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왕인문화축제 학술강연회 주요내용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
2018년 04월 06일(금) 11:15 |
박 교수는 이어 “왕인박사와 일본 와니(화이) 씨족이라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5~6세기 일본 황실의 외척으로 세력을 떨쳤던 일본 近畿지역의 호족 와니씨족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하며, 이들 씨족에 과연 어떠한 도래계 씨족이 언제 어떻게 합류되었는가를 살피고, 이를 종합해 씨족의 성격과 왕인 후계씨족과의 관계를 밝히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관련된 일본 내의 전적과 문서 등에 대한 조사 수집 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또 “신찬성씨록에 전하는 도래씨족의 고대 한반도 도래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점검이 필요하다”면서, “왕인의 백제 출자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이면서도, 낙랑·대방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인색해 그 출자를 밝히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한 객관적인 자세와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 교수는 “문헌으로 확인되지 않은 많은 사실들이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증빙되고 있음은 오늘날 고대사 연구자들이 모두 느끼는 바다. 이에 따라 일본 구주(九州)와 近畿지역에서 발견된 마한계 토기나 자료 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문헌학자와 고고학자간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구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영산강 유역은 중부 백제권의 문화와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고, 독자적인 문화를 지녔던 것으로 고고학적 자료는 웅변하고 있다. 또 신찬성씨록에는 백제계와 중국계 씨족뿐만 아니라 고조선의 준왕(準王)과 위만(衛滿)의 후예들조차 명기하고 있다. 이는 마한계 유물과 유적이 일본 구주나 근기지방에서 출토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의 대량 이주는 전란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지적한 박 교수는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의 후신인 보덕국의 멸망 때에 대규모의 유망민이 일본에 이주했음은 잘 알려진 바지만, 마한의 멸망 이후 일본으로의 이주를 생각할 수 있고, 이러한 부분을 밝힐 수 있다면 백제사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편 박 교수는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는 왕인박사와 동일한 음가를 가진 화이부(和珥部)가 등장하며, 이들은 5세기에서 6세기 후반에 걸친 응신(應神), 반정(反正), 웅략(雄略), 인현(仁賢), 계체(繼體), 흠명(欽明), 민달(敏達) 등 7명의 천황에게 총 9명의 후비를 제공한 일본 황실의 최대 외척씨족으로 일컬어진다”면서, “우리 학계에서는 이들 화이씨가 씨명이 ‘와니’로 읽히고, 왕인박사의 고사기의 이름 ‘화이길사(和邇吉師)’의 ‘화이(和邇)’와 동일하게 쓰이기도 한다는 점, 이들의 본거지 야마토 남부지방이 가와찌(河內) 지방 출신인 왕인박사의 후손들이 야마토 정권에서 문서 관련 업무를 관장하면서 야마토 남부의 인접 지역에서 거처했다는 점 등을 들어 왕인박사의 일족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또 “일본 학계는 이에 대해 백제 ‘도래인’ 계열의 왕인의 후예와 일본 황족으로서 가와찌(河內)지방의 호족인 와니씨와는 전혀 혈연적으로 연결될 이유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백제 왕인의 후예와 일본 황족인 와니씨를 전혀 결부시키지 않고 있다”면서, “이러한 韓日 양국 학계의 인식 차이를 극복하고, 왕인박사의 정당한 지위를 찾기 위해서는, 와니씨와 왕인박사의 관계를 살필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아직 연구 초기 단계에 불과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쟁의 중심이 되어 왔던 문제의 소재와 문제점을 밝힐 때에 새로운 연구방향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왕인의 출자에 대해서는 백제인설과 중국인설, 영암출생설, 백제이주 중국인설, 6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에 일본에 건너간 왕진이를 모델로 만들어낸 가상인물로 보는 설 등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왕인이 일본에 건너간 시기와 관련해 왕인박사와 와니씨의 명칭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관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면서, “일본 고사기의 화이길사(和邇吉師)와 일본서기의 왕인(王仁)을 동일인으로 보는 데는 이론이 없으며, 다만 화이(和邇)를 본명으로 보는 견해, 중국인 성씨인 왕(王)씨와 이름이 인(仁)이라는 견해, 화(和)를 성(姓), 이름을 이(邇)라고 보는 견해, 그리고 왕인(王仁, 和邇)의 이름이 그 집안의 성씨 와니(和珥)가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고 소개했다.
