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과 떠나는 북한여행

북한 방문 15일째 이야기<25>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6년 08월 19일(금) 15:24
평양을 향해 출발한다. 여기서 평양까지는 189㎞, 자동차로 두 시간쯤 걸린다고 한다. 금강산과 함흥이 각각 131㎞인데 역시 두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고 한다. 도로사정이 나아지면 금방 오갈 수 있는 멀지 않는 거리다. 원산은 16㎞ 15분거리.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원산, 금강산 지역을 관광지구로 개발한다니, 겨울 스포츠인 마식령 스키장까지 포함하여 사계절 내내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 참사가 계응상이란 분을 아느냐고 묻는다. 누에고치 생산을 획기적으로 늘린 세계적인 유전학자이자 잠학자라고 한다. 누에에서 색깔 있는 실을 얻을 수 있게 한 학자라고 했다.
돌아온 다음 자료를 찾아보았다. 계응상(1893~1967)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서울보성중학교, 일본 도후쿠대학, 동경고등잠사학교를 졸업했다. 유전학적 자료에 기초하여 누에고치 생산을 획기적으로 늘리는데 기여했다. 북한최초의 농학박사이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리원대학을 계응상대학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가만있자, 이분이 평북 정주 출신이라 했지. 그리고 보니 정주 출신 유명 인사가 한둘이 아니다. 이번에 생가를 방문하고 싶었던 통일교 창시자 문선명 교주가 정주출신이다. 시인 백석, 춘원 이광수. 그리고 조선일보 방우영 창업주도 정주출신이라 했다. 그 작은 고을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 지역이 선조대대로 학향이며 마을 서당이 전국에서 제일 많은 고을이었다고 한다. 교육이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말이 틀림이 없다.

평양으로 돌아가는 길
길가 전망대에서 잠깐 쉬어가기로 한다. 높은 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첩첩이 산이다. 푸른 하늘 아래 산마다 단풍이 들어 제각기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험한 산을 요리조리 빙빙 돌아 올라온 한 줄기 하얀 선. 방금 우리가 왔던 길이다. 그 길 위로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간다. 한가한 저 길에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달려갈 때가 언제쯤일까 생각하다가, 그게 꼭 바람직한 모습일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어진다.
눈을 돌려 북쪽을 보니 산자락 낮은 곳은 물론 가파른 중턱까지도 밭을 일구어 놓았다. 사람이 올라가기도 힘들어 보이는 꽤 높은 곳이다. 저 절벽 같은 언덕에 무엇을 심어 가꾸었을까. 큰비라도 쏟아지면 견뎌내기나 할까. 걱정이 된다.
어제처럼 산삼을 사라고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 사주는 사람이 있으니 저렇게 팔려고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다시 출발. 오는 길에 들렸던 신평 휴게소에 들렀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이 업은 아주머니가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너간다. 아주머니를 따라 다리를 건너가 보니 주유소가 나온다. 자동차는 보이지 않는다. 운행하는 차가 많지 않으니 주유소에 들르는 차도 당연히 드물 성싶다.
호수 위에 다리가 놓여 있고, 맑은 물 위에 단풍진 산 그림자가 내려와 발을 씻고 있다. 다리 위로 트럭 한 대가 지나간다. 트럭 위에 사람들이 한가득 타고 간다. 트럭 난간 끄트머리에 앉아 출렁거리며 가는 네댓 사람이 위태위태해 보인다. 저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싶으면서도 내가 손을 흔들었더니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에게 손을 흔들어 준다.
개건된 고구려 시조릉 동명왕릉
휴게소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은 다음, 다시 평양 원산간 고속도로를 타고 달렸다. 동명왕능 3㎞ 이정표가 보이더니 이내 동명왕릉에 도착한다. 이곳은 행정구역상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동이다. 전에는 평남 중화군 진파리에 속하던 곳이다. 이 부근이 바로 고고학에서 유명한 ‘진파리 고분군’이 산재해 있는 지역이다.
'대소인원 계하마(大小人員 皆下馬)'라고 쓴, 작은 비석 하나가 연꽃무늬 돌받침 위에 얹혀있다. 하마비(下馬碑)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말에서 내려라’ 는 뜻이다. 요즈음 말로 한다면 모두 차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정도의 의미일 성싶다. 이 자그마한 비석 앞에서 모든 문무백관들이 말에서 내려 걸어 올라갔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동명왕릉 오르는 길 오른편으로 건물이 보여 무슨 집이냐고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정능사 절이라고 한다. 왕의 극락왕생을 빌고 왕릉을 지키기 위한 절이란다.
