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애민의 魂 담긴 문화유산

서호면 엄길리 ‘장동사’

변중섭 기자 jusby@hanmail.net
2008년 07월 03일(목) 18:03
천안 全氏 사우
몽성·몽진·몽태 3위 배향
전라남도 기념물 제109호
서호면 엄길리 472번지에 소재한 장동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공신인 천안전씨 전몽성(全夢星 1561~1597)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1677년(숙종 3)에 창건한 사우다.

그 뒤 1706년(숙종 32)에 사우를 중수하면서 창의장(倡義將) 전몽진(全夢辰 1565~1597)을 배향하고, 이어 1836년(헌종 2)에는 진무원종훈 전몽태(全夢台 1571~1659)를 추배하여 3위를 제향하였으나 1868년 고종 5년에 훼철됐다.

광복 이후인 1946년 장동마을에 있던 사우를 현재의 위치로 이건 복설하고 매년 2월 20일 향사하고 있다.

장동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축물이며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내부에는 ‘天安全氏門案(천안전씨문안)’ 1책과 ‘長洞祠靑衿案(장동사청금안) 9책 등의 고문서가 소장돼 있으며, 현재 전몽성의 12세손 전종기씨가 관리하고 있다.

장동사는 1987년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109호로 지정 받았으며 왜적과 맞서 싸우며 나라와 백성을 구한 구국애민(求國愛民)의 혼이 담겨있는 우리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창의장 전몽성(1561~1597)의 字는 應祥(응상)이며 천안인으로 현감 倫의 손이며, 첨추 邦弼(방필)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효심이 지극하고 예의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무예를 연마하여 선조 16년(1583) 23세 때 무과에 올라 위무겸선전관, 군기시주부를 지냈다.

임진란 때 고경명, 김천일 장군과 연계하여 창의하고 금산싸움에 참여했으며, 1593년 함평현감을 제수받아 청렴으로 정사에 힘썼다.

이후 정유재란 때에는 고향에서 아우 몽진과 류장춘, 서희서, 김덕흡, 류희춘 등과 함께 창의하여 해암포(海巖浦 현 학산면 석포리)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치고 장렬하게 순절하니 公의 나이 37세 였다.

조정에서는 公께 병조판서 교지를 내리고 장동에 사우를 세워 향사토록 했다.

전몽진(全夢辰 1565~1597)은 몽성의 아우이며, 형 몽성과 함께 창의하여 해암포 싸움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순절했다.

전몽태(全夢台 1571~1659)는 몽성의 막내 아우이며, 1603년 무과에 올랐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생질 김완 장군과 함께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변중섭 기자

변중섭 기자 jusb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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