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갑니다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
2017년 11월 24일(금) 14:11 |
해질 무렵 창문을 열고 곱게 물든 먼 산 풍경 바라보고 있는데, K씨가 참 오랜만에 사무실을 찾아왔습니다. 자리에 앉더니 봉투를 하나 내 놓았습니다. 무슨 봉투냐고 물었더니 그냥 빙긋이 웃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십 년 전이던가, 그보다 더 오래 전이었던가, 그분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드린 적이 있는데 그것을 갚으러 올라오신 것입니다.
그 동안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늘 마음이 쓰였는데 외국에 나가있는 아들이 며칠 후 돌아오는 아버님 생일에 쓰라면서 천 달러를 보냈기에, 오 백 달러는 아들 정성을 생각해서 본인이 쓰기로 하고 오 백 달러를 이렇게 가져왔다면서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명년에 아들녀석이 한 번 더 생일 축하금을 보내주면 그땐 나머지를 갚겠다고 하시면서 돌아 나가는 뒷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였습니다.
빌려 준 나는 잠깐 마음에 두었다가 어느새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만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저 분은 그렇게 긴 세월을 돈을 갚지 못한 일이 생각날 때마다 문득문득 또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도우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한자에서 사람을 '人'자로 표기한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본질적으로 인간은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면 돈도 잃고 친구도 잃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허나 생각해보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갑자기 어려운 형편에 처하게 될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땐 가까운 친구 아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돈을 빚지고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마음의 빚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빚에 대해서는 돈을 빚 진 것처럼 그렇게 절실하게 새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감사하다고, 잘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한 마디 하면 모든 게 풀릴 수 있을 것을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빚을 훌훌 털어 버리지 못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당신도 나도 이웃이나 친구에게, 부부사이에, 혹은 자식과 부모사이에 무거운 마음의 빚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돈을 빌려 본 사람은, 더구나 약속한 기한 내에 갚지 못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돈을 갚고 난 다음의 그 날아갈 것 같은 홀가분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앙금 진 마음을 털어놓고 서로 풀어 본 사람은 돈을 갚아버릴 때 보다 더 큰 마음의 평화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마음뿐입니다, 내가 진솔하게 마음을 풀어놓으면 그 향기가 상대방의 가슴에 가 닿아 꽃을 피워냅니다.
그렇습니다. 한 번 지나간 하찮은 일들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놓아 버리는 데서 평화는 시작됩니다. 우리가 겪는 불행가운데 많은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놓지 않고 되새기는 데서 옵니다. 지나간 기억이나 일들에 매달리면 현재의 소중한 삶이 망가집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낙엽을 하나 둘 털어 내며 빈 가지가 되어 가는 나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맨 몸으로 겨울을 나고 나서, 새 봄에 새순을 피워내며 해마다 조금씩 자라나 마침내 우람한 재목이 되는 나무는, 말없이 참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이 가을에, 내 마음속에 앙금으로 남아있는 것들을 끄집어내어 낙엽을 떨어내는 것처럼 털어 내 버려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같은 말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노력 하고자 합니다. 십 년만에 빚을 갚고 홀가분하게 문을 나서든 편안한 K씨의 뒷모습이 눈에 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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