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우재(愚齋) 이원형의 氣의 고장 靈巖을 말하다

"종교적 색체 불식 도선의 風水와 영암의 氣 융합한 문화유산 발전방안 절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19년 02월 28일(목) 15:03
도갑사대웅보전
신라 말의 선승으로 풍수지리의 비조로 추앙받고 있는 도선 국사는 영암이 낳은 인물 중 가장 유명하다. 월출산 주지봉 아래 성기동에 사는 최씨 처녀가 빨래를 하다 떠내려 오는 오이를 먹고 임신하여 아이를 낳아, 처녀 몸으로 출산한 수치스러움에 아이를 숲속 바위에 버렸는데, 비둘기들이 날개로 덮고 보호하는 것을 보고 범상치 않는 아이라 생각하여 집에 데려와 길렀더니 후에 도선 국사가 되었다. 그 후 마을 이름을 비둘기 숲이란 구림(鳩林)이라 하고 아이가 버려진 바위를 국사암(國師巖)이라 한다는 도선 국사의 탄생설화는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도갑사석조
그 당시 신라는 삼정의 문란 등 왕조의 말기적 현상이 나타나고 각 지방의 호적들과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는 등 혼란이 극심하였다. 또한 사상계에도 귀족 불교인 교종중심의 불교계가 타락하자 이에 맞서 수행중심의 선종이 전래되어 도의선사가 장흥 보림사에서 개창한 가지산파를 필두로 신라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에 선종 9산이 생겼다. 15세에 영암의 월암사로 출가한 도선은 9산의 하나인 곡성 태안사의 동리산파의 혜철의 가르침을 받아 득도하여 동리산파의 2대 조사가 되었고, 광양 백운산 옥룡사에서 제자를 가르치다 열반하였다.
도선은 뛰어난 선승이나 우리에게 승려보다는 풍수설의 대가로 더 알려져 있다. 이는 고려 태조 왕건이 그 당시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도선비기의 참위설과 불교신앙에 의지하여 고려 왕조에 의한 후삼국의 통일이라는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달성하려고 도선의 명망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왕건은 신라가 함부로 사찰을 세워 지덕을 손상하여 멸망했다며, 산수의 순역을 살펴 사찰을 세워야 지덕이 손상하지 않고 국운이 길하다는 훈요십조를 남겨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보풍수를 널리 유포하였다. 사후 선각국사로 추증되며 고려 왕조의 지극한 공경 속에 도선 국사의 이른바 비보풍수는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이 도선 국사를 창건주로 내세우는 등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풍수를 어찌 평가하든 집터나 묘를 쓰는데 모두 풍수를 운운하니 이미 우리생활의 일부로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영암군민과 영암군은 해동풍수지리학의 비조 도선 국사가 이곳에서 태어났으니 영암의 기와 풍수를 접목한 학술대회나 축제 등을 개최하여 영암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으로 발전시키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종교적 색체를 불식하고 도선 국사의 풍수와 영암의 기를 문화적으로 융합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로 영암을 비상시킬 무한한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라 하겠다. 우리 모두의 인식과 발상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된다 하겠다.
구림에서 도갑사로 오르는 길은 꽤나 운치가 있다. 십 여리를 지나 도갑사 입구에 이르면 범상치 않는 노거수가 외롭게 길손을 맞이한다. 이를 보노라면 결코 만만치 않았을 사하촌의 흔적에 세월의 무상함만 나그네를 상념에 잠기게 한다.
도갑사 영정
도갑사는 월출산에 있는 사찰 중 규모가 가장 큰 절이다. 고즈넉한 운치가 있는 천년고찰 도갑사는 영암 출신 도선 국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 초기에는 조선 왕실의 발원으로 신미선사, 수미왕사에 의해 대대적인 불사로 996칸 규모에 12암자를 거느리고 900여명의 스님들이 머물렀던 대찰이었다고 한다. 도갑사 앞뜰에는 스님들이 사용한 ‘강희 21년 임술’(1628년)이란 명문이 새겨진 5미터 규모의 석조가 있어 예전 도갑사의 사세(寺勢)를 짐작할 수 있다.
도갑사는 유난히 화재가 많이 발생하여 월출산이 풍수에서 말하는 화산이기 때문이란 말도 떠돌았다. 최근 1977년의 화재로 높이 6m가 넘는 국보급 미륵불과 4톤가량의 대종(大鐘) 등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금의 천불전을 대웅전으로 복원해 사찰로서 명맥만 유지해 오다, 최근 영암군민과 영암군이 힘을 모아 그나마 지금의 절집다운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도갑사는 규모에 비해 만만치 않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도갑사 해탈문은 우리나라에 드물게 남은 조선초기의 목조건물로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국보 제50호로 지정되었다.
미륵전 석조여래좌상(보물89호)은 본래 대웅전에 모시는 석가여래가 파격적으로 미륵전의 미륵으로 모셔져 세상의 구원을 염원하는 민중의 미륵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사자를 탄 지혜의 상징 문수 동자상과 코끼리를 탄 실천의 상징 보현 동자상(보물1134호)은 국내 유일의 동자상과 동물상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한 형태의 목조상이다. 본래 도갑사 해탈문에 있었으나 지금은 경내의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조선 효종의 명으로 당시 영의정 백헌 이경석이 비문을 짓고 예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오준이 글씨를 쓴 도선수미비(보물1395호)는 본래 비석이 오랜 세월에 귀부가 떨어지고 비신이 허물어져 다시 세운다는 내용이 상당히 이채롭다. 불교를 숭상한 고려시대와는 달리,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조선시대는 선비들이 특히 현직 재임 시에는 승려의 비문을 찬하는 것을 꺼리는 풍조였음에도, 도선수미비는 이례적으로 왕명과 당대 최고의 현직고위관료와 석학들이 모두 참여한 것으로 보아 도선 국사의 위명이 조선시대에도 유지되고 있었다는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라 하겠다. 도갑사 대웅전 앞에는 최근에 보물로 지정된 오층석탑(제1443호)이 있다. 이 탑은 본래 하층기단부가 없었으나 1995년 도갑사 발굴 조사 중 사라진 하층 기단부가 발견되어 2002년에 복원하여 유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이력이 독특한 문화재다. 불교신도가 아니더라도 영암에 가거든 문화유산의 보고인 도갑사에 들러보자. 잠시 일상을 떠나 한적하고 고졸한 산사의 풍치 속에 가벼운 산책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스님과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산중한담(山中閑談)을 나누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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