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정 활쏘기에 대한 斷想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
2016년 06월 24일(금) 14:25 |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면서 살자면 이러한 예(禮)가 질서의 바탕을 이룰 것이다. 윗물도 흐리고 아랫물도 흐려져 세상이 막가는 것처럼 어수선한 생각이 들 때면 나는 활쏘기 마당인 열무정을 찾아간다.
열무정은 영암 생활체육의 산실인 스포츠 테마파크에 현대식 한옥으로 거듭 태어난 아름다운 활터이다. 그곳에서 영암의 궁도인들이 해 뜰 무렵이면 스스로 활과 화살을 다듬고 145m의 과녁을 향하여 읍양진퇴(揖讓進退)의 예를 갖추는 곳이다. 해질 무렵이면 사원 간에 편사(便射) 경기를 통하여 궁력(弓力)을 기르고, 끝나면 더불어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통하여 우의를 돈독히 다지며, 나누는 아름다운 문화로 수년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활쏘기는 수렵도구로 사용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생활스포츠로 행하여지고 있으며, 전국체육대회의 국궁(國弓) 종목으로 채택되어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한(漢)나라 유자(儒者)에 의하여 2천500년 전에 지어진 예기(禮記)의 사의(射儀)편에 의하면 “옛날에 제후의 활을 쏨에는(古者諸侯之射也) 반드시 먼저 연례를 행하였다(必先行燕禮), 경대부의 활을 쏨에는(卿大夫士之射也) 반드시 먼저 향음주례(必先行鄕飮酒之禮)를 행하였다” 라는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1477년(성종8)에 성종이 성균관에 나아가 예(禮)를 행하고 명륜당에서 과거를 본 뒤 사단에서 대사례(大射禮)를 행한 것이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것이다. 1534년(중종 29)의 기록을 보면 임금이 학궁에 행차하여 몸소 제사를 지내고 대사례를 지낸 뒤, 유생들로 하여금 대궐 뜰에서 따로 잔치를 벌이게 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1743년(영조 19), 1764년 등에 시행한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초기에 향촌사회에 유교적 풍속을 확립하기 위한 방안으로 향음주례와 함께 향사례(鄕射禮)의 시행이 국가적으로 권장되었다.
이러한 유래로 열무정은 활쏘기를 통해 예(禮)를 중시하며 활을 보낸다. 활터의 일상은 활은 내는 것이고 그 시작은 초시례(初矢禮)로 비롯된다. 사대(射臺)에 서서 그날의 첫 살을 내는 자기 차례가 돌아오면, “활 배웁니다.”라고 과녁을 향해 인사를 드린다. 그러면 옆의 사우들은 “많이 맞추십시오.”라고 답해 준다. 한 번 사대에 나갈 때마다 다섯 발의 살을 갖고 나간다. 한 번 사대에 나가서 치르는 경기를 일순(一巡)이라고 한다. 한 순에 가져간 다섯 발 모두를 맞추면 몰기가 되고 이 때 몰기를 한 사원(射員)은 과녁을 향해 정중히 머리를 숙이면서 인사를 하여야 한다. 그러면 옆의 사우들은 “축하합니다.”라고 격려를 해 준다.
활터에 와서 처음 활을 배우면서 기본기 수련을 마치고 집궁을 하게 되면, 집궁례(執弓禮)를 올려야 하고, 처음으로 자기가 쏜 화살이 과녁에 관중이 되면 관중례(貫中禮)를 올리게 된다. 첫 관중이 되면 ‘1중례(一中禮)’를 올리게 되고, 차례로 2중례(二中禮), 3중례(三中禮), 4중례(四中禮), 그리고 다섯 발 모두를 맞추게 되면 몰기례(沒技禮)를 올린다. 이처럼 활쏘기는 남을 배려하고 자기를 낮추는 읍양진퇴(揖讓進退)을 통하여 예법을 익힌다.
이는 자기 수양과 덕을 행하기 위한 마음과 몸가짐일 것이리라. 2016년 생활체육 궁도교실을 운영하면서 영암의 궁도인 뿐만 아니라 모든 군민들이 자기의 수양과 덕을 실천하기 위한 평생 학습의 도장으로 삼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열무정의 사대에 서서 활을 시위에서 어질게 당겨보는 그런 날이 오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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