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射亭(열무정) 창건 및 사포계에 관한 문헌고찰“

영암읍성은 조선시대 지방 수령이 지역을 관할하던 문화와 행정의 중심지”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8년 02월 09일(금) 14:26
영암 열무정 사포계 황용주 공사원은 최근 (사)향토문화개발협의회가 펴낸 <향토문화 제36집>에 '영암 射亭(열무정) 창건 및 사포계에 관한 문헌고찰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160호 사포계문서 국역을 중심으로'라는 주제의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은 ▲射亭 창건 및 사포계에 관한 문헌고찰 ▲射亭 창건의 시대적 배경 ▲사포계지에 기록된 鄕射禮 ▲자료 : 鄕射禮와 饗射禮 등의 순으로 되어 있다. 황용주 공사원의 논문은 영암군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기도 한 열무정에 관한 첫 체계적인 연구인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 내용을 수회에 걸쳐 전재한다. <편집자註>
위의 기록은 1797~1879년에 작성된 내용으로, 사포계의 창설시기에 대해 ‘정사년(1797)에 처음 시작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1710년(숙종36)에 창설되고, 1880년(고종17년)에 중건되었다”라고 전해왔다. 그러나 1710년 사포계 창설에 대한 고증자료가 확인되지 않는다. 또 1880년의 중수 역시 간지(干支)를 잘못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즉 위의 ㈑의 기록에서 “지나간 두 번의 정사년”, 또는 “계를 시작한지 이제 100년이 지났다” 등의 내용을 보건대, 1879년을 기준으로 ‘두 번 지나간 정사년’이란 바로 1797년과 1857년에 해당한다. 또 ‘계를 시작한지 이제 100년이 지났다’라는 기록 역시 사포계 창설이 대략 18세기 중엽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국역 쪽 388)
9. 맺음말
위에 기술한 바와 같이 열무정 창건 및 사포계 창설에 대하여 인용한 도서들의 기록한 연도는 각각 다르게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1879년 9월 사정중수기 기문에 의하면, 또한 사포계문서 자료를 국역한 해제(쪽 381~394)에 의하면 열무정 창건 연대는 1535년(중종30), 사포계 창립은 1797년(정조21) 5월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1차 사정중수는 1858년(戊午), 2차 사정 중수는 1879년(己卯) 4월, 3차 열무정 중수는 1935년(乙亥), 4차 열무정 중수는 2012년(壬辰) 4월로 기록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정(射亭) 정호는 열무정 소장 현판 중수기를 국역한 1879년 사정 중수기에는 사정(射亭)이라 명명(命名)되었고, 1935년 열무정 중수기에는 열무정중수기(閱武亭重修記)라 명명되었다. 아쉽게도 사정(射亭)은 어느 연대에 열무정 정호(亭號)로 명명되었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1872년 영암군지도(서울대 규장각 소장)에 의하면 영암읍성과 영암읍성 동문밖에 열무정이라고 표시되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서 1872년 전후 열무정 정호(亭號)가 명명(命名)된 것으로 본다면 2017년으로 부터 145년 전으로 추고해 볼 수 있다. 만일 전라병영사가 천거하였다는 설에 의하면 이를 뒷받침할 주변상황으로 사적397호인 강진 전라병영성은 조선 1417년(태종 17년)에 초대 병마도절제사 마천목 장군이 축조해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까지 조선왕조 500년간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 총지휘부였다. 전라병영성은 1894년 동학란 때 성내(城內)의 모든 건물이 소실됐고, 1895년 해체돼 일부 성곽만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10. 제 언
사정(射亭)이 1535년에 창건되었다면 우리 지역 영암에 왜 세워졌는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뒷받침 할 조선시대의 초기의 영암의 지리적 위치에 관련된 문헌을 다음 편에서 찾아 보고하고자 한다. 그리고 열무정으로 정호(亭號) 명명(命名)하고 현판(懸板)을 쓴 정두칠(丁斗七), 열무정 중수기를 쓴 송명회(宋明會)는 어떤 인물인지 기록을 찾아보았지만 아직은 밝히지 못하였다. 이 또한 우리가 밝혀내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2017년 3월로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된 지 30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또한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1950년-2010년까지의 문서는 열무정 중수로 인하여 도갑사 수장고와 사포계 사무실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를 국역하고 보관해야 할 수장고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Ⅱ. 사정(射亭) 창건의 시대적 배경
1. 조선시대의 영암
조선초기의 행정편제를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영암군조를 통해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지역만이 영암의 관할아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①백제(百濟) 월나군(月奈郡)이래의 영암 본 지역 ② 백제 고미현(古濔縣)이래의 곤미(昆湄)지역 ③ 향(鄕)으로 북평향(北平鄕, 현 해남군 북평면 : 남창, 이진포함 ) ④ 부곡(部曲)으로 송지부곡(현 해남군 송지면) ⑤ 월경처(越境處)로 강진의 무위동(無爲洞), 월남동(月南洞), 구은촌(仇隱村), 좌곡리(佐谷里), 상곡리(上谷里), 해남의 비곡(比谷), 별진(別珍), 북구미(北仇未), 묵산(墨山, 강진 성전면 일부와 해남 계곡면, 옥천면 지역) 등이다.
