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석(七夕)날 국어시간 풍경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
2016년 07월 22일(금) 14:37 |
선생님은 견우와 직녀 등을 얘기하며 칠석의 유래를 설명하셨다. 그런 다음 창문을 열어젖히며, "봐라, 까막 까치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오작교를 만들러 은하수로 날아갔기 때문이다."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칠석날은 잊더라도 잊어서는 안 될 한 가지 일이 있다. 오늘은 논개의 제삿날이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시 한 편을 칠판에 써 내려 가셨다.
'거룩한 분노는 / 종교보다도 깊고 / 불붙는 정열은 / 사랑보다도 강하다 /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이 시는 수주(樹州) 변영로 선생이 '논개'를 예찬하여 지은 것이다. 정유재란 때 10만이 넘은 왜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당하면서 무고한 조선 백성 수만 명이 참살 당했다. 전승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논개가 술 취한 왜장을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졌다.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우리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던 젊은 국어선생님의 모습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이 글을 쓰면서 논개와 관련된 기록을 들추어 보았다.
주논개(朱論介)는 1574년 전라도 장수현 용내면에서 진사 주달문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선비집안의 규수였지만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서울을 빼앗기고 전라도 지역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최경회가 의병장으로 나섰다. 경상도에서 진주성만이 남아 왜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최경회는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원하여 싸웠으나 28일만에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했다.
1593년 칠석날, 일본군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했다.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졌다. 당시 그녀의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역사를 거슬러 당시의 참상을 눈앞에 그려본다. 관군과 의용군을 포함하여 참살당한 백성 6만여구의 시체가 나뒹구는 처참했을 진주성의 모습을. 참담했던 조선반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논개의 이야기는 절망하던 백성에게 한줄기 빛이 아니었을까. 그 시대, 열아홉 논개의 의로운 죽음은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 의거에 못지않은 사건이었다.
다음달이 다시 광복절이다. 음력 칠월 초이레, 칠석이 함께 온다. "칠석날은 잊더라도 '논개'의 제사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눈을 부릅뜨고 말씀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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