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論 코스프레(cosplay)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
2018년 06월 15일(금) 13:48 |
'올바른 신문은 어떠한 부정이나 악과도 타협해서는 안 된다. 참다운 언론인은 금력이나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또 결코 관권에 아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회정의에 불타는 언론은 언제나 깊은 '휴머니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 그리고 정당의 선동주의자들에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정치가 1천명의 부패보다 한 사람의 신문인의 부패가 더 무섭다는 것을 투철히 인식해야 한다. 정치를 안 하는 언론이 정치를 잘하는 언론이다.
언제나 절필을 각오하고 티끌만한 곡필도 배격해야 한다. '소리 없는 백성의 소리'에 조심히 귀를 기울이라. 거기서 당신은 거짓 없는 야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말없이 황야에 씨를 뿌리며, 앞으로 앞으로 가라!
신문인은 인권옹호의 투사이어야 한다. 유달리 한 사람의 생명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생활이 없는 언론은 휴지다. 언론은 버림받고 있는 농산어촌, 낙도로 뚫고 들어가야 한다. 잠깐 보고 버리는 싸구려 신문이 아니고, 두고두고 독자의 가슴 속에 메아리치는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
언론인은 결코 대필사(代筆士)가 아니다. 그냥 쓰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권부보다도 오히려 민중의 신뢰를 받는 민간신문을 만들어 한다.
악을 공격하는데 있어서는 특수계층이든, 야당이든, 여당이든 서슴치 말고 해대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공익과 민의를 뒷받침하는 신문의 길이기 때문이다. 언론인은 악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양심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신문인은 '백성의 고발자'다. 이런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서, 언론인은 때에 따라 투옥을 각오하고 부단히 싸워야 한다. 언론인은 공익을 위해 진실을 보도하는 것을 정당한 임무로 여길 뿐, 뉴스 제공자에게 생색을 내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기자는 사회병리를 미시적으로 보는데 그치지 말고, 거시적으로 관찰하는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기자는 편견을 없애기 위해 색안경을 벗어야 한다. 기자는 역사의 초침적(秒針的 )기록계원이다. 숨져가면서도 끝내 기록을 남기는 게 기자다. 기록은 엄숙하다. 기록을 외면할 때, 모든 바탕은 일그러진다. 기자는 꿈틀거리는 현장의 사회과학도이어야 한다. 기자는 사회운동자적인 자세를 지녀야 한다.
신문을 엄숙한 직업으로 믿는 언론인은, 끝내 평민적인 자세를 지녀야 하며 영원히 야적(野的)이어야 한다. 기자는 낡은 것보다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여야 한다. 언론인은 사회개혁자임을 자부하여야 한다. 민중의 편에 드는 언론은 비민주적인 어떠한 횡포와도 끝내 싸워 이겨야 한다. 황야에 속속들이 씨를 뿌리며 가라. 거두기를 서둘지 말라. 그것은, 다음 세대에 미루어도 좋다.
기자는 비극의 예방자다. 지역감정을 부채질하는 것 무서운 편견이다. 기자는 화해의 중간자가 될 때 훌륭하다. 미움을 사랑으로 이끌 수 있는 기자다 대기자다. 전쟁을 평화로, 미움을 사랑으로, 파괴를 건설로, 대립을 화해로 이끌 수 있는 기자만이 훌륭하다.
언론인의 자리가 이처럼 중요시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언론의 전진 없이 진정한 자유는 없다. 선의·양심 있는 기자가 최후의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한, 우리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요즈음 우리사회에 언론을 코스프레 한 사이비들이 너무 많이 어슬렁거린다. 언론자유의 우산 속에 웅크린 그들은 타락한 언론의 민낯을 무서운 흉기처럼 적나라하고 서슴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그 폐해는 돌이키기 어려운 상처가 될지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권력은 어떤 경우라도 언론을 이용해선 안 되는 법이다. 더구나 권력은 어떤 경우라도 언론을 만들어선 안 된다. 권력과 결탁한 언론은 결코 언론일 수 없다. 언론을 코스프레 하는 사이비일 뿐이다. 오늘, 다소 뜬금없이 '나의 信條'를 떠올린 까닭은 사이비들이 방패삼은 언론자유의 우산을 걷어치울 수 있는 힘은 '깨어있는 군민들의 조직된 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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