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북한 방문 12일째 이야기<19>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
2016년 06월 24일(금) 14:16 |
밖에 나와 보니 아침 해가 고성만을 비추고 있다. 조용하고 평화스럽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 물결이 햇빛을 받아 은빛 비늘로 반짝인다. 금강산 연유 공급소가 보인다. 어제저녁엔 어두워서 보지 못했다. 몇 년째 저렇게 방치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멀리 바라보이는 큰 바위에 무슨 글씨가 보여 자세히 보니 ‘천출명장 김정일 장군’이라고 새겨놓았다. 그러고 보니 9년 전에도 이 부근에서 저 바위를 보았다. 김 참사가 떠나야 할 시간이라고 재촉한다. 금강산관광 접수사무실에 들러 안내원을 태우고 가야한단다.
금강송 숲 지나 만물상 입구 이르다
어제 들렀던 사무실이다. 김 참사가 사무실로 들어간 다음 밖에 나와 서있는데 네댓 살쯤 되는 꼬마아이가 아장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백팩을 등에 메고 학교에 가는 모양이다. 학교에 가니, 물어도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다. 이름이 뭐니, 나이는, 말을 붙여보고 싶은데 시선을 내리깔고 묵묵부답이다. 사진하나 찍자 응, 하고 얼르니 빤히 쳐다보고 경계하는 눈빛이다. 길가 젊은 분의 얼굴을 쳐다본다. 동의를 구하는 모양이다.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이 마을 아이인데 학교가 바로 저기라고 한다. 할머니가 기르는 아이라고 얘기해준다. 젊은 아가씨가 차에 오른다. 윤옥심이라고 본인을 소개한다. 고성군 온정리 이 부근이 고향이란다. 매일 관광객과 함께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안내원이 젊은 사람이어야만 할 성싶다.
요즈음도 관광객이 꾸준하냐고 물었다. 예전처럼 많지는 않아도 매일 손님을 모시고 산에 오른다고 한다. 작년에는 부근 바다에서 고기가 엄청 많이 잡혔다고 자랑을 한다. 전에 속초에 갔을 때 명태가 잡히지 않는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무슨 고기냐고 물었더니 어종은 잘 모르겠단다.
안내원이 금강산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금강산은 원래 여름에 부르는 이름이고 봄에는 봉래산, 가을엔 풍악산, 그리고 겨울엔 개골산으로 이름이 바뀐다 한다. 봄가을로 ‘금강내기’라는 강한 바람이 불어 가을단풍이 나무에 오래 붙어있을 수가 없다고 설명한다. 영어로 금강산을 어떻게 표기하느냐고 물었더니 “Diamond Mountain”으로 번역된다고 한다.
차 안에서 안내원이 혹시 “망장천 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냐”고 묻는다. “망장천(忘丈川), 잊을 망(忘), 지팡이 장(丈), 내천(川)으로 쓰는데요”하면서 얘기를 계속한다. 옛날에 나무꾼 할아버지가 나무를 끝내고 내려가려다 목이 말라 물을 마셨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가 청년이 된 할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네요. 음, 할아버지가 마신 물이 회춘의 물이었답니다. 할아버지 말을 듣고 할머니가 샘물을 마시러 갔는데, 여자가 남자보다는 욕심이 좀 많지 않나요. 그 물을 많이 마셨더랍니다. 할머니가 하도 오지 않아서 가보니 어린 여자 갓난애가 울고 있어서 업어서 집으로 데려왔더랍니다. 선생님, 재미있으십니까, 하고 묻는다. 만물상 내려오는 길에 회춘하는 샘물이 있으니 조금만 마셔야 합니다, 농담을 건넨다.
산길을 올라가는데 소나무 숲을 지나간다. 아름드리 소나무다. 이 부근에는 소나무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미인송이 많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금강송이다. 궁궐을 짓거나 국가적 건물을 지을 때 베어다 쓰던 나무라했다.
잘 보이는 바위 여기저기에 지도자 동지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2003년에 왔을 때, 저런 모습을 보며 함께 산을 오르던 경상도 분이, “이리 좋은 산에 저게 뭐꼬” 한 마디 하시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잠자코 있자 “기 안능교” 동의를 구하던 모습까지도 생생하다.
금강산 비로봉이 1,639m, 우리가 올라갈 만물상 천선대가 936m라고 한다. 꼬불꼬불 좁은 길을 따라 사람들이 자전거에 곡식을 싣고 힘들게 올라간다. 원래 이 길이 금강산을 넘어 가는 군사도로로 만들어진 길이었는데, 현대에서 관광도로로 개보수를 했다고 한다.
