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과 지도자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7년 01월 25일(수) 21:05
무료한 주말에 책도 읽기 싫고, 나가서 활동을 하기도 싫어 소파에 앉아 TV 전원을 켰다. 수없이 많은 채널 중에 눈길을 끄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채널은 하염없이 돌아갔다.
그러던 중, ‘Undercover Boss’(언더커버 보스)라는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언더커버 보스는 영국의 ‘채널 4’에서 제작하고 방송된 프로그램으로 CEO(대기업 최고 경영자)가 회사의 일용직 사원으로 취업하여 자신의 회사 직원과 대화하고 함께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회사가 처한 상황과 직원들의 애환을 듣는 프로그램이다. 방송 형식은 일종의 몰래 카메라인데 한국과 일본에서 펼치는 연예인 속이기, 신변잡기와는 그 품질에서 비교를 거부한다.
이 몰래카메라는 그저 남을 놀라게 하고 괴롭히는 형태가 아니다. 일종의 암행감찰과 같은 것으로 이 프로그램의 궁극적 목표는 회사 광고, 회사 내부 문제 점검, 유능한 직원과 무능한 직원의 비교, 그리고,CEO가 직원에게 주는 보너스를 통해 사람 사는 세상의 따뜻함을 전달함에 있다.
유능한 직원에게는 포상을, 무능한 직원은 해고가 아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더 나은 직원이 되도록 유도한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나면 가끔 눈물도 나고 가슴이 따뜻해진다. 가난하지만 성실한 직원, 슬픈 가정사를 가지고 있지만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직원들이 CEO에게 보너스를 받게 되고 보너스를 받은 후 직원들의 달라진 삶까지 이야기를 해준다.
이 1시간짜리 프로그램은 맛있는 밥을 먹고 입가심으로 과일 한 조각을 먹는 것처럼 뒷맛도 좋다.
이날 방영된 업체는 캐리비안 스타일의 베리커리 전문점인 ‘Golden Krust’라는 프렌차이즈 식당이었다. 이 프랜차이즈 식당의 가맹점은 2010년 기준으로 미국 전역에 115개의 점포가 있으며 본사 직영점은 2개라고 한다. 캐리비안 출신 사업가로는 미국 최초의 프랜차이즈 창업주가 되었다고 하니 호손이라는 CEO는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람으로서 직원들도 그런 꿈을 함께 꾸길 바랐던 것 같다.
그런 창업주가 일용직 사원으로 변장해 가맹점을 찾았다. 그러면서 직원들의 숙련도를 지켜보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요리를 보면서 호손은 사태의 심각함을 알게 된다. 프랜차이즈 매장의 생명은 전국 어디의 가맹점이라도 동일한 수준의 품질과 맛을 내야한다는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그가 찾은 가맹점의 주방에는 매뉴얼이 없었으며 순전히 요리사의 역량에 의해 맛이 좌우되는 상황이었다. 그 모습을 본 CEO는 크게 탄식을 한다. 큰돈을 들여 만들어 놓은 매뉴얼이 왜 주방에 비치되어 있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1주일간의 잠복을 마친 CEO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가장 먼저 가맹점에 요리책 비치를 명령한 것이다. 가맹점에서 판매되는 음식 맛의 통일을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함께 근무했던 요리사의 음식이 마음에 들었던 CEO는 그 요리사의 요리를 가맹점 공식 요리책에 포함시켜 음식선택의 폭을 넓혔다. 이날 CEO는 가맹점의 문제를 정확히 진단했고 그에 대한 처방을 매뉴얼 비치로 멋지게 마무리 됐다. 한편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현재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안전불감증’,‘정치지도자들의 무능’과 오버랩 되며 긴 여운을 남겼다.
지난 22일 서울 지하철 2호선에 불이 났다. 세월호 참사의 기억과 대구 지하철 참사의 기억이 생생한데 이날 기관사의 대응은 또 늦고 말았다. 기관사는 표준 매뉴얼대로 “전동차 안에서 기다리라”는 안내 방송을 했고 3분후 화재 발생을 인지하고 대피 안내 방송을 다시 했다.
어찌보면 적절한 대응 같기도 한데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기다리라’는 말에 학습효과가 생기고 말았다. 몇 년 사이 대한민국에서는 ‘기다리면 죽는다’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승객들은 다급한 마음에 기관사의 대피 방송이 나오기도 전에 빠르게 탈출을 했다. 결국 인명피해는 없이 잘 마무리 됐지만 뒷맛이 씁쓸하다. 앞으로 더 큰 재난이 왔을 때 매뉴얼이 비치되어 있고 적절하게 조치했더라도 과연 국민들이 그 통제를 잘 따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요즘은 디지털 시대에 인터넷과 SNS를 통해 수없이 많은 첩보를 접하게 된다. 그런데, 그 첩보의 신뢰도가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없다. 음모론, 유언비어, 사회 불신이 팽배한 이 시대에 공기관과 정부를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매뉴얼은 언제쯤 나올는지 대선이 다가오는 가운데 답답한 마음만 가득하다. 부디 조속한 시일 내에 혼란을 잠재울 영웅의 등장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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