특히 박광순 교수의 경우 왕인박사의 본래의 성은 화(和), 이름은 이(邇)였는데, 7세기 말 비(妃)를 많이 배출해 활동을 이어가게 한 가문은 화씨 그대로 씨족의 이름으로 두고, 그렇지 못한 가문(支族)은 ‘왕(王)’씨로 바꾼 것으로 보았다. 박 교수는 이에 따라 환무천황의 어머니는 본래 백제 무령왕의 후손으로 일찍이 귀화해 야마도에 본거를 둔 ‘화신축(和臣竺)’이었으나, 왕비가 되자 곧바로 왜성(倭姓)인 ‘고야신축(高野新竺)’으로 바꾸는데, 이는 화(和)씨가 본래 귀화 씨족으로 왕인(和邇 왕인의 본래 명)의 후예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 지족들이 화씨를 왕씨로 바꾼 것은, ‘큰 스승님’이란 의미에서 그들의 선조를 ‘왕인(王仁)’이라 일컫고, 그런 배경에서 왕인보다 훨씬 후에도 백제에서 모셔온 박사나 ‘후미히도(史)’계 씨족인 왕진이(王辰爾)를 비롯해 오경박사 왕유귀(王柳貴) 등이 그 본래의 성을 제쳐두고 ‘王’씨로 개성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 왕인박사와 일본 고대 씨족 화이(와니)씨
王仁=和邇길사=和邇씨는 동일 인격, 동일 실체
화이(와니)씨는 재지호족 아닌 도래계 씨족집단
나행주 건국대 교수는 ‘왕인박사와 일본 고대 씨족 화이(와니)씨’라는 주제의 강연을 통해 “815년 공식적으로 편찬된, 국가공인의 당시 지배층의 출자(출신)를 규정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기내(畿內 수도)를 본거지로 하는 총 1천182개 씨족에 대해 그 출신을 황별(皇別), 신별(神別), 그리고 제번(諸蕃, 蕃別)으로 구분해 수록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도래계인 제번은 326개 씨족으로 전체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면서, 반면에 “나머지 3분의 2를 차지하는 천황가의 후예라 칭하는 황별, 천신지기(天神地祇)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신별로 분류 규정된 씨족 가운데에도 그 출자를 추적해 보면 실제의 출신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도래계 씨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나 교수는 “그 사례의 하나로서 주목되는 씨족이 바로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7명의 천황에게 9명의 후비(后妃)를 제공한 일본 고대의 대표적인 외척씨족의 하나로, 전후 시기의 가쓰라기(葛城)씨 및 소가(蘇我)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황별 씨족인 화이(和邇, 와니)씨의 존재를 들 수 있다”면서, “무엇보다도 와니(和邇)씨는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즉 유학과 학문)을 전한 것으로 사서(고사기)에 기록된 왕인(王仁 일본명 ‘와니’) 박사와의 관련성이 주목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나 교수는 또 “일본학계의 통설적인 이해는 和邇(와니)씨가 황별의 토착씨족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으나, 이에 대해 일부 화이(와니)씨의 출자를 의심하는 연구가 제시되어 있다”면서 “마루야마(丸山)는 고고학적 견지에서 근강(近江, 현 시가현)지역의 고분에 대한 연구를 기초로 근강지역 화이(와니)씨, 진야(眞野)씨의 출자와 관련해 제철유적과의 관련성을 통해 한반도계로 추정하고 있고, 야마오(山尾)도 문헌사학의 입장에서 ‘와니(鰐)’씨라는 씨족명의 분석을 통해 제철집단으로서의 화이(와니)씨의 특징에 주목해 그 출자를 한반도와 관련시켜 이해하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나 교수는 “야마오의 경우 본문이 아닌 주에서 간단히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정도”라면서, “결국, 韓日 양국학계에서 특정주제에 대한 전문적인 논문으로 화이(와니)씨의 출자에 대해, 특히 왕인(와니) 및 그 후예씨족과의 관련성 속에서 직접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연구는 이번이 처음으로, ‘왕인박사와 일본 고대 씨족 화이(와니)씨’라는 주제논문은 그 최초의 시도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나 교수는 화이(와니)씨와 왕인박사의 관련성을 살펴보기 위한 출발점으로 화이(와니)씨의 씨명이 유래된 관련 지명에 대한 검토, 씨족 고유의 직장에 대한 검토, 황별 화이(와니)씨 동족집단에 대한 가바네의 변천 추적, 동조(同祖)관계와 실질적인 출자 추적, 출자개변의 정치적 현실적 이유와 의미 검토 등 다섯 가지를 꼽았다.