한편 영암지역인 금정(金井), 신북(新北), 시종(始終)지역은 나주 혹은 진도의 땅으로 대한제국기(1906년)까지 존속하였다. 그리고 현재 영암관내가 아닌 지역으로서 영암에 속했던 곳으로는 위에서 본 해남의 송지면, 북일면, 북평면, 계곡면, 옥천면 일부와 강진면, 성전면 일부, 완도의 일부가 월경지로 속해 있었다. 결국 이 조선초기의 영암은 대한제국기까지 거의 변함이 없이 존속되었다.
2. 영암읍성에 대하여
영암읍성은 조선시대 지방의 수령이 지역을 관할하던 곳으로 문화와 행정의 중심지였다. 읍성은 왜구를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 말에 짓기 시작하였는데 1433년 겨울 규모로 확장하였으며 1452년에 옹성(甕城, 성문을 엄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으로 쌓은 성)과 해자(垓字, 동물이나 외부인, 특히 외적으로부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성(城)의 주위를 파 경계로 삼은 구덩이를 말한다. 방어의 효과를 더욱 높이기 위해 해자에 물을 채워 넣어 못으로 만든 경우가 많았다)까지 완공되어 전체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조선시대 일반적인 읍성의 축조 방법에 따라 영암읍성 외벽은 돌로, 내벽은 흙으로 경사지게 덮어 처리한 내탁(內托)식 이며 구조는 외벽과 채움부, 내탁부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영암읍성은 전체 길이가 2,010m, 영암읍 서남리, 남풍리, 동무리, 역리에 걸쳐있다.
오랜 역사를 지나는 동안 성벽의 일부가 훼손되었지만 전체적인 외관을 살펴보면 외벽은 120-210cm, 내벽 높이는 320cm이며, 너비는 뒷채움부가 470m-560cm, 내탁부가 500cm로 외벽 면적을 포함한 총 너비는 10-11m이다. (영암읍성 안내판)
3. 사정(射亭) 창건의 시대적 배경

㈎ 고려말 왜구
1350년(고려 제30대 충정왕 13년) 2월에는 왜구가 고성, 죽말, 거제, 등지에 나타나 노략질을 일삼자 고려조정은 합포천호 최선과 도령 양관 등에게 군사를 내주어 3백여명의 왜구를 죽였다. 그 때부터 왜구의 침입이 더욱 심해져 3월에는 연성군 이권을 경상 전라도 도지휘사로, 첨의참리 유탁을 전라·양광도 도순문사로 보내 왜구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에 왜구들은 4월에 순천부에 침입하여 남원, 구례, 영광, 장흥 등지에 있는 운수선을 약탈하는 등 민심을 흉흉하게 하였다. 또 6월에는 왜선 20척이 합포에 침입하여 그곳의 병영 및 고성 회원 등의 민가를 불살랐다. 왜구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1월에는 동래군을 침입하였고, 이듬해 8월에는 130여척의 배를 거느리고 자연도와 삼목도에 침입하여 인가를 거의 불사르고 백성들을 잡아갔다.
