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射亭(열무정) 창건 및 사포계에 관한 문헌고찰

"열무정은 지역壯丁들이 향토안전 위해 궁마전술(弓馬戰術) 연마하던 射亭"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8년 01월 26일(금) 14:10
영암 열무정 사포계 황용주 공사원은 최근 (사)향토문화개발협의회가 펴낸 <향토문화 제36집>에 '영암 射亭(열무정) 창건 및 사포계에 관한 문헌고찰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60호 사포계문서 국역을 중심으로'라는 주제의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은 ▲射亭 창건 및 사포계에 관한 문헌고찰 ▲射亭 창건의 시대적 배경 ▲사포계지에 기록된 鄕射禮 ▲자료 : 鄕射禮와 饗射禮 등의 순으로 되어 있다. 황용주 공사원의 논문은 영암군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기도 한 열무정에 관한 첫 체계적인 연구인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 내용을 수회에 걸쳐 전재한다. <편집자註>
4. 열무정 사포계에 관하여 기록한 인용도서기록
㈎ 1980년 4월 열무정 사포계 임원들이 작성한 열무정 현창문 기록에 의하면 ‘이 지방 유일무이의 향토문화재 열무정은 영암읍 중앙에 위치하여 거금(距今) 450여년전 중종 대에 지방 순시 중이던 성어사(成御使)와 영암군수가 무사양성소로 국고금(國庫金)을 보조, 건립된 사정(射亭)인바, 1535년(중종)에 병영(兵營) 병사(兵使)의 천거로 조정에서 열무정(閱武亭)이라 명명을 받아 현지(現至)하면서 그동안 군 당국의 보조와 지방 선각인사(先覺人士)들의 협조에 의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장구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노후(老朽)에 풍우침박(風雨浸剝)됨에 1880년(100년 전)에 당시 영암군수가 중수하여 강무지처(講武之處)라 별칭(別稱)하면서 무사들의 사기를 고무케 하였다.
1770년 정종 대(210여년 전)에 이르러 이 지방의 유력한 선각들이 사포계를 조직하여 본정을 유지관리하면서 전통으로 이어온 우리 조상들의 정신적 문화유산인 화랑정신과 향약이념을 계승하여 계원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체육향상과 인격도야에 힘쓰면서 국가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 1988년 4월 30일 발행한 영암군 마을 유래지(영암군수 김옥현, 문화원장 김희규) 쪽 74 기록에 의하면, 열무정은 동무리에 있는 활터에 세운 정자. 이조 인조 때 성(成)어사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활쏘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 활량(한량)들을 바라보고 감탄하여 돈 600냥을 고을원에 주면서 사정을 세우라고 하므로 군수도 국고 300냥을 보조하고 지방민의 협조로 짧은 시일 안에 준공하였다 함.
중종 때 전라병사가 열무정이라 정하였는데 오래 되어 헐어진 것을 고종 때 군수 민창호가 중수하였음. 숙종 때부터 사포계를 조직, 사정을 보호하고 무예의 전통을 살려 후진을 길러 내고 있음.
㈐ 1988년 12월 전남대학교에서 발행한 <호남문화연구> 18집에 의하면 열무정은 조선 성종 대 창건된 것으로, 창건자는 미상(未詳)이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사포계는 1710년에 창설된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 1988년 12월 전남대학교에서 발행한 <호남문화연구> 18집에 의하면 영암은 124개소로 현존 하는 누정(樓亭) 68개소, 현존하지 않은 누정 56개소로 조사되었다. 이들 누정 가운데 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는 장암정, 영팔정, 영보정, 집영재, 열무정 등이라고 기록되었다.
㈒ 1998년 4월 10일 제4회 전국남여궁도대회 1998년 왕인문화축제 홍보책자(하현철)에 수록된 열무정 유래를 보면 중종 때(1535)에 병영 병사가 천거하여 나라에서 정호(亭號)를 열무정(閱武亭)이라 명명(命名)하였다.
