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우재(愚齋) 이원형의 氣의 고장 靈巖을 말하다 "왕인박사에 대한 역사적 근거 부족은 왕인축제 창의적 프로그램 발굴 계기될 수도"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
2019년 02월 15일(금) 15:29 |
왕인박사유적지 |
왕인박사에 대한 기록은 우리 사서에는 보이지 않는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에 왕인 박사는 백제 사람으로 왜왕의 초청을 받아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제철 기술자, 직조공, 도공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왕인 박사는 왜의 태자 스승이 되었고, 왜의 신하들에게도 경(經)과 사(史)를 가르쳤다. 왕인 박사의 후손들은 아스카에 살면서 함께 도래한 기술자들과 미개한 왜를 문명화시켜 일본이 자랑하는 아스카 문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일본의 고사기에는 '화이길사', 일본서기에는 '왕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인 박사의 도래 시기는 일본서기에 서기 285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의 연대가 중국사서와 우리 삼국사기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 두 갑자 즉 120년의 차이가 있어 학계에서는 405년(백제 아신왕 14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일본사서의 이런 차이는 일본이 천황제의 확립을 위해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저술하여 허구의 전설을 역사적 사실로 미화시켰기 때문이다. 이 책들이 쓰인 8세기는 일본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일본 지배층에게는 일본 문화가 통일신라 문화보다 우수하다는 선전이 필요한 시기였다. 나아가 일본은 근대에 아시아 여러 나라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황국사관의 확립을 위해 왜곡된 일본서기의 기록을 사실로 부각시키는 거듭된 역사왜곡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역사적 자존심에 생채기를 주었고 지금도 한·일 양국의 외교적 마찰은 물론 양 국민간의 우호증진에도 막대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시각의 교정이 없는 한, 왕인 박사를 매개로 일본과의 우호증진을 바라는 영암인의 입장이 곤혹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일본에서 문성(文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왕인 박사에 대해 월출산 주지봉 아래 이림(爾林)마을이 왕인 박사의 탄생으로 성기동(聖基洞)이란 이름을 얻고, 그 뒤 도선의 출생 후에 구림으로 바뀌었다는 구전이 영암에 전해져 왔다. 이를 토대로 왕인박사의 탄생지로 추정되는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에 왕인박사유적지가 조성되었다.
이 유적지에 왕인박사의 사당인 왕인묘와 백제문, 영월관 등을 건립하고 박사가 학문을 배우고 가르쳤다는 문산재와 양사재 그리고 책굴 등을 복원하였다.
영암에서는 벚꽃이 만개하는 4월 상순에 왕인박사유적지와 왕인 박사가 일본으로 떠났다는 상대포 일원에서 왕인문화축제를 열어 박사의 위덕을 기리고 있다. 축제시기에 영암은 월출산 1백리 벚꽃 물결
속에 많은 상춘객이 찾아 왕인문화축제는 대한민국의 대표축제로 자리 잡았다.왕인박사유적지에는 전국의 유명 인사들의 육필을 모아 새긴 천자문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천자문은 6세기 중국 남조의 양 무제의 명으로 주흥사(周興嗣)가 쓴 천자문이다. 저자 주흥사는 왕인 박사의 도일로 추정되는 시기에는 태어나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왕인이 일본에 전한 천자문은 위나라 종요(鍾繇)가 쓴 천자문 일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당시에는 천자문이 정형화되지 않고 천자의 글자를 모아놓은 것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함에도 훨씬 후대에 만들어진 천자문을 새겨놓고 최소한의 설명도 없는 역사적 무감각과 빈약한 문화적 통찰력은 마냥 유감스러웠으나, 지금은 이를 알리는 표지가 설치되어 매우 다행스럽다.
영암의 대표축제로 자리 잡은 왕인문화축제에는 일본 관광객도 많이 찾아 이미 국제적 축제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있다. 근자에는 한옥건축박람회와 동시에 열려 시너지 효과를 냈었다. 특히 왕인 박사에 대한 역사적 근거의 부족함은 반면에 창의적인 프로그램의 발굴을 가능케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음에 우리 모두의 중지를 모아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