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절양'을 다시 읽다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
2016년 12월 09일(금) 14:40 |
서른 몇 살 어느 봄날, 백련사에 들렀다. 절 마당에 세워진 나무판에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 한 편이 적혀있었다. 다산이 200년 전 나라의 가혹한 수탈에 격분하여 못할 짓을 했던 한 부부의 사연을 듣고 지은 시다.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길게 우는 소리 /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 출정 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해도 /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네 /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 / 억울한 하소연 하려 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홍건하네 / 스스로 부르짖길,"아이 낳은 죄로구나!" /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 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 민나라 자식의 거세도 진실로 또한 슬픈 것이거늘 / 자식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 / 거세한 말과 거세한 돼지도 오히려 슬프다 할만한데 / 하물며 백성이 후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랴! / 부잣집들 일 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 이네들 한 톨 쌀 한 치 베 내다 바치는 일 없네 /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읊노라'
충격이었다. 폭정에 시달렸던 민초들의 아픔에 가슴이 저렸고, 정치를 못해도 이렇게 못할 수 있느냐는 서릿발 같은 호통이 심장을 울렸다. 왕조시대에 어떻게 이런 시를 지을 수 있었을까. 대역 죄인으로 귀향와 임금의 말 한 마디면 목숨이 날아갈 처지에서도 할 말을 다 하는 선비의 기개가 놀라웠다. 그가 평생 주장했던 애민(愛民)과 목민(牧民) 정신을 시 한 편이 실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덕산은 예로부터 야생 차밭이 많아 다산(茶山)으로 불리었다. 서른아홉에 강진에 와 18년간 그 산자락에 머물렀던 정약용 선생의 호 다산(茶山)은 이로부터 연유했다.
백련사는 동백꽃으로 유명하다. 동백꽃은 동백, 춘백, 추백으로 나누는데, 겨울 추위를 이기고 피어나는 붉은 꽃을 동백으로 부른다. 동백은 가장 아름다울 때 알몸으로 송이 째 뚝뚝 떨어져버린다. 다산 초당까지 산길을 따라 1시간 남짓 되는 숲속을 혼자 걸었다. 이 길은 다산이 백련사 주지 혜장 스님을 만나러 오갔던 길이다. 언덕을 넘어가는 내내 농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떨어져 누워버린 동백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처연했다.
이 아침에, '애절양'을 다시 읽는다. 시구편(?鳩篇)을 찾아본다. 통치자가 백성을 골고루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시구새(뻐꾸기)에 비유해서 읊은 내용이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결국 밥이다. 날이 추워진다. 신문을 훑어보니, '문재인 '남는 쌀 북한에 인도적 지원' 제안'이란 제목이 보인다. 북한 수재민에게 쌀을 보내자는 얘기다. 밥. 눈물겨운 밥. 배고플 때 밥 한 그릇은 사람의 마음을 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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