능에 도달하기 전, 안내원이 왼쪽 건물로 안내한다. 우리가 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고주몽의 건국설화에 나온 이야기들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안내원이 그림을 따라가며 차례로 설명을 한다. 고주몽의 아버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였다. 주몽은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는 활쏘기의 명수였다. 주몽은 마구간 일을 하며 구박받고 살았다. 어머니는 아들을 탈출 시키려고 준마의 혓바닥에 바늘을 꽂아 놓았다. 예상대로 말이 삐쩍 말라 쓸모없게 되자 주몽의 차지가 되었다. 주몽은 말을 타고 달아났다. 추격병에 잡히려 할 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주어 살아났다. 마침내 주몽은 졸본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국 창건을 선포하니 때는 기원전 277년이었다. 주몽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건물을 나와 능쪽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안내원이 “이 능은 1993년 5월 14일 개건했다”고 안내한다. 복원이 아니라 개건이라는 말이다. 옛 모습대로 살린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입장에서 새로 세운 것이라는 얘기였다.
동명왕릉 앞에 섰다. 규모가 대단하다. 기단의 한 변 길이가 31m이고 봉분의 높이는 11.5m라고 했다. 능 앞에 “이 유적은 주체93(2004)년 세계 문화유적으로 등록되었다”는 내용이 유네스코 문양과 함께 자그마한 돌에 새겨져 있다.
능 주변에 오래된 소나무가 빙 둘러 있어 왕릉의 기품과 위엄을 더해주고 있다. 해묵은 노송이 수백그루다. 소나무 수령이 어느 정도이며 몇 그루나 심어져 있냐고 물었더니 수령 5백년 정도이며 1천600그루 정도 된다고 한다. 1천600그루라니, 거대한 소나무 숲이다. 능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소나무들이 능을 향해 가지를 뻗쳐있다. 그 모습을 가리키면서 안내원이 웃으면서 말한다.
“보십시요. 소나무들이 왕릉을 향해 절을 하고 있지 않습네까”
바람 한 줄기 숲을 흔들고 지나간다. 소나무 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는 특별하다. 저 바람 소리에 수천 년 역사가 스며있다.
돌아온 다음 유흥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4>를 읽어보았다. 그는 이곳을 방문한 다음, “동명왕릉은 시조의 능다운 위용과 고구려고분다운 힘이 있었다. 선입견이 아니더라도 부여 능산리의 아담한 고분, 경주 서약동의 화려한 고분과는 달리 굳세 보였다.”고 기록했다.
북한은 이곳 동명왕릉을 93년에 개관한 다음 단군릉을 이듬해인 1994년에 개관한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왜 그렇게 시조릉 개건에 열중했을까. 유흥준은 같은 책에서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의 장정신 관장이 대담 중에 “주체를 올바로 세우는 뜻에서 3대 시조릉에 대한 개건사업을 전개했다”고 한 말의 행간에서 그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고 썼다.
능 앞쪽을 바라보니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있다. 안내원과 함께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왕릉 앞 소나무 숲속에서 황소 대여섯 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암소가 순한 눈망울을 굴리며 풀을 뜯고, 저만치 송아지 한 마리가 낯선 길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랜만에 소를 가까이서 보았던지라 암소를 만져보려고 다가가는데, 옆에 서 있던 고삐에 매인 황소가 뿔 달린 머리를 숙이며 공격 자세를 취한다. 수컷의 본능이다. 멈칫하여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둔중한 몸을 부르르 떤 다음, 긴장이 풀린 듯 먼 산을 바라본다. 씩씩거리며 논밭을 갈아엎던 시절을 그리는지도 모르겠다.
해외동포 애국자묘 참관
이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애국능이 있다고 한다. 걸어서 10여분 거리라고 했다. 차를 타고오니 금방이다. ‘해외동포 애국자묘’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묘역의 넓이는 6정보(약 5만9천㎡), 1988년 조성되었다고 한다. 김 참사가 안내원을 찾았으나 마침 부재중인 모양이다.
