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하루만, 딱 한번만 묵동마을에 가 주민들을 만나주세요"

묵동리 주민들, "이미 임계점…더는 미래의 재앙 속에 떠밀지 말라" 탄원서 제출
학산면사회단체 주민 등 1천여명 서명, 거리 곳곳 돈사 신축 반대 현수막 내걸려

이춘성 기자, 이승범 기자 yanews@hanmail.net
2019년 02월 15일(금) 09:46
강진·해남서 국도2호선을 따라 영암으로 들어가는 동쪽 관문에 자리한 학산면 묵동리. 호동마을과 밤재를 포함해 모두 40여가구 주민 100여명이 산다. 이중 안동네는 24가구쯤 된다고 고재호 이장은 설명했다.
안동네에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는 수령 200년쯤 된 팽나무에서 느낄 수 있듯이 유서 깊은 이 마을이 요즘 돈사, 우사 등 폭주하는 축사 신축허가 문제로 주민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참다못해 새해 들어선 주민들이 번갈아 군청 정문 앞에서 한파를 견디며 1인 시위를 벌였다. 고맙게도 최근엔 보다 못한 학산면 이장들이 바통을 넘겨받았다. <관련기사 4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곳에 우사와 돈사 등 축사 신축허가가 집중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세 번째로 묵동리를 찾은 날은 지난 2월 12일. 희뿌연 미세먼지 때문에 보기 흉하게 방치된 마을 앞산 석산도 보이질 않을 정도였으나, 악취는 덜했다. 때 마침 바람이 안동네서 고속도로 쪽으로 불어서다. 앞서 두 차례 방문 때는 정반대였다. 인근 돈사와 젖소농장에서 풍겨오는 악취 때문에 주민과 제대로 대화조차 힘들 정도로 역겨웠다.
고재호 이장을 비롯한 마을주민들은 이렇게 묻는다.
"마을을 두 동강 내버린 고속도로와 국도2호선을 지나는 사람들이 말합니다. 묵동마을 앞을 지나칠 때마다 창문을 잘 단속한 차안까지 거침없이 파고드는 악취 때문에 불쾌하기 짝이 없다고, 그런데서 어떻게 살고 있냐고, 인내심이 대단들 하다고 걱정하는 말을 보탤 때면 심한 모욕과 수치가 밀려듭니다. 이 모욕과 수치가 우리 주민들 탓입니까? 우리 주민들의 탐욕이 불러온 결과입니까? 우리가 잘못 결정한 대가입니까?…”
물론 주민들 잘못이라는 주장도 없진 않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과 임야를 지키지 못하고 판 잘못이다. 하지만 시세보다 훨씬 올려쳐주는 땅값을 외면할 재간은 없다. 더구나 땅 소유주들은 이미 마을을 떠나 산지 오래다. 실제 지금 묵동리 인근 임야 대부분이 외지인들 소유다.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워 무슨 큰 이권인양 앞 다퉈 신축허가를 신청하는 ‘기업형’ 축산업자들이 부르는 고가의 땅값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러다보니 지금 주민들이 결사반대를 천명한 ㈜승언팜스는 땅을 사기 위해 사채까지 끌어 썼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다.
“우리 묵동마을은 지금 심각한 환경재앙 앞에 놓여 있습니다. 수암휴게소 주변 묵동리 79-12번지 외 2필지에 돈사2동 허가신청을 낸 승언팜스에 이어 무려 4곳의 돈사허가 신청이 접수됐기 때문입니다. (유)에덴농업이 묵동리 산 99번지에 돈사 5동, 박여옥씨가 묵동리 79-3번지 외 1필지에 돈사 주2동 부2동, 이현영씨가 이미 허가를 받은 묵동리 산 98번지에 주 5동짜리 우사를 돈사로 축종변경허가를 신청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묵동리와 바로 인접한 상월리 64-6번지 외 11필지에는 (유)백상축산이 돈사 15동 신축허가를 내기까지 했습니다. 말 그대로 돈사 ‘쓰나미’가 몰려온 상황입니다. 이런 현실 앞에 묵동주민들은 물론이고 인근 주민들까지 극도의 불안과 걱정에 밤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이에 묵동마을 주민들은 물론이고 학산면이장단과 사회단체장, 학산면민들의 이름으로 돈사신축허가에 반대하는 탄원을 내기로 했습니다.”
고재호 이장의 설명이다. 조만간 영암군청과 영암군도시계획심의위원회 위원장 및 위원들에게 보내질 탄원서에는 12일 현재까지 1천여명이 서명했다.
탄원서는 그동안 묵동마을이 인내해온 고난의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고재호 이장을 비롯한 마을주민들은 “묵동마을은 이미 임계점에 다다랐다”고 호소한다.
실제로 작은 시골마을인 묵동리에는 무려 21개 농장이 자리 잡고 있다. 한우, 젖소, 흑염소, 돼지, 닭, 오리 등 사육중인 가축은 5만수가 넘는다. 동네 맞은편 흑석산 골짜기는 석산개발로 10년간 발파음과 분진을 뿜어낸 뒤 폐쇄, 회복불능의 파괴 흔적만 남겨져있다. 밤재 저수지 상류에 들어선 FRP조선소는 바닥까지 맑아 그냥 마셔도 될 만큼 깨끗했던 물을 심각하게 오염시킨 뒤에야 자리를 떴다. 대신 쉴 새 없이 비닐탄내를 뿜어내는 로프공장이 주민들을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게 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태양광 열풍이 몰아쳐 수려한 풍광에 임산자원이 넘쳐나던 산자락은 마구 깎여 위세 등등한 태양광 패널들이 흉물처럼 마을을 에워싼 채 희번덕거린다. 아스콘 제조 공장도 두 곳이나 된다.
고재호 이장은 “대한민국에서 개발이란 이름으로 한 마을을 이처럼 마구잡이로 유린한 사례가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라면서, “지나가는 사람 열 명을 붙잡아 묵동마을에 데려다 물어보라. 이곳이 사람 살만한 동네인지, 이래도 되는 건지…”라고 되묻는다.
탄원서는 주민들의 절박한 요구를 번번이 묵살하는 이른바 법과 제도에 따른 행정절차에 대해서도 성토한다. 그러면서 주민들은 “지금까지 수십 건의 개발허가를 내주는 과정에서 남은 주민들의 건강과 행복은 충분히 고려된 것입니까? 매일 되풀이되는 악취와 오폐수에 대한 걱정, 삶의 보금자리가 날로 위협받고 있는 두려움을 예방할 대책은 충분히 세우고 허가를 내준 것입니까? 더는 못살겠다며 이주대책을 세우라는 묵동마을 주민들의 쉰 목소리에 답은 준비돼 있습니까? 약자의 마지막 보루가 법과 제도라고 믿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행정에 호소하는 주민들에게 어떤 논리로 이해를 구하겠습니까?”라고 묻는다.
탄원서는 이어 대규모 자본을 앞세운 축산업자들 때문에 땅을 팔고 조상대대로 살아온 보금자리를 떠나야 하는 이웃들의 심정과 친환경 벼 재배단지의 젖줄이자 생명수인 율치제 오염 우려 등을 담아내며 더 이상 묵동마을 주민들을 재앙 속에 떠밀지 말 것을 호소했다. 이를 위해 돈사신축허가를 결정하기 전 도시계획심의위원회 위원장 및 위원들이 딱 하루만이라도, 딱 한번만이라도 묵동마을을 찾아 주민들을 만나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이춘성 기자, 이승범 기자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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