이를 통해 나 교수는 다음 네 가지 점에서 화이(와니)씨와 왕인박사 일족의 공통성이 확인된다고 주장했다.
첫째로는, 화이(와니)라는 씨족명과 왕인(와니)이라는 인명의 일본음 및 한자 표기에 있어 완전한 일치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황별씨족 和邇(와니)씨는 和爾, 和珥, 和仁, 丸邇, 丸爾, 丸, 鰐 등 다양한 한자로 표기되는데, 일본음으로는 모두 ‘와니’로 발음되는 씨족이다. 이 경우 화이(와니)는 씨족명이다. 한편, 王仁(와니)박사는 고사기에서는 和邇吉師, 대승정사리병기에서는 王爾 등으로 표기되고 있는데, 일본음으로는 역시 ‘와니’이다. 주목되는 것은 개인명 王仁은 和邇나 王爾 등으로도 표기되고 있다는 점으로, 결국, 씨족명 和邇(와니)와 개인명 和邇 즉 王仁(와니)은 한자표기와 일본음 발음 모두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이는 동일한 실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론적으로, 왕인을 의미하는 和邇길사는 화이(와니)씨 자체를 의미하며, 따라서 황별씨족 화이(와니)씨는 백제에서 건너간 왕인(와니)박사=和邇(와니)길사와 동일인물·동일 실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고 나 교수는 주장했다.
나 교수는 또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和邇=王仁은 인명인 동시에 자신의 집안을 나타내는 씨명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왕인의 경우, 한 인물의 이름(성+명)이 곧 그 집안의 성씨(씨명)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유사 사례로 유일하게 아직기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즉 아직기(阿直岐)는 아직기 자신의 인명인 동시에 그후예들의 성씨(阿直岐史)다. 결국, 왕인박사와 아직기의 경우를 제외하면, 고대일본의 성씨 가운데 이와 같은 사례는 일례도 발견할 수 없다”면서, “일본고대의 성씨의 유래는 예외 없이 자신들의 주거지(근거지)에서 유래하는 경우이거나, 왜 왕권 내에서 맡은 직무(직장)에서 유래하는 경우, 그리고 천황이 직접 하사한 성씨이다. 그런데, 왕인의 경우에 있어서는 아직기의 경우와 약간 다른 점이 주목되는데, 그것은 아직기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남녀(아들딸)계 모두에게 계승된 씨족명이라면, 왕인(화이, 와니)의 경우는 본인 및 여계(혹은 모계)에게만 계승되었다는 점이다. 즉 왕인의 후예 가운데 文, 馬, 藏 등 남계는 모두 부계의 성씨가 아닌 왜왕권 내의 직장·직무에서 유래하는 씨명을 지니고 있다. 결국, 황별씨족으로 분류된 和邇=和珥(와니)씨는 한반도 백제의 王仁=和邇(와니) 집안 자체이거나 딸 집안으로 이어진 씨족명이 아닐까 추측된다”고 지적했다.
