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우재(愚齋) 이원형의 氣의 고장 靈巖을 말하다

(Ⅰ) 영암의 氣, 이곳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2019년 01월 11일(금) 15:24
한반도의 남쪽 영암에는 월출산이 있다. 월출산은 기(氣)가 충만하여 영암을 기(氣)의 고장이라고 한다. 이에 영암군은 '氣의 고장 영암'을 특허 출원하고 랜드 마킹하여 이제는 기(氣)하면 영암을, 영암하면 기가 연상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과연 기(氣)가 무엇인가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은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정서적 빈곤에 메말라 힐링을 찾고 있으며 이런 마음의 치유와 심신의 안정에 작용하는 무언가가 막연하게 기(氣)라고 생각한다. 이런 애매모호함에 기는 더욱 우리의 관심을 받고 있다.
동양의 우주론은 물질적 기초인 기의 운행으로 우주가 생기고, 모이고 흩어지는 기의 운동이 천지만물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로 우주와 자연현상은 물론 인간의 심성(心性)도 파악하려했다. 조선시대 퇴계와 고봉의 이기론의 사단칠정논쟁에서 보듯 우리 선조들에게 기는 막연함이 아니라 우주관과 세계관 그리고 인간의 본성까지도 설명하는 핵심원리였다. 그래서 기는 일상 곳곳에 녹아 있었다. 오늘까지도 우리 주변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기의 흔적을 찾아보면 기(氣)가 무엇인가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氣)는 어디든 존재한다. 빈 공간 허공은 공기이고 공기는 비어있지만 기로 가득 차 있다. 둘째, 기는 만물의 본질이다.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는 기로 이루어져 있다. 셋째, 기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감기, 열기, 한기, 온기, 냉기, 생기 등 우리가 느끼는 기는 매우 다양하다. 넷째, 기는 모였다 흩어지는 모습으로 간단없이 움직이는 존재다. 이를 기운(氣運)이라 하는데 기가 막히거나 끊어지면 죽고 기가 도는 힘이 좋으면 기운이 세다고 한다. 다섯째, 기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힘이다. 만약 우리가 기를 쓰기만 하면 머잖아 기진맥진해지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처럼 기의 자취는 우리 주변 곳곳에 존재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순 없다. 다만 기가 막히거나 전부 소진되면 몸과 마음이 상하므로 우리의 삶에는 기를 쓰는 것만큼 기를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기를 모으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좋은 방법은 자거나 먹거나 쉬는 것으로 이는 심신회복의 기본이 된다. 우리 인간은 기가 쇠잔해지면 먹고 자고 쉬는 것을 통해서 기력을 회복한다. 대체로 잘 먹고 잘 자는 것은 사는 집에서 해결할 수 있으나, 잘 쉬는 방법 즉 힐링을 통한 심신 안정은 맑은 기가 세고 넘치는 곳에서 온 몸으로 기의 세례를 받아 심신을 정화시키는 것이 가장 좋다. 해서 이른바 기가 세다고 알려진 기의 고장 영암에서도 청정한 기를 접할 수 있는 곳을 소개한다.
영암에 있는 월출산 국립공원은 그리 높지 않으나 돌병풍처럼 서 있는 산의 풍채는 매우 웅장하고 수려하다. 월출산은 천황봉을 주봉으로 구정봉, 향로봉, 사자봉, 주지봉 등 수 많은 봉우리들이 바위들로 이뤄지고 이어져 저마다 맵시를 뽐내고 있다. 월출산은 전후좌우 기암괴석이 병풍인가 싶으면 거대한 수석이요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가 되는 등 그냥 바위들의 향연이요 그대로 기암들의 전시장이다. 온갖 자태로 저마다 수려한 모습을 연출하는 기묘한 바위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영암읍에서 월출산 서쪽에 전통마을 구림(鳩林)이 있다. 고대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여 일본에서 문성(文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왕인박사와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비조인 도선국사가 이곳 구림에서 태어났다. 이에 영암군은 왕인박사 탄생지로 추정되는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에 왕인박사유적지를 조성하고 벚꽃이 만발하는 4월 초에 왕인문화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 축제에는 다수의 일본인도 참가하여 이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제축제로 자리매김하였다.
왕인박사유적지가 있는 월출산 문필봉 월대암 아래에는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학문을 가르쳤다는 문산재와 양사재 그리고 책굴 등이 있다. 오래전부터 이곳은 고아한 문기(文氣)가 센 곳으로 알려져 시험을 앞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과 학부모는 이곳을 찾아 합격도 염원하고 문기의 세례를 듬뿍 받길 바란다. 이곳은 왕인박사 유적지 뒤편의 오솔길과, 돌담길로 유명한 죽정마을 뒷산 길로 가면 쉽게 오를 수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도갑사가 있다. 해동풍수지리의 비조인 도선국사가 이곳에서 태어나 절을 세웠으니 만만치 않을 도갑사의 지기를 짐작할 수 있다.