만물상 등산로 입구에 도착. “금강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큰 글씨 아래 ‘주의사항’ 다섯 가지가 한글, 영어, 한자 3개 국어로 쓰여 있다. 1. 금강산의 자연 경치에 손상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2. 등산로정에서 벗어나면 위험할 수 있으므로 조심하십시오. 3. 담배, 라이터 등 화재요소가 있는 물건들은 휴대하지 말아주십시오. 4. 등산로정과 환경이 오염되지 않도록 깨끗이 거두어 주십시오. 5. 금강산해설원들의 안내에 따르며 신상에 이상이 생기면 즉시 연락해 주십시오. 바로 곁에 ‘만물상 등산로 안내지도’가 나란히 서있다. 거리는 2.6㎞, 걸리는 시간은 3시간 30분 정도라고 한다. 제일 꼭대기 천선대를 다녀올 예정이다.
만물상 천선대(天仙臺)
골짜기를 올라가기 시작한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선지 등산객은 우리일행 뿐이다. 예년 같으면 골짜기에 물이 좋은데 올해는 가뭄이 심해 저렇게 물이 말랐다고, 제 탓이나 된 것처럼 안내원이 미안해한다. 그래도 아래쪽은 완전히 마르지는 않아 곳곳에 작은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다. 오르는 길 군데군데 돌계단을 놓았고, 가파른 곳은 나무 손잡이를 설치해 놓았다.
길이 가파르다.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올라갈수록 더 가파르다. 바위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과 나무, 그리고 산새들의 지저귐 속으로 나 또한 자연이 되어 걸어간다. 금강산 구경은 험산을 오르는 등산에 비견할 수 있으니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오시라는 얘기를 덧붙여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안내원은 길을 올라가면서 곳곳에 바라보이는 바위를 가리키며 거기 얽힌 얘기를 풀어 놓는다.
‘서리 맞은 단풍은 2월의 꽃보다 붉다’고 누가 말했던가. 발갛게 물든 단풍이 잠시 쉬어가라 옷소매를 붙든다. 높은 곳은 철제 사다리를 만들어 길손의 수고를 덜어주고 있지만 그만큼 험하다.
숨이 턱에 오르기를 여러 번, 드디어 천선대(天仙臺)에 올랐다. 하늘나라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바람이 세다. 신선의 땅에 사람이 발을 붙인 게 못 마땅했을까, 모자를 벗겨가 버린다.
건너다보이는 곳이 만물상이다. 세상의 온갖 물상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문자 그대로 만 가지 물상(萬物象)이 한데 모여 있는 곳이다.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과 상상에 따라 천태만상으로 달라 보인다. 시간은 조작가다. 비바람을 빌려 거죽을 긁어내고, 테두리를 지우면서 작품을 만들어간다. 한 점 일 획 더 할 수도 덜 할 수도 없는 경지에 들어선, 저 깎아지른 만 가지 모양의 바위를 보라. 위대한 조각가의 저 걸작을 보시라. 금강산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경치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첩첩이 산이다. 멀리 산봉우리엔 구름이 쉬어가고 실안개가 골짜기를 휘감아 돌고 있다. 어쩌면 산들은 저렇게도 절묘한 높낮이로 균형을 이루어 서 있을까. 휘휘 사방을 다시 둘러본다. 아름답다. 암석과 계곡, 봉우리와 함께 계절의 아름다움까지 어우러져 절경을 뽐내고 있다.
이 높은 곳 바위 여기저기에 박 아무개 이 아무개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엊그제 박연폭포 바위벽에 새겨진 풍경들이 생각난다. 이름을 남기고 싶은 사람들의 허망한 욕심이다.
천천히 계곡을 내려온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문이 나있다. 바위 사이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한 모금에 10년이 젊어진다는 샘물이 기다리고 있다. 이 높은 바위틈에서 어떻게 물이 나올 수 있는지 신기하다. 내려오면서 올라오는 사람들 두어 그룹을 만났다.
천천히 내려오면서 음미하는 풍치가 그만이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단풍” 이렇게 고은 시인의 시를 바꿔 써야 할 성 싶다. 가을 단풍과 바위와 계곡이 어울려 금강산 가을 경치를 맘껏 뽐내고 있다.