㈓ 1998년 10월 30일 발행한 영암군지편찬위원회((靈巖郡誌編纂委員會)의 <영암군지(靈巖郡誌)> 하편(下篇) 쪽 557 열무정 및 사포계 문서일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 지정번호 : 문화재 자료 제160호
○ 소유자 : 사포계
○ 소재지 :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 62
○ 시대 : 조선시대
○ 지정연월일 : 1988년 3월16일
열무정은 일명 사정이라고도 불리는 정자로서 옛 영암읍성 내에 있었던 건물로 원래 이곳에서는 1710년(숙종36) 사포계가 창설되면서 이후 1880년(고종17) 열무정 중건 이후 계속 계회를 가졌던 장소이다.
이 열무정에 대한 구전으로는 몇 가지의 설이 있으니 아직 구체적인 자료를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710년(숙종36)에 열무정과 사장을 유지하기 위하여 조직했다는 사포계의 설립동기에서 그 편린(片鱗 원래 한 조각의 비늘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극히 작은 한 부분을 이르는 말)을 알 수 있어, 1710년 이전에 사정(열무정)이 창건되었음이 확인이 되고 있다. 이 열무정은 1710년의 사포계의 창설을 계기로 계속적인 향사(鄕士)들의 보호 아래 관리되다가 1880년 (고종17) 민창호(閔敞鎬) 군수의 협조로 중수되었고 일제 강점기에 3·1운동 때는 이 지방의 인물들의 임시 집회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사정(射亭)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건물의 기둥에도 8개의 주련(柱聯)이 걸려있고, 사장(射場)의 넓이는 1천600여평에 이른다. 현재도 사포계가 운영되고 있으며 매년 4월 정기적인 행사를 하고 있다.
현재 열무정에서 보존하고 있는 관련 자료는 다음과 같다.(생략)
이상의 사포계 문서들은 영암지방의 이교(吏校). 한량(閑良)들이 향사(鄕射)를 어떻게 운영하였으며, 주로 어떤 계층들이 이 조직에 참여하였는지를 밝혀주는 희귀한 자료들이다.
특히 1737년과 1877년의 관절목(官節目), 완의(完議)는 이들의 조직과 활동이 관(官)과의 일정한 유대와 지원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계안(契案)에는 각 시대별로 참여 인물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세밀한 검토가 이루어진다면 영암지방의 여러 형태의 지방조직과 연계되어 당시대로 모습을 재조명하는데 여러모로 이용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겠다.
㈔ 2004년 4월 3일 전주역사박물관 강당에서 발표된 제4회 국궁문화연구 세미나 ‘한국 사정(射亭)의 역사와 문화’ (최철환 열무정 사두 발표) 쪽 116 기록에 의하면 사포계는 열무정을 유지관리하고 보호지원하기 위하여 조선조 숙종 36년(1710년)에 창계되었는데, 그 사실로 보아 열무정은 그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 2004년 소춘(小春) 소설지절(小雪之節) 수성사(壽星社) 사적비명(史蹟碑銘)에 의하면 전라남도 자료 문화재 제160호로 지정된 열무정은 중종30년 乙未(을미) 1535년에 창건되었는데 이곳은 이 지역 장정(壯丁)들이 궁마전술(弓馬戰術)을 연마하여 해적 또는 왜적들의 침입을 방어하여 향토의 안전을 기하였는데 이 열무정 운영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사포계가 조직되었는데 사포계장은 수성사장이 당연직으로 겸임하게 되어 있다.