화이(와니)씨와 왕인박사 일족의 공통성을 확인하는 두 번째 근거로 나 교수는 양자의 존립기반이라 할 수 있는 지역적 공통성을 꼽았다.
나 교수는 “왕인박사의 후예인 문씨, 장씨, 마(무생)씨 등의 거주지는 河內國 古市郡 古市(현재의 오사카부 하비키노시 후루이치)이며, 왕인후예와 동족관계를 형성한 왕진이 일족(선씨, 진씨, 갈정씨)이 인접지역인 동국 丹比郡(현재의 후지이데라시 후지이데라)에 있었다. 즉, 왕인박사의 후예들은 中河內지역을 지역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서, “和邇=和珥(와니)씨의 경우도 이 지역과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즈노(水野)의 연구에 따르면 천황릉의 소재지는 皇后領 혹은 황후 출자 씨족의 氏地(즉 근거지)에 위치하는데, 羽曳野市域에 위치한 후루이치(古市)고분군의 천황릉에 비정되는 능묘 淸寧·仁賢·安閑陵 가운데 2천황은 그 황후의 출자가 和邇=和珥(와니)씨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후루이치지역이 和邇=和珥(와니)씨의 중요한 세력기반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 교수는 화이(와니)씨와 왕인박사 일족의 공통성을 확인하는 세 번째 근거로 천황가와의 관계를 꼽는다.
“우선, 和邇(와니)씨가 지닌 호족으로서의 최대의 특징은 일본고대 천황가의 외척씨족이라는 점”이라고 지적한 나 교수는 “왕인박사와 응신천황, 왕인과 응신의 태자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왕인박사의 집안과 응신왕가와의 혼인관계 성립 가능성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즉 가와치(河內)신왕조를 창설한 응신천황에게 있어 왕인박사는 의지할 수 있는 최고의 브레인이자 정치고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응신에게 있어 왕인박사는 새롭게 창조한 신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나아가 야마토국가의 국가체제 및 대외정책의 방향 등을 설계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귀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실제로 5세기의 초창기 야마토 왕권에서는 부관제(府官制), 인제(人制), 부민제(部民制)로 대표되는 각종 지배시스템이 기능하고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이러한 각종 지배체제·국가제도는 백제식의 지배방식을 도입한 결과이며, 특히 왕인박사의 주도에 의해 백제식의 각종 지배체제가 직접적으로 도입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나 교수는 이어 “왕인박사와 응신왕조의 밀접한 관련성은 천황 및 왕자그룹과의 관계 속에서도 확인된다”면서, “특히 왕재교육을 담당하는 동궁학사 시학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당시의 태자의 스승으로서 뿐만 아니라 후에 실제로 즉위하는 왕자 인덕 등도 함께 교육시켰을 것이라는 점, ‘난파진가’를 바치며 즉위를 권했다는 고금화가집의 내용을 전제로 하면 왕인박사가 인덕의 즉위에도 일정한 관여·조력을 했을 가능성마저 충분히 상정되는 점 등을 통해 확인된다. 결국, 이러한 왕인박사 집안과 응신왕가와의 공적 사적으로 맺어진 밀접한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대왕(천황)가와 혼인관계가 성립했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 교수는 화이(와니)씨와 왕인박사 일족의 공통성을 확인하는 네 번째 근거로 왕인(와니)이 일본의 유학, 학문의 시조이자, 문학(특히 와카)의 시조로도 평가되고 있는 점, 후예 씨족인 문(서)씨로 대표되는 왕인(와니) 후예씨족이 한자문화의 사용을 전제로 외교(외교문서 작성)와 재정 등 문서행정에 깊이 관여한 점은 화이(와니) 씨족의 동족 가운데 외교에서 활동한 오노(小野)씨, 문학에 큰 자취를 남긴 가키모토씨와의 직장, 활동방면에서의 공통성을 꼽았다.
