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우재(愚齋) 이원형의 氣의 고장 靈巖을 말하다

"신령한 바위가 뿜어낸 地氣는 왕인, 도선 등 수많은 인걸을 낳고…"
(Ⅱ)月出山의 地靈이 氣를 발산하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19년 01월 18일(금) 17:01
한반도의 남쪽, 산의 정기와 물의 맑기가 팔도의 으뜸이고, 기름진 들판은 망망한 천혜의 보고요, 남도 제일의 지령(地靈)으로 석덕(碩德)과 명유(名儒)가 배출된 고장이 영암이다.
한반도 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영암은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4세기 경 백제(근초고왕)에 복속되어 월나군(月奈郡)으로, 통일신라 때 영암군으로 불리었다. 고려시대 때 낭주(朗州) 안남도호부가 설치되어 명실상부한 호남의 유력 지방이었으나, 도호부가 전주로 이전되어 영암군으로 환원되고 조선시대를 걸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영암군은 전라남도 22개 시·군 중 만만치 않은 군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제주도 추자도와 해남 땅 끝 미황사가 영암군에 속하였으니 대단했었던 그 위세를 짐작 할 수 있다.
전하는 얘기로는 영암 월출산에 움직이는 바위 3개가 있어, 이 동석(動石)의 기운을 받아 이곳에서 큰 인물이 많이 난다 하여 이를 시기한 중국인이 산 아래로 떨어뜨렸는데, 그 중 하나가 스스로 올라오자, 이를 신령한 바위라며 고을 이름을 영암(靈巖)이라 했다고 한다.
그 영향 때문인지 영암에서는 많은 인물이 나왔다. 문자가 없는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주어 일본에서 문성(文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왕인(王人)박사와 우리나라 풍수학의 대가 도선(道詵)국사는 영암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외에도 나말 여초 때의 선각대사 형미(逈微)대사와 동진대사 경보(慶甫), 고려시대 별 박사인 민휴공 최지몽(崔知夢), 조선시대 연촌 최덕지(崔德之), 세조의 왕사인 수미(守眉), 삼당시인 고죽 최경창(崔慶昌), 진충보국 임진왜란의 영웅 충장공 정운(鄭運),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을 평정한 양무공 김완(金完), 가야금 산조를 창시한 악성 김창조(金昌祖),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법무장관을 지낸 낭산 김준연(金俊淵),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지만 호남은행의 설립자 무송 현준호(玄俊鎬), 우리나라 교육보험을 창시한 교보생명 설립자 대산 신용호(愼鏞虎), 바둑 황제 조훈현(曺薰鉉)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언제부터 영암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 확실치 않지만, 서호면 장천리에서 선사시대의 수혈주거지와 고상가옥지가 함께 발견되었다. 이 주거지는 청동기시대 독특한 형태의 선사문화가 영암지역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적이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기원 전 10 세기경에 부족장무덤의 고인돌과 동검 그리고 민무늬 토기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고고학적으로 청동기시대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 시기에 평등한 씨족사회에 처음 빈부의 격차가 나타나고 지배 피지배 관계가 생겨 국가의 형성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고인돌이다. 고인돌을 만들려면 상당수의 인력 동원이 필요하고,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지배력이 있어야 했다. 영암에는 83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어 일찍이 이곳에 부족장이나 군장이 지배하는 유력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암을 포함한 영산강 유역은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4세기에 백제에 복속되었다. 고고학계는 당시 지배세력의 무덤인 고분의 발생 시기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3~4 세기경에 고대국가 체제를 확립하면서 강력한 통제력을 바탕으로 국가의 권위와 위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커다란 무덤을 축조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영암지역에는 주로 마한시대와 백제시대에 축조된 고분들이 혼재해 있다.
영산강 유역에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묘제인 대형옹관묘가 분포하고 있는데 주로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에 집중적으로 소재하고 있다.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 고분 250여기 중, 영암 시종면과 학산면에 150여기가 소재하고 있으며 시기도 앞서고 있다. 이에 일반적으로 고고학계에서는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가 영암의 시종일대를 중심으로 발전되다가 점차 나주 반남 등 주변지역으로 이동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영암은 우리나라의 옹관묘의 보고지역이라 하겠다.
또한 최근에 발굴된 시종면 신연리 고분은 이른바 일본식 묘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원(圓)형의 분구 앞에 사각(方)형의 단상부가 합쳐진 무덤. 모양이 장고 같다 하여 장고형분(長鼓形墳)이라고도 함)으로 밝혀져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일본에서 유행한 전방후원분은 한반도에서는 오직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되어 그 성격을 두고 한일 양국의 고고학계가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인식에 있어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은 고대사에, 한국인은 근대사에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 한국인들은 고대사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에서 일본 고대사를 무시한다. 일본에서 유행한 전방후원분이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자,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마한 시대의 묘제가 일본에 전해졌다는 주장이 어김없이 우리 학계에서 나왔다. 전방후원분에 대한 역사학계의 논란을 여기서 자세히 언급할 순 없지만, 다만 영암출신 왕인박사가 일본에 문자를 전해 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영암을 포함한 영산강 유역은 고대에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던 지역이다. 전방후원분이 이러한 활발한 문화교류의 산물일지니, 한 .일 양국의 고대 문화교류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고대 즉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영암이 해외 무역항으로 명성이 높았다.
조선시대 1751년 편찬된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신라에서 당으로 갈 때는 영암군 바다에서 배를 타고 흑산도, 홍도, 가거도에 이르고, 여기서 북동쪽으로 대주 영파부에 도착 한다’ 또 ‘남송에서 고려로 가려면 정해현 해상에서 배를 출발하여 칠 일만에 고려에 상륙하는데 그곳이 영암군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고대 무역항이었던 영암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영암 출신 왕인박사도 백제시대 405(아신왕 14년)년에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영암 상대포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와의 문화교류가 대부분 영암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많은 구법승들과 유학생들이 영암에서 중국으로 떠났다. 신라 말엽에는 소위 3최인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와 김운경 김가기 등이 모두 영암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이 시기에는 영암을 통해서 중국의 산동 반도와 상해 그리고 일본과 동남아는 물론 저 멀리 아라비아와도 교역이 활발하였다. 영암은 고려시대까지 국제무역항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지금은 영화롭던 옛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출발했다는 상대포가 복원되었지만 이미 포구로서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세월의 무상함만이 아련하게 길손의 가슴을 저민다. 예나 지금이나 영암지역은 해외와의 교역이 활발한 고장이다. 오늘 날에도 대불항은 자동차의 수출기지로 전남서남부의 거점항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금 영암에서는 예전에 찬란했던 국제무역항의 자취는 찾을 수 없고 상대포, 배바우, 해창 등 바다와 관련된 지명만이 전해지고 있어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영암의 상징 월출산, 충만한 氣를 발산하다
월출산을 빼놓고는 영암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월출산은 호남의 5대 명산의 하나로 소금강이라 불리며 많은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매월당 김시습은 '남쪽의 그림 같은 산'이라 했고, 고산 윤선도는 운해속의 월출산을 '선경(仙境)'이라 했다.
신라 때 월나산 고려 시대에 월생산으로 불린 월출산은 이름에서 보듯이 달과 관련된 산이다. 월출산에 달뜨는 광경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김시습은 '남쪽 고을의 한 그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서 오른다'며 달뜨는 월출산의 모습을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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