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관심 끄는 학파농장과 학파저수지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2019년 01월 25일(금) 14:24
학파저수지가 느닷없이 개인소유가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파농장과 소작쟁의 등 영암지역 근·현대사의 한 장면이 엊그제 일처럼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대법원은 개인명의 농업기반시설(저수지)에 대해 토지소유자 동의 없이 농지개량조합 관리구역으로 편입하고, 농어촌공사 명의의 농업기반시설로 등록한 것은 하자의 정도가 중대하고 명백해 무효라고 판단해, 군민들은 ‘과연 당시에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지금에 와서야 국가 소유의 저수지가 개인 소유로 돌변하게 됐는지’ 의아해 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학파1저수지의 축조 및 불하 과정과 관련해서는 관련 자료를 찾기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세월이 워낙 많이 흘러 관계자의 증언을 듣기도 어려웠다. 다만 등기부상 소유권 변동과정과 대법원 판결문을 통해 윤곽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영암 농업발전의 전기 학파농장·학파저수지
학파농장(서호 간척지)은 무송(撫松) 현준호가 1940년 4월 착수해 1962년 10월 26일 농림부로부터 준공인가를 받은 간척지다. 간척지 완공은 현준호의 삼남 현영원(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부친)이 했다.
서호면과 군서면 일대 백암동, 신기동, 서호동, 학파동, 남하동, 무송동 등 이름이 ‘동’자로 끝나는 마을들은 바로 이 학파농장 간척사업 때문에 생긴 마을들이다. 하지만 학파농장은 비단 이들 마을뿐 아니라 몽해, 엄길, 성재리 등 군서와 서호면 전역, 그리고 영암군의 농업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보아야 한다.
현준호는 그의 증조부가 충청도 천안에서 영암 학계리로 이주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현준호의 부친 현기봉은 조부 현린묵은 이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한다. 현기봉은 한말 호남지방에서 의병운동이 격화되자 1908년에 치안상태가 좀 더 나은 목포로 이주했다.
현준호는 1919년 동경 유학에서 돌아와 1920년 호남은행을 창립했고, 1925년부터는 대표이사로 일했다. 이에 앞서 1922년 무렵에는 광주 부동정(호남동)에 터전을 잡고 1924년에는 완전히 이주했다.
학파농장은 현준호가 1924년 7월 부친이 사망하고 모든 재산을 물려받으면서 건립한 회사이름이기도 하다. 학파(鶴坡)는 부친의 호다. 1934년 5월에는 합명회사 형태로 법인화해 광주지방법원에 회사 설립 등기를 접수하고, 7월에는 정식으로 합명회사로 전환했다. 농업경영을 법인 형태로 전환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일이다. 합명회사 학파농장의 주요업무는 ▲토지 개량, 개간, 일반농사, 조림 ▲공사채주식, 토지, 가옥 등의 취득 및 매매, 임대차 ▲창고업 등이었다.
학파농장은 특히 간척을 통한 농지 확대에 적극 나섰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미암면 춘동리와 호포리를 매립했고, 1935년에는 미암면 신포리, 1936년부터 1938년까지는 해남군 계곡면, 1940년에는 군서면과 서호면 등의 매립공사를 했다.
학파농장이 본격적인 간척사업을 시작한 것은 1939년 11월 군서면 양장리, 모정리, 서구림리와 서호면 소산리, 쌍풍리, 엄길리, 몽해리의 공유수면매립면허를 신청하면서다. 현준호는 1940년 4월 조선총독부로부터 매립면허권을 얻어 본격적으로 간척사업에 나선다.
하지만 사업 진척은 순탄하지 않았다. 서호면 성재리와 군서면 양장리 사이 1.2㎞ 갯벌을 막는 제방공사에 나섰으나, 기술적인 어려움을 겪은 끝에 1기 방조제 공사만 끝낸 뒤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다 1944년 7월 매립권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양도한다.
해방 후 현준호의 삼남 현영원이 간척공사에 다시 나서 당시 금액으로 6억8천300여만원을 투입해 완공했고, 1962년 10월 26일 농림부로부터 준공인가를 받았다.
학파농장이 일군 간척지 즉, 학파농장은 서호면과 군서면 등 2개면에 걸쳐 있는 농경지로 280여만평에 이른다. 그 용수원이 바로 학파저수지로 1962년 82만㎡ 규모로 준공됐다.
영암농민운동의 맥 이은 학파농장 소작분쟁

학파농장은 1920년 일본이 ‘산미증식 15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농촌의 수탈에 나설 무렵인 1943년 조선총독부로부터 개발권을 따내고 동양척식회사와 신탁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아 조성한 간척지인 점에서 일제 수탈의 역사가 담겨있다.
특히 1920년대 식민지 지주제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신안 암태도, 하의도, 임자도, 지도 등의 도서 지역과 나주 일대에서 격렬한 소작쟁의가 벌어져 영암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더구나 영암은 일본인 대지주와 농업회사, 한국인 대지주들의 농장이 크게 발달해 1930년대 이후에는 사회주의계열의 혁명적 농민조합 결성 시도도 있었다. 해방 후에는 좌익 계열이 농민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영암에서도 미곡 수집령 거부 투쟁이 대규모 발생하기도 했고, 항일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50~60년대 침체되었던 영암지역 농민운동은 1970년대 들어 종교계열의 농민운동이 활발해졌고, 19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이 확산되면서 농민운동단체들도 크게 늘었다. 학파농장 소작민들이 간척 당시의 약속대로 토지를 양도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인 학파농장 소작분쟁은 그 연장선이었다.