나 교수는 화이(와니)씨의 출자와 관련한 연구결과도 제시했다.
나 교수에 따르면 황별 씨족인 和邇(와니)씨(=春日씨·大春日씨)와 그 동족인 小野씨, 眞野씨 등이 모두 일본 재지의 토착호족이 아니라, 한반도 즉, 다름 아닌 백제에서 건너간 도래계 씨족집단이다.
나 교수는 “왕인(와니)을 조상으로 하는 후예씨족 가운데 하나인 高志(古志=고시)씨는 저명한 대승정 행기스님을 배출한 집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고시씨의 氏社로 간주되는 高石(고시)신사가 존재하는데, 신사의 제사신에 대해 ‘조상신인 왕인을 제사 지낸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왕인의 후예임이 분명한 고시씨가 실은 大春日씨 즉 和邇=和珥씨와 동족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고시씨와 마찬가지로 和邇씨=大春日씨는 왕인 박사와 밀접불가분한 관련성을 지닌 씨족임을 말해준다”면서,“결론적으로, 王仁박사(일본서기)=和邇길사(고사기)=황별 외척씨족인 和邇씨(신찬성씨록)는 모두 ‘와니’로 불리는 동일 인격, 동일 실체(집단)를 말하고 있다는 점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나 교수는 ‘왕인=화이=와니’가 동일 실체임을 말해주는 근거 가운데, 동족관계의 분석을 통해 얻어진 결과를 삼단논법으로 제시했다. 즉 “황별 和邇(와니)씨 일족인 眞野(마노)씨가 백제계(왕인후예)인 번별 씨족 民(다미)씨와 동족이고, 번별 백제계(왕인후예) 高志(고시)씨가 황별 和邇(와니)씨=大春日(오오가스가)씨와 동족이어서 왕인(와니) 일족(高志씨·民씨)과 和邇씨 일족(眞野씨·大春日씨)은 동족”이라면서, “결국 양자는 동일 실체로서 화이(와니)씨가 재지호족이 아닌 백제에서 건너간 왕인박사와 관련된 씨족임이 명백하다”고 결론지었다.
나 교수는 또 ‘화이(와니)씨의 출자가 도래계에서 황별씨족으로 바뀐 이유’에 대해 “화이(와니)씨=왕인(와니)박사 집안과 왜국 왕실(천황가)과의 혼인관계로 인한 인척관계의 형성 즉 양자의 혈연적 결합에 의해 그 출자가 어느 시기인가 한반도계(번별)에서 일본계(황별)로 전환, 개변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농후하다”면서, “출자가 한반도계로 간주되는 씨족 가운데 정치적으로 천황가와 밀접한 관련성, 즉 천황가에 후비(后妃)를 제공해 외척관계를 맺게 되는 씨족들의 경우, 공통적으로 그 출자가 황별 혹은 신별로 되어 있다. 蘇我(소가)씨와 息長(오키나가)씨, 그리고 茨田(만다)씨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나 교수는 “고대 일본에서 출자가 개변된 경우는 다수의 사례가 확인된다”면서, “제번 즉 도래계 씨족 가운데 한반도계(백제나 신라)에서 중국계(진한)로 개변된 경우로 秦씨(신라, 가야계
혹은 백제계)와 漢씨(백제계), 그리고 왕인후예인 文(書)씨, 왕인후예와 동족관계를 형성한 왕진이 후예씨족들을 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일본 近畿지역의 王仁과 和爾氏 관련 유적
초기 왕인의 본거지는 현 덴리시 와니정 일원
홍성화 건국대 교수는 ‘일본 近畿 지역의 王仁과 和爾氏 관련 유적’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통해 “近畿지역 내 왕인과 관련한 유적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왕인과 관련성을 찾기 어려운 전승에 불과한 유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왕인과의 직접적인 관련성보다는 후예 씨족의 유적으로 남아 있는 형국”이라면서,“따라서 도왜(渡倭)한 왕인의 직접적인 본거지를 살펴보기는 힘들다. 