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구정봉은 천황봉과 함께 중요한 祭祀 터

영암문화원, 구정봉 일대 지표조사 제사전통 및 월출산 제일봉 위상 확인
구정봉 '큰 바위 얼굴' 정수리 부근에서는 납 구슬도 6개 발견 의미 주목

이승범 기자 stonetigs@hanmail.net
2019년 01월 11일(금) 13:39
월출산 최고봉인 천황봉과 더불어 구정봉 역시 중요한 '제사 터'였다는 사실이 지표조사를 통해 처음 확인됐다.
영암문화원(원장 김한남)은 최근 월출산 구정봉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구정봉 정상에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파편 유물을 다량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견된 유물들은 13세기 고려청자, 14,5세기 회청자 및 분청사기, 17,8세기 조선백자 등으로 추정됐다.
특히 비교적 원형이 보존된 중자명백자잔(지름 7.5×높이 3.7㎝)은 잔 바닥에 '中'자가 점선으로 새겨져있으며, 도갑사에 이와 유사한 형태의 명문이 새겨진 백자가 대량으로 발굴된 바 있다고 문화원은 밝혔다.
문화원의 이번 구정봉 일대 지표조사는 지난해 11월 문화원이 개최한 '월출산 인문학 포럼'에서 김한남 원장이 '구정봉의 기우제'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영암향교에 보관중인 오례의(五禮儀)에 들어있는 '구정봉 기우제 축문' 4가지를 번역해 발표하면서 천황봉 제사유물과 더불어 월출산 구정봉에 대해서도 연구 필요성을 제안한데 따른 것이다.
문화원은 이에 구정봉 제사 터 조사팀을 구성, 제사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지난 12월 17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월출산 구정봉 정상 일원 180㎡의 절벽 상층부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했다.
영암문화원은 「삼국사기」 제사조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는 명산대천에 제사를 대사, 중사, 소사로 나눠 지냈다고 설명했다. 경주 부근 명산에서는 대사, 오악에서는 중사, 월출산과 같은 명산에서는 소사가 치러졌다. 신라시대 월출산은 월나악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적 제사인 소사가 거행됐다.
문화원은 또 고려시대에는 산천제를 대·중·소사 등으로 구분하지 않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설명했다. 월출산을 월생산으로 부르며 국가가 주관하는 국제(國際)를 거행했다. 그러나 이런 국가적 제사가 월출산 어디에서 이뤄졌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는 상태였다.
다만 김 원장이 공개한 4가지 '구정봉 기우제 축문'에 의하면 백성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군수가 주관하는 기우제가 구정봉에서 지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 1994년 월출산 천황봉에 대한 조사 결과 제사 흔적이 담긴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천황봉에서 산천제를 지냈음이 밝혀진 바 있다. 당시 발견된 말 모양의 토우와 철재말은 영암문화원에 보존되어 있다.
반면에 그동안 구정봉에 대한 학술적인 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으며, 이번에 영암문화원의 지표조사가 이뤄진 결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제작된 도기파편을 수거함으로써 천황봉과 더불어 구정봉이 월출산의 중요한 제사 터였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김한남 원장은 "구정봉 제사 터 지표조사 결과 발견된 유물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청자, 조선초기의 분청자, 조선중후기 백자까지 다양하다. 특히 높은 산악지대인 만큼 발견된 도자 파편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과거 산행이 일반화되지 않은 시기에 그릇을 운반해 왔다는 것은 특별한 제사의식을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면서, "앞으로 구정봉 제사유적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구정봉 제사 전통의 규모 및 내용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영암문화원은 이번 조사과정에서 특이한 납 구슬 6개를 발견했다고 밝혀, 주목을 받고 있다. 납 구슬은 구정봉 정상 '큰 바위 얼굴'의 정수리 부위에서 발견됐다. 납 구슬은 지표면 5㎝ 아래에 꽃모양으로 6개가 배치돼 있었다. 납 구슬은 비교적 완벽한 환형으로 표면에 가는 실선의 돌기가 있으며, 지름 6.5㎝, 무게 1.6㎏이다.
이와 유사한 납 구슬은 전국 20여곳의 사찰에서 60여개가 발견된 바 있으며, 구슬수는 지역마다 1∼6개로 차이가 있다. 이들은 모두 사찰 안의 불상이나 불탑 주변에서 발견됐며, 불교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사찰에서 발견된 납 구슬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학술적 규명 없이 몇 가지 추정만 있을 뿐으로, ▲보주(寶珠)의 일종 ▲건물을 세울 때 안전을 빌며 묻었던 예물인 진단구나 지진구 ▲일제 소행으로 전국 각지에 박았던 쇠말뚝처럼 조선의 지기(地氣)를 누르기 위한 용도 ▲임진왜란 당시 사용됐던 탄환 등의 설이 있다.
대부분 납 구슬 설치 목적을 분명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어느 시대에 누구에 의해 설치됐는지 조차 알려진 바 없다. 출토지에 따라 신라시대 말엽부터 최근에 만들어졌다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이며, 불교문화재연구소는 포천 선적사지나 군위 인각사지 납 구슬 제작연대를 조선시대로 추정한다. 하지만 납 구슬의 제작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유물들과 함께 발견된 사례가 없어 근거가 미약한 실정이다.
김한남 원장은 "구정봉의 영기를 억눌러 큰 인물이 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묻은 것이어서 즉시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며, "조사과정에서 일반인에게 노출된 까닭에 고고학적 방법에 따라 납 구슬을 수거해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영암문화원은 이번 조사 결과를 '월출산 구정봉 제사터 연구'라는 제목으로 문화원 홈페이지(www.yaculture.org)에서 공개하고 있다.
이승범 기자 stonetig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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