학파농장은 1944년 제방공사가 끝났음에도, 그로부터 18년 후인 1962년에야 비로서 법률적인 준공인가를 마쳤다. 그러는 동안 소작민들의 반발이 끊이질 안았다. “20년 동안 5할의 소작료를 납부하면 토지를 분배해주겠다는 현준호의 약속에 간척사업의 고된 노역도 마다 않고 오직 내 땅이 생긴다는 기대감 속에 살아왔다”고 주장하며 분배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제방공사가 끝났음에도 18년 후에야 법률적 준공인가를 마친 사실까지도 경작민들에게 불만요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농지개혁법은 미등록 토지나 미완성 농지는 분배대상 농지에서 제외된다는 조항이 있었고, 학파농장이 이를 악용해 군서와 서호면을 잇는 일명 ‘대성다리’의 완공을 의도적으로 계속 미루고 미간척지임을 내세워 토지분배를 회피했다는 주장이었다.
소작민들은 특히 1962년 행정적으로 완공한 점을 들어, 결과적으로 18년간 등록도 되지 않는 농토에서 부당이득을 취한 것이 땅값의 2배에 해당하므로 무상양도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각계각층에 진정서와 탄원서 등을 보내기 시작했다. 또 1988년에는 ‘학파농장소작철폐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투쟁에 나선다.
같은 해 유인학 국회의원의 발의로 ‘간척지 등의 양도에 대한 양도소득세 등 면제특례’라는 특별법이 제정됨으로써 분쟁 해결의 실마리가 생겼다. 장기임대농지 매매의 경우 매수·매도자에게 세금감면 혜택을 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이었기 때문이다.
소작민들도 당초 주장했던 무상양도에서 평당 2천원으로 양보해 협상에 응했다. 그러나 학파농장은 1만원을 요구하며 7년여 동안 지루한 줄다리기를 벌인 끝에 1995년 전정식 군수 재임시절 소작민들이 평당 6천500원에 매수하되 정부가 20년 분할상환조건으로 대신 갚아주기로 하면서 합의를 보기에 이른다.
학파1저수지 일부 유지도 함께 개인에 매각
학파농장 매각과 함께 학파1저수지도 매각된 것으로 보인다. 가격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평당 6천500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추측이다.
저수지 총 면적 82만㎡ 가운데 이번에 법적분쟁이 일어난 51만937㎡는 1996년 2월 최모씨 등 가족 3명이 9만9천174㎡씩 매입했고, 박모씨가 9만9천174㎡, 신모씨가 9만9천382㎡를 각각 매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머지 1만4천859㎡는 그대로 학파농장 소유다.
이후 최씨 일가 소유 29만7천522㎡는 A농수산주식회사에 매매된 뒤 수차례 경매 또는 매매 과정을 거쳐 소유권이 변경된 뒤 현재는 농업법인 신안이 모두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 박씨와 신씨가 소유하던 19만8천556㎡는 신승남 전 검찰총장 소유로 되어 있다. 신승남씨는 2005년 11월 이를 상속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개인소유로 된 저수지 부지가 이처럼 수차례 경매 또는 매매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그동안 저수지를 관리해온 농어촌공사 영암지사는 결과적으로 수수방관한 셈이 됐다.
여기서 의문은 학파1저수지 총 면적 82만㎡ 가운데 49만6천78㎡만 매각된 점과 당시 영암농지개량조합 조합장이었던 최모씨 일가가 매입하게 된 경위다. 하지만 아쉽게도 소유권 변동은 등기부등본 상으로만 확인할 수밖에 없고, 어떤 경위로 저수지 토지를 매입했는지 당사자에게 확인할 방법은 없는 상황이다.
학파1저수지 국가 소유에서 다시 개인소유로
학파1저수지가 공사(영암농지개량조합) 관리구역으로 편입된 것은 1997년 6월이다. 또 전남도는 2002년 1월 농업기반시설로 공식 등록을 하게 된다. 농업법인 신안이 행정소송을 통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 바로 이 두 가지 행정절차다.
대법원은 농업법인 신안이 낸 '농업기반시설등록 및 공사 관리지역 편입처분 무효청구' 행정소송에 대해 "서호면 엄길리 1345번지 유지 51만937㎡ 상의 학파 제1저수지에 대해 피고인 한국농어촌공사가 한 1997년 3월 20일자 농지개량조합구역 편입처분과, 또 다른 피고인 전남도지사가 한 2002년 1월 24일자 농업기반시설 등록처분은 각각 무효임을 확인한다"며, "한국농어촌공사는 원고에게 서호면 엄길리 1345번지 유지 51만937㎡를 인도하라"고 확정 판결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1997년 당시 영암농지개량조합이 조합구역으로 편입한 학파저수지는 옛 농지개량조합법 제18조 조합구역 편입요건 중 국가, 지방자치단체, 농업기반공사가 설치한 기반시설이 없고, 1996년부터 1997년 사이 학파지구경지정리사업으로 서호양수장 용수간선과 학파저수지가 연결된 사실은 인정하나 그 지역은 조합구역으로 편입할 수 없는 지역이므로 영암농지개량조합의 조합구역 편입처분은 위법하다고 보았다.
대법원은 또 조합구역 편입에는 조합원 3분의2의 동의요건을 갖춰야 하는데, 당시 경지정리사업 및 조합구역 편입동의서상 조합원인지 여부가 불분명해 편입절차상의 하자가 존재하고, 편입절차과정에서 사전공고, 농림부장관의 승인이 이뤄졌다는 증거가 없다고도 판시했다.
대법원의 이 같은 판결로 결국 학파1저수지는 옛 영암농지개량조합의 조합구역 편입에 따라 농어촌공사가 관리하기 이전인 1997년 개인 소유 상태로 되돌려졌다. 또한 당시 소유자는 지금 모두 바뀐 상태다.
이춘성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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