다만, 후예 씨족의 유적은 하비키노(羽曳野)의 후루이치(古市)를 중심으로 해 대체적으로 오사카 남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近畿지역 내 왕인과 관련된 유적에 대해 홍 교수는 히라카타시의 ‘傳王仁墓’를 들었다. “오사카의 히라카타시(枚方市) 후지사카(藤坂)에 있는 ‘傳王仁墓’는 뒷 돌담을 둘러친 사이로 자연석 하나가 있고 그 뒤에는 ‘박사왕인지묘’라고 쓴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히라카타에 왕인묘가 처음으로 고증이 되어 묘역이 다듬어진 것은 1731년, 현재와 같이 오사카부 사적으로 지정된 것은 1938년”이라면서 “1616년 히라카타의 긴야(禁野)정에 있는 와다사(和田寺)의 니시무라 도슌(西村道俊)이 자칭 왕인의 자손이라 하고는 ‘왕인분묘내조기사(王仁墳墓來朝紀寫)’를 썼다. 이 기록에 의하면 후지사카(藤阪) 마을 오하카타니(御墓谷)에 있는 ‘도깨비묘’는 왕인묘가 변한 것이라 쓰고 있다. 이후 1731년 그것을 본 교토의 유학자 나미카와 고이치로(竝川五一郞)가 藤坂 부근에서 왕인묘를 찾던 중 현재의 자연입석을 발견하고 왕인묘로 삼았다”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이어 “왕인의 묘라 부르는 곳으로는 오사카시 오요도(大淀) 오닌(大仁)에 야사카신사(八坂神社)가 있다. 신사 내에 한 그루 소나무가 서 있어 一本松明神이라 하는데, 예로부터 왕인을 제사지내 王仁大明神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후 소나무 밑에서 석관이 발굴되자 이를 왕인총이라 주장하게 됐다. 신사가 위치한 동네 이름인 오닌(大仁)도 왕인을 音讀한 오니가 변한 것이라고 전한다”면서, “왕인박사의 실질적인 출자에 관해서는 그 후예인 高志씨 출신의 行基스님(668∼749)의 묘지명을 통해 직접 확인된다. 사카이시(堺市) 에바라사(家原寺)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行基 스님은 백제계인 다카시(古志)씨족으로 알려져 있으며 82세의 일기로 입적, 화장되어 이코마산 부근에 안치되었는데, 그의 사후 480년이 지나서 발굴된 사리함(行基菩薩遺身舍利之甁)속의 대승정사리병기(大僧正舍利甁記)에서 ‘그의 俗性은 高志씨로…백제 왕자 王爾의 후손이다’라는 글귀가 발견되었다. 신찬성씨록에는 古志連이라는 성씨가 王仁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홍 교수는 또 “와니씨의 유적을 고찰해볼 때 초기 왕인(王仁)의 본거지는 나라 현 덴리시(天理市) 와니정(和爾町) 일원일 가능성이 높다. 應神代에 渡倭했던 왕인의 경우 야마토 일원에 위치해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왕인박사와 應神왕조의 밀접한 관련성은 당시의 태자의 스승으로서 뿐만 아니라 왕인박사의 주도에 의해 백제식의 각종 지배체제가 직접적으로 도입·운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홍 교수는 이어 “應神의 경우 거주했던 경도풍명궁을 현재 나라현 강원시 대경정으로 비정할 수 있기 때문에 왕인의 본거지가 천리시 화이정 일원일 가능성은 더욱 높다”면서, “더욱이 왕인의 도왜와 비슷한 시기에 백제로부터 왜 왕권에 전달되었던 칠지도가 부근 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정황도 왕인의 본거지를 화이정 일원으로 보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홍 교수는 또 “왕인의 후예 씨족인 西文氏와 古志氏 등은 하비키노의 후루이치를 중심으로 해 이즈미(和泉) 등 오사카 남부 지역으로 세력을 펼쳐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