㈖ 2006년 12월30일 영암문화원(원장 신태균)이 발행한 ‘영암의 땅이름’ 쪽 68에 기록된 지명유래 및 문화유적에 의하면 열무정은 동무리에 있는 활터에 세운 정자. 이조 인조 때 성(成)어사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활쏘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 활량들을 바라보고 감탄하여 돈 600냥을 고을원에 주면서 사정을 세우라고 하므로 군수도 국고 300냥을 보조하고 지방민의 협조로 짧은 시일 안에 준공하였다 함. 중종 때 전라병사가 열무정이라 정하였는데 오래되어 헐어진 것을 고종 때 군수 민창호가 중수하였음, 숙종 때부터 사포계를 조직, 사정을 보호하고 무예의 전통을 살려 후진을 길러 내고 있음.
㈗ 2007년 8월 14일 국립민속박물관 발행 전국의 활터 조사보고서 쪽 186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사포계는 열무정을 유지관리하고 보호지원하기 위하여 조선조 숙종 36년(1710년) 창계되었는데 그 사실로 보아 열무정은 그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사포계안을 작성한 연도는 정사년 5월 서기 1737년 영조 13년이라 기록되어 있다.(열무정사포계 쪽 201)
㈙ 또한 인터넷 디지털 영암향토문화대전에 의하면 열무정은 일명 ‘사정(射亭)’이라고도 불리는 정자로 1710년(숙종36)에 사포계가 창설되면서 모임을 가졌던 곳이어서 소장 문서와 함께 열무정 및 사포계 문서 일괄(문화재 자료 제160호)이 지정되었다.
집성 촌락 공동체의 활동공간으로 문화교류의 장소인 정자는 영보정(기념물 제104호), 영팔정(기념물 제105호), 장암정(기념물 제103호), 영암 부춘정(유형문화재 제284호)이 있다. 영암 이우당(문화재자료 제247호)과 고반재(지정 명칭 : 고반재 및 소장 고문서 일괄, 문화재 자료 제236호), 집영재(민속문화재 제16호)도 향촌 서재로서 기능하였다. 또한 고문서로는 영암 구림 대동계 문서(문화재 자료 제198호)가 조선 시대 중기와 후기 향촌 동약(洞約) 문서로서 중요하다. 구림 대동계는 호남의 대표적 동약으로 조선 시대 동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영암 녹동 서원 소장 목판 및 고문서류는 소장 유물, 열무정과 고반재는 소장 문서가 건조물과 함께 지정되어 있다.
영암 녹동서원 소장 목판 및 고문서류(유형 문화재 제183호)는 원생들의 명단을 적은 <서원청금안> 25책, <서원서재유안> 2책, <심원록> 5책, <합경재보노안> 3책 등을 비롯하여 통문(通文), 완의(完議), 노비 기증 문서들이 있다. 목판으로는 <연촌유사>, <문곡집>, <산당집> 등 녹동서원에 모셔진 인물들과 인근 지역 인물의 문집이 있다. 녹동서원의 연혁, 조직과 운영, 경제기반, 유생들의 명단 등 종합적이고 다각적인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열무정 및 사포계 문서 일괄(문화재 자료 제160호)는 <사포계안절목>, <사포계 완의>, <사포계 좌목>, <사포계 중수안> 등 24책이다.
㈚ 열무정 및 사포계 문서 일괄(열무정 안내판) 기록에 의하면 열무정은 일명 사정이라고 불리던 정자로 1710년 사포계가 창설되면서 건립되었다. 열무정 건립에 대한 몇가지 설이 있으나 아직 구체적인 자료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710년에 열무정과 사장을 유지하기 위하여 조직했다는 사포계의 설립동기를 보면 1710년 이전에 열무정이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 기록들은 열무정 창건 시기와 중수에 관하여 발행된 책자들에서 발췌하였다.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하게 기록되었다. 즉 이조 인조 때 성어사와 영암군수가 건립하고 중수하였으며 또한 영암군수 민창호가 중수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무정 창건은 1910년 이전에 세웠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전(口傳)으로 전해오고 있는 연대와 시기를 확인하기 위하여 2004년 9월 사포계 소장 문서를 국역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다음과 같이 구성하였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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