내려와 보니 기념품 파는 가게가 전을 벌려놓았다. 아침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다. 사람들 몇이 주위에 서서 물건을 살펴보고 있다. 대부분 수공예품이다.
해금강, 그리고 쪽빛 바다
온정리 관광단지에 내려왔다. 쓸쓸하다 못해 적막하다. 그 볶닥 거리며 붐비던 거리에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해금강 쪽으로 가는 중이다. 속초 68㎞ 사인이 보인다. 길 양쪽을 따라 녹색 철망이 서있다. 남쪽으로 통하는 금강산 여행길이다. 이 길을 이용하여 수많은 금강산 관광객이 오갔는데 지금은 이렇게 조용하다. 길에 자동차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뒷자리에 함께 앉은 안내원과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버지는 교원이고, 어머니는 장사를 하고 있단다. 동생은 올해 중학 졸업반으로 열여섯 살인데 자기보다 더 곱다며 동생 자랑을 한다. 졸업 후 군인 지원할 예정이라고 묻지도 않는 얘기를 하는 걸 보니, 북에서는 아이들이 남녀를 불문 군인 지원하는 걸 굉장한 자랑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지난번 사리원에서 만났던 아이들도 그랬으니까.
본인은 원산 교원대학을 졸업한 다음 안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에는 교원대학과 사범대학이 있는데 교원대학은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남한의 교육대학에 해당하는 학교였다. 학교 선생을 하지 않고 왜 안내원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쪽 일이 더 재미있다고 웃으며 답한다.
해금강 앞 검문소에 도착했다. 절차가 까다롭다. 무장한 군인 둘이 한참 이곳저곳 연락을 취하더니 통과 시킨다. 최전방이라는 사실이 실감난다.
숲길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이르렀다. 해금강이다. 쪽빛 바다, 라고 하더니 저런 색깔이 쪽빛인가 싶다. 푸르디푸른 바다, 올망졸망 작은 섬들이 수반 위에 떠 있는 풍경, 어느 쪽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도 한 폭의 그림이 될 성 싶다.
운전사 방 동무가 잠깐 나갔다 오겠다더니 연어 한 마리를 구해왔다. 인근 낚시꾼으로부터 차에 실어두었던 소주 두 병을 주고 교환해 왔다고 한다. 꽤 큰놈이다. 이 계절에 동해바다에서 연어가 잡히리라곤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점심을 부근 음식점에 부탁했으니 금방 가져올 거라고 한다. 출발 전, 방동무가 평양 가게에서 소주 몇 병을 사자하여 차에 실었는데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그랬었나 보다.
연어를 보니 오래 전, 알레스카 여행 중 연어낚시를 했던 생각이 난다. 7월이었는데 산 중턱에 눈이 쌓였고 백야현상으로 밤 12시도 어슴프레 밝았었다. 오후 시간에 자작나무 숲 부근 강가에서 낚시를 했다. 강가에 띄엄띄엄 서서 낚시줄을 드리우고 있다가 고기가 물면 “fish on"하고 소리쳤다. 연어는 크고 힘이 좋아 끌어 올린 다음 옆 사람의 협조가 필요해서 그렇게 한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초짜들은 퍼덕거리는 고기를 놓쳐버리기 일쑤였다. 아, 그런데 소주 안주로는 연어 보다 역시 광어였다. 알라스카의 광어는 특별했다. 박세리 선수가 맨발의 투혼으로 LPGA US OPEN 챔피언컵을 들어 올리는 경기를 알레스카에서 보았으니, 10년도 훨씬 전의 일인가 싶다.
김 참사, 방 동무, 그리고 점심을 준비해 온 아주머니랑 함께 자리에 앉았다. 연어 한 마리를 썰어놓으니 한 상 가득이다. 푸짐하다. 연어는 원래 부드러운 고기다. 연어를 초고추장에 찍어 상치에 싸고 마늘 고추를 얹어 한입에 넣으니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출렁이는 동해바다, 해금강 경치를 바라보며 소주 한 잔을 곁들이니 그 맛이 또한 일품이다. “한 잔 먹세 그려 / 또 한 잔 먹세 그려 / 꽃 꺾어 산 놓고 / 무진 무진 먹세 그려…” 옛 선인의 시 한 수가 저절로 읊어진다. 좋은 친구와 함께 이 자리에 또 와서 이렇게 한 잔 다시 먹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운전사 방 동무 덕분에 특별한 점심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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