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그리워하며!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19년 01월 18일(금) 16:22
배용태 시종면 출신 전 전남도행정부지사 목포대 교수 동산문학 수필 등단작가
고향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지난 2014년 30년 공직생활을 마감하기로 결정했을 때 무수히 많은 생각이 마치 오래된 흑백 필름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숱한 장면들 중 가장 또렷한 형체를 그려낸 것이 영암 월출산이다. 갑자기 그 산이 보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고향집 대청마루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이 월출산이다. 월출산의 웅장한 자태와 비범한 봉우리는 미래에 대한 꿈과 기상을 품게하는 큰바위 얼굴과 같은 존재였다.
30년 공직에 복무하는 매 순간 나는 늘 연어처럼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꿨다. 어린 시절 나의 미래에 대한 꿈이 시작된 곳에서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실현해보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영암은 내게 연어로 치면 모천과 같은 공간과 다를 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향은 하춘화의 영암아리랑 노래처럼 늘 내 가슴과 머리 속에 맴돌고 있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아리랑 동동 스리랑 동동 달 보는 아리랑 님 보는 아리랑~"
영암아리랑은 그저 노래가 아니다. 영암사람들의 사설이고 활달한 기상이고 다시 일어서는 힘이다. 이제 나는 새로운 의미의 영암아리랑을 부르고 싶다. 낮은 곳에서 오래 엎드려 있던 영암사람들이 세상에 당당히 서는 희망가로서 영암아리랑이다. 지금 영암은 새로운 미래의 길 위에 들어서고 있다. 전통 농업 군으로서가 아니라 미래가치를 창출하는 4차산업 선도 군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길을 영암 사람들과 함께 걷고 싶다.
돌아보면 지난 세월 쉼 없이 달려왔다. 국가의 녹을 받는 공직자로서 부끄럽지 않고 싶었다. 정책 고민에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고 애써 짜낸 정책들을 현실 안에서 이루기 위에 몰두해야 했다. 몸은 지쳐도 어릴적 보고 자랐던 월출산은 늘 마음속에 중심을 잡고 자리 잡고 있었다. 월출산을 머릿속에 그리는 순간 모든 피로가 말끔히 사라졌다.
영암의 대외적 이미지와 잠재적 가능성을 한마디로 축약하는 말이 바로 '영암은 월출산과 영산강이다'이다 영암부군수 시절 나는 자주 월출산과 영산강변을 찾았다. 그 모든 풍경 속에 고향의 멋과 맛이 들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제 남은 일은 그 풍경들을 문화와 관광의 산업적 부가가치로 조밀하게 짜내는 것이다. 그것이 영암의 미래다.
고향을 생각하니 무엇보다 나를 되돌아보아진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오늘은 어제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과적으로 삶은 순환하는 것이고 지난 세월동안 고향과 함께 걸어온 걸음은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의 나침반으로 작용할 것이다. 나는 지금 새로운 길 위에 서있다.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의 추억은 나의 내부 동력을 성장시켰고 그 힘으로 나는 직업공무원으로서는 최고직인 1급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전라남도 행정부지사라는 과거의 직함도 사실은 영암이 만들어준 것이라 생각한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보인다. 고향 집 마당에서 내 꿈은 시작됐다. 시선이 하늘로 향하면 산자락이 수묵화처럼 아름다운 월출산이 담겼고 눈빛이 땅에 닿으면 거대한 몸집으로 들을 적시는 영산강 물빛이 깊었다. 내 고향 영암군 시종면 구산리 집마당에서 둘러보는 마을 풍경은 항상 웅장했다.
아주 어릴 적에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났지만 늘 고향 마을 풍경이 눈에 선하다. 삶이 힘겨울 때면 어김없이 고향 집 마당에서 굽어보던 월출산과 영산강이 떠오른다. 그 힘찬 산과 강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다시 삶의 신발 끈을 조여 맬 힘이 생겼다. 삭막한 세상이 살아볼 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하구언이 막히기 전 영산강에는 민물과 짠물이 몸을 섞었다. 내륙이면서도 바다와 다르지 않았던 곳 내 고향 구산사람들은 바다 쪽으로 흐르는 영산강의 힘으로 반농반어의 삶을 살았다. 시종면에는 아내 없이는 살아도 장화가 없으면 못산다라는 말이 있다. 굽이치는, 흐르는 영산강이 마을의 삶을 적셨기 때문이다. 구산리 사람들은 매일 내륙과 바다를 함께 보고 듣고 살았다. 드넓은 논에서 허리 굽혀 피를 뽑다가도 바다가 밀려 들어와 영산강의 몸이 불면 강에 배를 띄웠다.
그물을 던지면 바다고기인 농어와 민물고기인 메기가 함께 얽혀 나왔다. 강 가장자리에 돌을 쌓아두면 그 돌 속으로 들어간 장어가 잡혀 나오기도 했다. 시종면을 흐르는 영산강은 강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었다. 밀물 때에는 바다였다가 썰물 때에는 다시 강이 됐다. 불고 줄어드는 수위 속에 강이 있고 바다도 함께 있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고향 마을 사람들의 꿈은 내륙에서 시작해 바다로 뻗었다.
나의 고향 구산리는 달성 배씨 집성촌 이었다. 모두가 이웃사촌이었고 실제로도 일가친척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문밖을 나서면 인사성이 발라야 했고 아버지 어머니 교육은 엄격한 편이었다. 피의 내림은 매우 강한 것이어서 나를 교육시킨 것은 부모님 뿐만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허투루 행동하면 마을 어른 누구라도 불러서 엄한 훈계를 했다. 온 마을이 아이들을 때로 나무라고 가끔은 다독이며 키웠던 것이다.
부모님은 늘 자신보다 남을 배려하셨다. 특히 책임감을 힘주어 강조하셨던 아버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명언을 어린 내게 자주 들려 주셨다. "책임감이 있는 이는 역사의 주인이요, 책임감이 없는 이는 역사의 객이다"는 말이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큰 틀인 역사의 주객논리를 통해 내가 최소한 자기 삶에 책임감을 가지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살림이 넉넉하지 않은 편이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농사를 짓는 집안이었다. 순결한 땅의 가치로 삶을 일구는 평범한 농촌의 가정이었던 것이다. 다만 할아버지는 없는 살림에도 공부의 중요성을 일찍 깨우쳐 아버지의 학업을 장려했다. 그 덕에 당시로서는 시종면 전체를 통틀어 매우 드물게 5년제로 운영됐던 목포상고를 졸업할 수 있었다.
나는 어릴 적 고향 구산리를 떠나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심지어 초등학교만 5곳을 다녔다. 한 곳에 정착해 오래 머무를 수 없었던 내 유년시절은 아버지의 직업과 관련이 깊다. 아버지는 교육행정직 공무원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 초등학교를 옮겨 다녔다.
고향은 늘 마음속에 있고 고향이 있기에 살아가는 원동력이 생긴다.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오만,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흘러가니 더욱 고향 생각이 난다. 아~ 고향은 늘상 좋은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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