현판이 걸린 정문을 통과해 올라가니 줄지어 비석이 서있다. 묘비에 고인의 사진과 생몰연대가 새겨져 있다. 개인용, 부부용, 가족용 등 세 가지 형태의 묘로 조성되어있으며, 재일 총련, 재중동포, 재미동포 등 4백여 명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이곳에 묻힐 수 있냐고 김 참사에게 물었다. 해외동포로서 조국을 위해 일한 공로가 인정되면 누구라고 묻힐 수 있다고 한다. 노력영웅, 김일성훈장, 조국통일상, 등 수상자와 공화국 교수, 박사, 인민예술가, 인민체육인칭호를 받은 해외동포들이 안장됐다고 한다. 재미동포 출판인 김병주 선생도 묻혀 있다고 했다.
앞쪽을 바라보니 제법 넓은 들판이다. 다른 나라에 선례가 있는지 모르지만, 해외동포를 위한 묘역을 따로 마련하는 일은 흔치 않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묘역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방아깨비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 간다. 조금 있으려니 메뚜기가 날아와 자동차 앞 범퍼 위에 멈춘다. 이놈들을 본 지 40년은 넘었을 성 싶다. 청정지역이라는 증거다.
부근 옥수수를 베어낸 밭에 소떼를 놓아먹이고 있다. 소는 널브러진 옥수수 잎을 씹으며 이따금 꼬리를 흔들어 파리를 쫒고 있다. 한가롭게 되새김 하고 있는 저놈들은 인간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는 성 싶다.
길가 밭둑에 원두막이 서있다. 자동차를 타고가면서 여러 번 원두막을 보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다. 밭둑에 높고 낮은 저런 모양의 원두막이 있었다. 남쪽의 원두막은 주인이 수박이나 참외밭을 지키며 오가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세우는 거지만, 이곳에서 원두막을 세우는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나뭇가지를 얽어 바닥을 깔았다. 집을 엮어 주위를 둘러친 다음 지붕은 옥수수대로 덮었다. 원두막 앞에 가을걷이가 끝난 콩밭, 그리고 남새밭이 보인다. 저 원두막이 들판에 널려있는 곡식을 지키기 위한 것은 아닐 테고, 농부들이 땀을 식히거나 음식을 먹는 장소가 아닐까싶다. 아니면 농장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좀 다른 얘기지만 남한을 걸어서 종단할 때, 어느 지방을 지나는데 “농산물 빈집털이 빈번발생 외부차량 번호단속 양해바람 -금계리 주민일동-”이라고 쓴 배너를 본 적이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농촌을 돌아다니며 추수한 농작물을 훔쳐가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였다. 농부들이 일 년 동안 뼈 빠지게 지은 농작물을 밤새 훔쳐가는 못된이들이 있다니….
신작로에 떠오르는 아련한 풍경

차를 타고 평양을 향해 간다. 들판 저쪽에서 차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다. 비포장도로인 모양이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차가 멈칫 하면 뽀얀 먼지가 차를 감싸곤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오래된 풍경하나가 스쳐 지나간다. 신작로와 관련된 아련한 추억이다.
“고등학생 때 광주에서 자취를 했다. 대부분 자취생들처럼 나도 한 달에 한 번쯤 시골집에 내려가 식량과 반찬거리를 가져왔다.
어머니는 쌀과 보리쌀을 반반씩 섞어버린 다음 포대에 담았다. 전에는 쌀과 보리쌀을 따로 담아서 가져갔는데 자취생들이 쌀을 팔아 주전부리를 바꾸어 먹는다는 소문을 어디선가 들으셨던 모양이다.
김치는 옹기그릇에 담아주셨다. 두 달은 넉넉히 먹을 분량이었다. 아버지는 비료 포대를 자른 비닐로 뚜껑을 덮은 다음 가는 새끼를 꼬아 단지를 동여매 주셨다. 그리고 좀 통통한 새끼줄을 골라 식량자루를 메고 갈 멜빵을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를 도와 밀려있던 농사일을 대충 마무리한 다음 점심을 먹고 나서 집을 나섰다. 식량을 짊어지고 김치단지와 된장 그릇은 양손에 들었다. 전깃불도 구경할 수 없고 버스 한 대 들어오지 않던 깡촌이라 20리쯤 되는 길을 영암읍까지 걸어 나왔다. 오뉴월 따가운 햇볕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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