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림마을 가마터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
2017년 04월 07일(금) 15:05 |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류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도자기의 발명이라고 본다. 인류가 농사를 짓고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그릇이었다.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물을 저장해야 하고 음식물을 담아 흘리지 않고 먹기 위해서는 그릇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대 인류는 흙을 재료로 그릇을 빚어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토기'다. 그러나 토기는 작은 충격을 받아도 쉽게 깨지고 물을 부으면 새어나오고 부스러지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토기의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 생각을 거듭한 결과 흙을 불에 구우면 단단해 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보다 더 단단하고 사용하기 편리한 그릇을 만들기 위해 좋은 흙을 찾고 굽는 온도를 높이는 기술을 개발한 결과 토기의 단점을 보완한 '도기'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기도 물이 스며들고 표면이 거칠어서 사용하기에 불편하여 이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 결과 도기에 나무의 재를 이용한 유약을 사용하여 표면에 코팅을 함으로서 물이 스며들지 않고 매끄러운 그릇을 발명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시유도기(施釉陶器)'라고 한다.
유약을 사용한 시유도기의 발명은 도자기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유도기의 발상지가 우리고장 영암이라는 사실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영암이 우리나라 최초의 시유도기 산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사직한 것은 1986년과 1996년 두차례에 걸친 이화여대 박물관 가마터 발굴팀의 조사결과에 의해서였다 이들 발굴팀은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남송정 마을의 '돌정고개'라 불리는 구릉에 자리잡은 가마터를 발굴한 결과 이곳이 AD 7∼9세기경 통일신라시대 우리나라 최초로 시유도기를 생산한 지역임을 밝혀냈다.
구림가마터가 시유도기의 발상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구림리 일대는 황토와 땔감이 풍부하고 가마터가 자리잡기에 적합한 구릉이 많은데다 당시에 바다와 연접하고 있어서 대륙과 해양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도기생산의 최적지였기 때문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당시의 도기산업은 오늘날로 말하면 최고의 기술과 품질을 자랑하는 최첨단 하이테크 산업이었는데 구림리 일대는 이러한 산업에 적합한 자연환경과 지정학적 요건을 고루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당시에 완도 청해진을 중심으로 활발한 해상무역활동을 전개하였던 장보고 선단은 9세기 국제무역항이었던 구림 '상대포'에서 구림도기를 선적하여 일본과 중국으로 수출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 의해 중국으로 부터는 다양한 도자문화가 유입되어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유약기술 개발을 촉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준높은 유약기술은 강진, 해남, 장흥, 함평 등 전남 서남해안 지역의 청자와 백자 기술개발로 이어지게 되었다. 영암군에서는 이러한 구림도기의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고 보존 계승하기 위해 폐교로 방치되었던 구림중학교를 개조하여 1999년 '영암도기문화센터'를 개관하여 운영하고 있다. 다른지역에는 없을 뿐만 아니라 결코 가질 수 없는 우리나라 최초 시유도기 가마터 유적은 우리 영암이 갖고 있는 소중한 자원이 아닐 수 없다.
훌륭한 역사유믈을 후손들에게 남겨준 것은 우리의 선조들이지만 이러한 역사적 유물을 잘 보존하고 활용하는 것은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 구림 시유도기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한번 부각시켜 학계의 관심을 유도하고 필요하다면 중앙부처의 재정지원도 받아 시유도기 유적을 옛마을의 정서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구림전통마을과 연계하여 새로운 도자문화의 본고장으로 가꾸어 나감으로서 영암도기가 새롭게 평가받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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