고려는 1351년 12월에 공민왕이 즉위하였으나 원의 핍박과 권문세족의 착취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었다. 국력은 쇠퇴할 대로 쇠퇴하고 왕권은 약해졌다. 이 틈을 타 북으로는 홍건적이 쳐들어오고 남으로는 왜구가 침략해 왔다. 1378년에 전라도 운봉(雲峰)지방에 쳐들어온 아기발도(阿其拔都)라는 젊은 왜장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이성계는 크게 섬멸하였다. 이 전투를 흔히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고려사 왕조실록)
㈏전라병영성
사적 397호인 강진 전라병영성은 1417년 조선 태종 17년에 지금의 광주광역시인 광산현(光山縣)에 있던 병영을 지금(강진군 병영면)의 터인 당시 도강현(道康縣)으로 옮기어, 당시의 초대병마도절제사 마천목(馬天牧)장군이 축조해 1895년 (고종32년) 갑오경장까지 조선왕조 500년간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6진을 총괄한 육군 총지휘부였다.(강진 작천면 전라병영성 안내판) 둘레가 2,820척이고 높이가 10척 8촌이라 하였다. 1599년에 병영을 일시 장흥(長興)으로 옮겼다가, 5년 만에 성곽을 수리하여 다시 병영이 되었고, 임진왜란 직전인 1581년까지에 대대적인 수축이 있었다. 1894년 12월 4일에 동학농민군이 장흥성을 함락하고, 이어 10일에는 병영성이 함락되었다.(동아백과사전)
㈐중종시대 정세
사정이 창건될 당시 1535년은 조선 제11대 왕으로 등극한 중종시대의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조정은 훈신(勳臣)과 척신(戚臣)사이에 정권쟁탈로 불안했으며 국방정책은 북쪽의 야인(野人)과 남쪽의 왜구(倭寇)들의 끊임없는 노략질로 불안하였다. 1506년에 왜인들이 삼포왜란을 일으켰으며, 1510년(중종5) 4월에는 삼포의 왜인들은 조선 침략으로 난도(亂徒)들을 이끌고, 부산포와 제포에서 약탈·학살 등의 만행을 자행하고 웅천성·동래성까지 침공했다. 이에 조선 군대는 왜적을 공격하여 섬멸시켰으며 난은 평정되었다. 그후 1512년 임신조약(壬申條約)을 체결하여 국교가 회복되는 동시에 제포만 다시 개항하였으나 1522년 5월에는 추자도 왜변, 동래염장 왜변 등이 있었고, 1529년에는 전라도 왜변, 1544년에는 사량진 왜변이 발생하였다.
1555년(명종10) 을묘왜변(乙卯倭變)때 왜구가 달량진(達梁津)으로 쳐들어오자 병사 원적(元績)이 달량진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전하였으나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었다. 그 후에도 대마도와 일본 해적들은 다도해, 제주도, 전라남도 해안가 약탈과 침략은 계속되었으나 조선조정에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결국 1555년(명종 10년) 일본 해적이 전라남도의 변장들을 살해하고 10개 진을 함락시키는 을묘왜변이 발생한다. (조선왕조실록)
㈑전라도 왜변
1555년(명종 10) 왜구들이 배 70여척으로 강진·진도 등 전라남도 연안지방을 습격한 사건으로 을묘왜변(달량포왜변)은 삼포왜란(三浦倭亂) 이래 조선 정부의 세견선(歲遣船) 감축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왜인들이 1555년 5월 11일 달량포(達梁浦,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와 이포(梨浦) 등을 침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 조정은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元積) 등을 출전시켜 왜구와 싸우도록 했으나 패하였고, 오히려 왜구들은 어란포와 장흥·강진·진도까지 침입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정부는 다시 중앙의 정예군사와 이윤경(李潤慶), 남치훈(南致勳) 등을 파견하여 토벌하도록 하였고, 마침내 5월 25일 적을 크게 격파함으로써 왜구를 몰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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