도갑사에는 국보인 해탈문 등 다수의 문화재가 있다. 그중 보물 89호인 석조여래좌상은 본래 대웅전의 주불이어야 할 석가여래가 파격적으로 미륵전의 미륵으로 모셔져 세상의 구원을 염원하는 민중의 미륵사상을 반영하고 있어 이채롭다. 특히 이곳 미륵전의 기는 너무 사나워 기에 민감한 사람은 오히려 기피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기감에 자신이 있다면 한번 체험해 보길 바란다.
도갑사 뒤 도선국사비를 지나 왼쪽으로 찬찬히 찾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산죽이 숨은 수줍은 길이 보인다. 비밀통로 같은 숲길을 한참 오르면 기묘한 봉우리와 절벽이 빼어난 경관 속에 살포시 모습이 드러나는 상견성암(上見性庵)에 이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경외감이 모골마저 송연케 절벽위에 매달린 상견성암은 선승들의 청정한 수행처이자, 견성의 증득처다. 19년의 장좌불와로 유명한 청화(靑華) 큰 스님이 이곳에서 3년간 묵언수행 중 득도를 이룬 곳으로 선승들에게 이름 높은 곳이다. 청정한 힐링을 원한다면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되지 않게 살며시 상견성암을 찾아 정녕 청아한 자연의 기를 체험해보자.
월출산은 어디든 기가 넘치지만 가장 충만한 곳은 단연코 구정봉이다. 구정봉에서 바라보는 파노라마는 그대로 바위들의 경연장이요, 각축장이어서 언설로는 표현할 수 없고 그냥 조물주의 조화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구정봉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월출산에서 가장 아름답거니와 근처 어딘가에 이른바 우리나라 3대 명당이라는 천자지지가 숨어 있다고 전해지고 있어 지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바람재에서 바라 본 구정봉이 사람 얼굴 모습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 주지하듯 큰 바위 얼굴은 미국 호손의 소설로 우리 인간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메신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소설의 모티브였던 미국 화이트 산 큰 바위 얼굴이 무너진 후에 월출산에서 큰 바위 얼굴이 발견되자, 이곳이 도선 국사의 탄생지이고 월출산 구정봉과 주지봉 아래에 천하제일의 명당 터가 있다는 구전과, 도선비기에 나오는 큰 인물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초들의 바람 속에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과연 도선비기와 정감록이 예언한 인물이 나올지는 지켜 볼 일이지만 100m가 넘는 큰 바위 얼굴은 대단히 경이롭긴 하다. 큰 바위 얼굴을 찾아 각자 마음속으로 자신이 바라는 진인(眞人)의 출현을 염원해 보는 것도 특별한 체험이 아닐까 싶다.
구정봉 아래에 한국제일의 가람지라 극찬을 받고 있는 용암사지가 있다. 이곳의 뛰어난 전망과 아름다운 광경은 그대로 무릉도원이요 신천지이다. 실제로 이곳에 서면 수려하고 장쾌한 자연미에 깜짝 놀라며 사람에 따라서는 속세의 찌든 일상에서 벗어나 청정한 본래 마음자리를 보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곳 동남쪽 절벽에 주변의 기암 풍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 8미터가 넘는 거대한 불상인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웅대하고 장엄한 이 불상은 국보 제144호로 우리나라 국보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애불은 건너편 암반위의 소박한 삼층석탑 넘어 드넓은 서북향 영산강 들녘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이 마애불은 영산강 유역 들녘의 풍요와 바다로 향하는 구림 상대포구 뱃길의 안녕을 담은 간절함을 오롯이 담아 높은 산 절벽에 이처럼 거대한 불상을 새겼을 것이다. 이 감동스러운 불심에는 설령 불자가 아니더라도 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곳은 월출산에서 가장 기가 맑고 청정한 곳이지만 등산로에서 벗어나 있어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본래 이곳으로 오르는 길은 월출산 큰 골이나 여기에 상수원저수지가 생겨 수십 년간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현재는 이곳 상수원은 용도를 다해 영암군은 상수원보호지구를 해제하고 등산로 개설을 계획하고 있다. 이 등산로가 개설되면 이곳의 정화된 기는 대구 팔공산 갓 바위에 비견되는 남도 제일의 기도터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천황사계곡과 누릿재 사이에 월출산의 비경을 간직한 칠지계곡은 등산로가 정비되지 않아 아직 접근이 불편하나,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은 모두 빼어난 절경과 상쾌해진 심신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곳은 일곱 개의 폭포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평소에는 수량이 적어 폭포는 볼 수 없고 우기에만 그 현란한 자태를 만날 수 있다. 칠지계곡은 월출산의 또 하나의 숨겨진 보석으로 자연의 기감을 느끼기에 매우 적당한 곳이다.
이처럼 월출산은 암석이 빚어낸 조형미가 빼어나고 맑은 기와 충만한 지령이 가득한 남도의 보석과도 같은 산이다. 만약 월출산 칠지계곡이나 큰 골에 케이블카가 개설되어 접근성이 보다 용이해진다면 삶에 지친 더 많은 사람들이 영암을 찾아 기의 세례를 흠뻑 받고 활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하나 된 영암군민의 염원과 영암군의 강력한 의지를 기대해 본다.
단조로운 일상을 잠시 벗어나, 기의 고장 영암으로 쇠약해진 기를 보충하기 위해 힐링 여행을 떠나보자.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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