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6년 09월 30일(금) 12:25
엊그제 8월23일이 처서(處暑)였다. 처서는 말 그대로 '더위를 처분한다.'는 뜻으로, 24절기 가운데 14번째다.
처서에 얽힌 재미있는 얘기가 많다.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처서 날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 먼저 귀뚜라미가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그 까닭을 물었다. 모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날 잡는답시고 제 허벅지를 때리고 볼때기를 치는 것이 너무나 우스워 웃다보니 입이 이렇게 다 찢어졌다네!" 이번에는 모기가 귀뚜라미에게 물었다. "그런데, 자넨 뭣에 쓰려고 톱을 들고 가나?" 귀뚜라미는 이렇게 대답했다. "긴긴 가을밤 독수공방 임 기다리는 처녀총각 애간장 끊으려 가져가네!"
절기상 이렇게 만난 모기와 귀뚜라미의 운명이 달라지는 때가 바로 처서다. '처서 지나면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 '가을 기운은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말처럼….
올 여름 기록적인 폭염은 처서 절기조차 무색했다. 하지만 어쩌랴. 시간이 흐를수록 초저녁과 새벽녘 귀뚜라미 우는 소리는 더욱 또렷해져간다. 이제 진짜 가을이 온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또렷해진 것은 사실 계절과는 무관하다 한다.
귀뚜라미는 땅속에서 알로 월동한 뒤 여름에서 가을쯤 성충으로 부화해 초원 등에서 생활한다. 특히 변온동물이라 주변 온도에 민감하다. 땅속 온도가 높으면 생육이 빨라지고, 부화 시기도 앞당겨진다. 따라서 요즘 아침저녁 귀뚜라미 소리가 부쩍 많이 들리는 것은 올 여름 유례없는 폭염 탓이지 계절이 바뀐 것과는 무관하다.
귀뚜라미도 수컷이 암컷을 유인하거나 경쟁자를 물리칠 때 운다고 한다. 양쪽 날개를 비벼 소리를 낸다. 특히 날개를 펼쳐 치켜세워야 소리가 멀리 퍼져나간다. 이때 귀뚜라미의 근육이 수축하는데 이는 주변 온도가 높을수록 반응이 빨라진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기온이 높으면 울음소리 간격이 빨라지고, 기온이 낮으면 간격이 점점 길어지는 것이다. 결국 무더위 속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은 바로 울음소리의 간격이 그만큼 짧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덥다고 귀뚜라미 소리가 크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귀뚜라미는 기온이 24도 전후일 때 짝짓기를 가장 왕성하게 한다고 한다. 결국 초가을 귀뚜라미 소리가 가장 크다는 얘기다. 따라서 폭염이 물러간 요즘 귀뚜라미 소리는 크다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활기차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온도에 민감한 귀뚜라미는 인디언들에게 온도계 역할도 했다고 한다. 귀뚜라미 소리를 바탕으로 주변 온도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에는 '귀뚜라미는 가난한 사람의 온도계'(The cricket is also known as poor man's thermometer.)라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다.
실제로 아모스 돌베어라는 학자는 온도에 민감한 귀뚜라미의 습성을 이용하면 대략적인 주변 온도를 추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논문 '온도계 구실을 하는 귀뚜라미'를 학술지 '아메리칸 내처럴리스트'(1897년)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귀뚜라미가 14초 동안 우는 횟수에 40을 더하면 화씨온도가 나온다. 예를 들어 14초 동안 귀뚜라미가 35회 울었다면 화씨온도는 75도가 되고, 이를 섭씨온도로 환산하면 24도라는 것이다. 이를 '돌베어 법칙'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그가 온도 측정에 사용한 귀뚜라미가 '긴 꼬리 귀뚜라미'라는 사실이다. 귀뚜라미가 전 세계적으로 3천여종이나 된다니 아무 귀뚜라미 울음소리나 다 온도계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유념할 일이다.
어쨌든 한밤중 잠을 청하기조차 힘들었던 폭염이 물러간 요즘,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잠시 잠을 깬 새벽녘 제법 서늘한 기운 때문에 창문을 닫다보면 헛웃음이 난다. 불과 2∼3도의 기온차이에 울고 웃어야 하는 인간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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