다. 요금이 옛날에 비해 좀 내렸다. 그 때는 한 번에 12달러, 이틀 분을 사면 20달러였다. 관광객이 대부분이다. 손님은 많지 않다.
목욕을 끝내고 식당을 찾았다. 시내가 깜깜하다. 자동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관광객 몇이 선물가게 앞에 서성일 뿐, 식당도 개점휴업 상태다.
금강산 관광은 1998년 11월 속초에서 금강호가 출항함으로써 시작됐다. 금강호가 드나들던 장진항은 군항이었다. 금강산관광을 위해 북측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명령으로 잠수함기지를 후방으로 옮겼다. 언급했듯이 개성공단도 건설이 시작되면서 군을 후방으로 이동했다.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이 남북한 간 충돌을 방지하는 평화사업이 된 셈이다.
2003년 미국에서 금강산 관광을 위해 필자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도처에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선물가게나 식당, 서커스 장도 줄을 서서 사람들이 기다렸다. 지금은 적막하다.
금강산 관광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윈윈의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의 동질성 회복이 급선무다. 왕래와 교류, 상호협력이 필수적이다. 금강산 관광이 그것을 위해 적잖은 기여를 해왔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금강산 관광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그리고 통일을 대비한 좋은 선택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 된다면, 현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통일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정책도 그와 맞물려 시너지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별금강’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한 끼 5달러. 깜깜한 길을 따라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손님도 우리일행을 비롯한 몇 사람뿐인 것 같다. 내일은 금강산을 오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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