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에 옷 젖듯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19년 02월 28일(목) 15:10
정찬열
군서면 도장리 출신 미국 영암홍보대사
내 나이 열일곱 살 무렵은 참으로 막막했다. 천수답 몇 마지기에 목을 걸고 농사랄 것도 없는 농사를 짓고 있던 그 때. 한 짐 풀을 베어 지게에 지고 끄덕끄덕 돌아올 때면 긴 그림자가 앞장서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짐은 무겁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짐이 무거운 것이야 참을 수 있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다.
여름 밤, 뒷등 비석거리에 혼자 앉아 개똥벌레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깜깜한 하늘을 종횡무진 누비는 녀석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들은 어떤 촉수를 지녔기에 칠흑 같은 세상에 푸른빛 길을 만들어 저렇게 날 수 있을까.
책 속에 길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읽을만한 책이 없었다. 100여호 남짓되는 제법 큰 마을이었지만 읽을거리라곤 이장집으로 배달되는 신문이나 '농원' 같은 잡지 몇 권이 전부였다. 인근 동네는 물론 20리정도 떨어진 읍내까지 나가 책을 빌려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깡촌이라 호롱불 아래 책을 읽었다. 마루밑에 파 놓은 고구마 저장굴은 겨울이 지나면 비었다. 여름이면 책읽기에 그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친구도 모기도 그곳까지 쫒아오지는 못했다.
방학이면 도시로 고등학교를 간 친구들이 찾아왔다. 나는 언제쯤 고등학생이 될 수 있을까. 대학은 먼 나라 얘기였다. 책을 읽고 또 읽어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가까이 하는 습관을 들이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집에 있을 때는 물론 외출할 때도 읽을 거리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그 무렵 작가 심훈이 쓴 <상록수>를 읽었다. 5·16 군사쿠테타 이후 농촌에 4-H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던 때라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의 농어촌 계몽운동에 갚은 감동을 받았다. 박동혁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이민 온 후 20년 넘게 아이들의 뿌리교육에 관심을 두고 한국학교 교장으로 봉사했던 것은 소설 <상록수>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
가슴에 남은 한마디 말, 기억속에 박힌 한가지 풍경이 평생의 지침이 될 수 있다. 한 권의 책에서 그것을 얻을 수도 있고, 어떤 분과의 만남을 통해 체득될 수도 있다. 지금도 깜깜한 밤하늘을 쳐다보면 생각나는 개,똥,벌,레. 그들은 내 스승이 되었다. .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내가 읽은 책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간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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